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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12화 (21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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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도 일어났다. 아진은 눈치껏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청장이라고, 여간 높으신 분이 아니었다. 선화가 공들이는 인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청장님도 오늘 오페라 보셨어요?”

    선화가 적당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장이 민망하다는 듯 귓불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웃었다.

    “예. 다 늙어서 이렇게 비싼 취향만 자꾸 늡니다.”

    “저도 젊을 땐 이런 데 하등 관심이 없었는걸요.”

    “정년퇴직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가, 마음이 울렁울렁한데 이런 곳에 와 있으면 좀 낫더라고요.”

    “청장님 정년퇴직이 어디 퇴직인가요. 아직 사회를 위해 해 주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허허, 그런가요? 듣기 좋네요. 노인네에게 쓰임새 있다는 말만큼 칭찬이 없지요.”

    분위기가 좋았다. 아주 막역한 사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또 무례하지도 않은 분위기. 아진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청장을 흘끔거리는데. 선화가 그와 석주를 소개했다.

    “아, 여긴 저희 막내아들이에요. 옆에는 친한 형이고.”

    “아! 미디어 회사 대표로 있는 아드님. 최근에 그, 그, 스테이, 얼라이브, 그 드라마 만든 곳이지요? 외국에서 상도 많이 탔다고 기사로 봤습니다. 우리 아내가 그 드라마 너무 재밌게 봤어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장르인데 아주 흥미롭다고. 물론 나도 재미있게 봤고.”

    “감사합니다.”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드라마 칭찬은 항상 기분이 좋다. 제가 크게 한 일은 없지만 어쨌거나 대표로 있는 회사였으니까. 선화도 기분이 좋은지 광대를 봉긋 올렸다.

    청장의 시선이 이번에는 석주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센 그의 눈썹이 갈매기 모양을 그리며 올라갔다.

    “어, 우리는 이전에 만난 적 있는 것 같은데?”

    “예. 일전에 자선 행사에 한 회장님과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때 부산에서. 말을 아주 똑 부러지게 잘해서 기억하고 있어요. 잘생기고 똑똑한 게 나는 또 한 회장님 아들인 줄 알았지 뭡니까.”

    “아들이나 다름없어요. 제가 많이 의지하고, 기대하는 친구예요. 눈여겨봐 주세요.”

    선화가 석주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아진도 자랑스럽다는 듯 석주를 봤다. 석주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벌써 식사 끝내고 가시는 건가요?”

    선화가 청장에게 물었다. 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혼자 가볍게 먹었습니다. 아내랑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쪽은 뮤지컬이나 액션 영화 같은 게 취향이어서. 싫다는 자리에 굳이 같이 가자고 조르기엔 제가 조금 철이 들었네요.”

    청장의 말에 선화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한 농에 적당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의자를 뒤로 밀며 완전히 테이블 밖으로 나왔다.

    “나가시는 길까지 함께할까요?”

    “아니요, 아니요. 식사 중이신데. 제가 괜히 아는 척한 게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만나기가 쉽나요, 어디. 가시는 길까지 잠깐 대화나 나누시죠. 이번에 동생분 선거 관련 이야기도 좀 하시고요. 식사 한번 같이했으면 좋겠는데요.”

    은근히 흘러온 말에 내내 온화하던 청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까딱 묵례했다.

    “아이고, 거기까지 신경 써 주시려고……. 저야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화가 여유롭게 웃으며 청장의 곁에 붙어 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레스토랑을 나섰다. 말이 조금 빨라진 청장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럼 한 회장님은 언제쯤 시간 되십니까. 저야 뭐, 일이 많이 없어서 언제든 되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동생도 회장님 일정에 맞추라고 하지요.”

    “어머, 제가 청장님 일정에 맞추려 했는데…….”

    멀어지는 두 사람에 아진이 다시 착석했다. 그리고 그새 미적지근하게 식은 포르치니 버섯 수프를 한 숟갈 크게 떠먹었다. 아진의 곁에 앉은 석주가 직원을 불러 음식을 데워 달라 말했다.

    “저분 되게 높은 분인가 봐요. 우리 엄마가 아무한테나 친절하진 않은데.”

    “그런 편이지. 차관급은 한국에 몇 명 안 되니까. 근데 혼자 가셔도 되려나. 보는 눈이 많은데.”

    석주가 이제 막 레스토랑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을 읊조렸다. 아진이 샐러드드레싱에 흠뻑 전 방울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형이 따라가 봐요.”

    그 말에 석주가 휙 아진을 쳐다봤다. 아진이 얼른 가 보라며 고개 까딱여 주었다. 석주가 검지로 툭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혼자 있을 수 있어?”

    “내가 앤가. 여기 가만히 잘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어, 스테이크 나왔다.”

    아진이 신난 얼굴로 나이프를 들었다. 접시를 내려 두는 직원에게 빙긋 웃어 주기도 했다. 그런 아진을 빤히 보던 석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금방 올게.”

    “네.”

    아진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석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선화를 따라갔다. 스테이크 한 점을 잘라 입에 넣은 아진이 턱을 괴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석주를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사내는 모름지기 어른한테 잘해야 해…….”

    석주는 그런 쪽으로 만점이지. 선화한테는 물론이고 꽃님에게도 예의 바르고 지극히 대하니까. 지켜본 결과 정진과 미진에게도 퍽 잘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까딱인 아진이 혼자만의 식사를 이어 갔다.

    그렇게 10분쯤 있었을까. 슬슬 배도 부르고, 다시 잠이 쏟아졌다. 석주를 찾으러 나가 볼까, 했는데 괜히 움직이면 걱정할 것 같았다. 의자에 석주의 재킷도 걸려 있고, 반대편엔 선화의 핸드백도 있고 아무래도 자리를 지키는 게 나을 듯싶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한 아진이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받았다. 달달한 커피나 케이크를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주문을 하고 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어……. 한 사장님?”

    고운 미성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이 움찔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이의 얼굴을 확인하곤, 뻐끔 입을 벌렸다.

    “어…….”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맞닥트렸던 창두보다 훨씬. 훨씬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다. 어쩌면 진걸보다도 익숙한 얼굴이었고, 그만큼 전생에 인연이 깊었던 이였다.

    아진이 그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그녀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도은…….”

    아진이 붕 뜬 음성으로 이름 하나를 읊조렸다. 그에 도은이 놀랍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도은. 전생에 금 사장의 호텔에 있을 때부터 연이 있던 이였다. 어리고 겁 많던 저를 돌봐 주던 친절한 그녀. 비록 그녀를 버리다시피 한 아버지와 그녀의 등골을 빨아먹고 살던 남동생, 기헌과 석주 등, 사내들의 득실거리는 욕심에 휘말려 안타깝게 죽었지만, 아진에겐 친절하고 애틋했던 누이였다.

    아진이 중얼거린 이름에 도은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기억. 아진이 턱을 안으로 당겼다. 제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 그녀도 저처럼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나.

    아진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도은이 보기 좋게 눈을 휘며 웃었다.

    “저 신인 배우예요. 재작년에 스튜디오 HS에서 만든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었는데.”

    “아…… 네.”

    아진의 눈가에 옅은 실망이 스쳤다. 역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어찌 됐건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이라 반가웠다. 그녀는 꽃님처럼 소중한 인연이니까.

    도은이 기껍게 아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네, 정말 반가워요. 어떻게 여기서 만나네요.”

    “그렇네요.”

    “혼자 계세요?”

    “아, 일행이 있는데 잠깐 자리를 비워서…….”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잠깐 앉아도 될까요?”

    “예? 아, 네. 그럼요. 그러세요.”

    아진이 맞은편, 선화의 옆자리로 도은을 안내했다. 도은이 고운 생머리를 뒤로 넘기며 의자에 앉았다.

    아진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전생의 연을 다시 만나는 게 벌써 여러 번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반가운데, 얼굴도 이름도 똑같은 이들이 저를 모른다는 묘한 상실감은 겪을 때마다 씁쓸했다.

    아진이 무례도 모르고 도은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다행히 도은은 그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붙임성 좋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오페라 보러 오신 거예요?”

    “네.”

    “저돈데. 제 돈 주고 온 건 아니고, 회사로 티켓 몇 장이 선물로 들어와서요. 회사 사람들이랑 왔어요. 저쪽 테이블에.”

    “아…….”

    도은이 멀찌감치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러다 일행과 눈이 마주치고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금방 갈게.’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활기차고 발랄해 보였다. 전생에도 활기차긴 했는데, 어딘가 어색함이 섞여 있었다. 서글픈 본인의 인생을 모르는 체해 보려는 거짓된 활기참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의 그녀는 아주 멋진 삶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험난하게 끝을 맺었던 전생의 악몽이 현생까지 손을 뻗지 않은 듯해서.

    이전의 도은은 똑똑하고 현명했다. 다만 여자에게 고된 시기여서, 아버지가 괴팍해서, 남동생이 욕심이 많아서 타고난 걸 써먹질 못했다. 지금은 다른 세상이니 그 등신 같은 가족들을 버리고 잘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진이 오지랖 넓게도 흐뭇해하는데. 도은이 수줍게 웃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어디서 우연히라도 만나 뵙게 되면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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