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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모르는 오페라를 물끄러미 보던 석주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아진의 하얀 두 손이 그의 허벅지 위에 늘어져 있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였는데,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이며 가느다란 손목이며, 툭 도드라진 손목뼈며 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손잡고 싶다.
석주가 코로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곳은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자리다. 보는 시선이 많다는 뜻이다. 사위가 어둡긴 했지만, 몰래 입을 맞추고 손장난을 치며 서로의 허벅지를 주무르던 영화관보다는 밝았다. 그래서 석주는 연인이라는 당당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석주는 욕구를 꾹꾹 누르고, 짓밟았다. 그러나 터져 나가는 욕심은 항상 석주의 주제보다 거대했다.
머뭇거리던 그가 슬쩍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지로 아진의 손가락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주위의 눈치를 보고, 손가락을 얽었다. 이내 손바닥이 맞붙었다.
차게 식은 손바닥으로 따뜻하고 말랑한 체온이 흘러왔다. 긴장으로 곤두서 있던 석주의 눈썹이 단숨에 유순해졌다. 팔걸이 사이로 아진의 손을 끌어와 숨긴 그가 엄지로 마른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고 있으니 돌연 오페라가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석주가 아무도 몰래, 아진은 물론 신도 모를 만큼 작게 미소 지었다.
공연장에서 나오던 아진은 무심코 기지개를 켜려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얼른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하품이 나오려는 것도 막았더니 코가 찡했다.
“형은 끝까지 다 봤어요?”
아진이 옆에 선 석주에게 물었다.
“응. 괜찮던데.”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페라가 괜찮았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충분히 멋진 시간이었다.
아진과 석주는 마구 쏟아지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화가 공연 끝나면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인사도 나눈 후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피곤하네…….”
아진이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웅얼거렸다. 석주가 걱정스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조금만 참아, 하고 속삭이기도 했다. 아진이 대충 고개를 주억이는데. 낯선 사람이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 사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가끔 있는 일이었다. 어디를 가든, 특히 이런 자리에서는 아진을 아는 이들이 많았다. 반은 아진과 안면이 있으나, 아진이 기억을 못 하는 이들이었고 나머지 반은 만난 적이 없는데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아진을 알고 있는 경우였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늘 그랬듯, 석주가 먼저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그럼 아진이 눈치껏 그를 따라 웃었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그 후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럼 석주가 알아서 이래저래 안부도 묻고, 회사와 관련한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아진은 간간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만 지어 주었다.
근데 오늘따라 무의미한 대화가 참 재미가 없었다. 낯선 이의 말을 받아치는 석주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시선을 멀리 보내는데. 공연장에서 쏟아지다시피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청색 두루마기가 일렁이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아진의 시선이 두루마기 끝자락을 따라 움직였다. 곧 두루마기가 멈춰 서고, 옷자락의 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석주였다. 과거의 석주.
석주는 웃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익숙한 얼굴의 조직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어깨에 팔을 걸친 이는 덕재였고, 마주 보고 웃는 이는 턱 아래에 흉터가 크게 난 명진이었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왁자지껄하게 주고받았다. 주위를 둘러싼 조직원들이 우렁차고 걸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아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요즘 석주의 환영을 자주 본다. 원래도 드문드문 봤었는데, 요즘은 하루에 두세 번씩도 본다. 하도 자주 보다 보니 저처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에 다다랐다.
예전에는 불현듯 그가 나타나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곤 했는데. 이제는 군중 중 한 사람을 본 것처럼, 모르는 아무개를 본 것처럼 자연스레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석주가 순순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 또 다른 모습으로 있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랬다. 시선을 돌렸더니, 이제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꼬나물고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꽂고, 인파 사이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 새까만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아진이 살짝 입을 벌렸다.
다가가서 말을 걸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 석주는 절 아는 석주일까, 모르는 석주일까.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의 석주일까.
막상 가서 알은체를 했는데, 절 모를까 두렵기도 하고. 이렇게 숱하게 눈앞에 보이면서 정작 저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가 얄밉기도 하고. 그래 봤자 환영이면서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게 짜증도 났다.
한동안 무의미한 곳을 나돌던 석주의 시선이 아진 쪽으로 흘러왔다. 아진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시선이 마주쳤다. 아진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어깨가 위로 바짝 솟았다.
처음이었다. 석주의 환영과 시선이 마주친 건.
석주는 아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찾던 이를 발견한 것처럼.
아진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심장이 쿵, 쿵, 쿵 거세게 뛰었다.
이제 어쩌려나. 제게 다가오려나. 다가와서 무슨 말을 하려나. 또 미안하다고 하려나. 아니면 보고 싶었다고 하려나.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렸다고, 지옥에서부터 여기까지 영겁의 고통을 거슬러 왔다고, 단지 널 보기 위해서 그 고난을 견뎠다며 울기라도 하려나.
그럼 저는 무어라 답을 해 줘야 하지. 뭐라고 해야, 까지 상상하는데. 어느새 손님을 보낸 석주가 아진의 팔뚝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아진아. 뭐 봐.”
아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내 따갑게 뜨고 있던 눈을 깜빡였다. 인파 사이로 보이던 석주의 환영이 증발했다. 역시, 또 환영이었구나.
씁쓸한 미소를 띤 아진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냥……. 누가 보이는데,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아닐 거야. 아는 사람.”
석주는 당연하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진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구태여 입을 떼진 않았다. 석주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그냥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싶었다.
그쯤, 선화가 다가왔다.
“엄마.”
아진이 빙긋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선화를 포함한 세 사람은 공연장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하러 왔다. 아진은 메뉴판을 아주 열성적으로 읽었다.
대낮부터 석주와 거하게 떡을 치고, 오페라 내내 자고, 그 후 두어 시간 선화의 손에 이끌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웃었더니 몹시 허기가 졌다. 기력도 없었다.
아진은 옆자리에 앉은 석주에게 메뉴를 가리키며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석주는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선화는 또 꽃님과 통화하고 있었다. 오늘 오페라가 어땠고, 아진이 이곳에서 누구를 만났고, 친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 사사로운 것까지 소상히 수다를 떨었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음식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가지런히 나열된 포크 중 가장 안쪽에 놓인 포크를 든 아진은 선화가 첫술을 뜨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한입을 먹은 후에야 파스타를 가득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말간 뺨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입가에 소스가 묻어났다.
“닦아.”
석주가 냅킨을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채소도 좀 먹어.”
선화가 수북이 쌓인 샐러드를 아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석주 너도 얘 시중들지 말고 밥 먹어.”
석주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잘 먹겠습니다.”
석주가 옅게 미소 지으며 포크를 들었다.
아진은 열심히 식사했다. 통통한 관자를 씹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버터와 허브에 졸이다시피 나온 새우도 꾸준히 집어 먹었다. 석주와 선화가 흐뭇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진은 그저 밥을 먹느라 바빴다.
선화는 이르게 식사를 끝내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두 사내를 구경하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오페라 어땠어.”
“음……. 멋졌어.”
“잤지, 너.”
대충 대답하던 아진이 눈썹을 올렸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포크가 우뚝 굳었다. 선화가 쯧쯧 혀를 찼다.
“공연장에서 나오는데 딱 잔 얼굴이더라.”
“…….”
아진이 포크 끝을 살짝 물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선화가 문득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왜. 요즘도 잘 못 자? 날이 이렇게 선선한데?”
“아니. 너무 잘 자. 진짜 너무 잘 자. 엊그제는 석주 형이 깨워도 못 일어나서 지각할 뻔했어.”
아진이 석주가 앞접시에 놔 준 관자를 쿡 찍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선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철부지인 아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이래서 다들 막내에게 죽고 못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 뭐. 못 자는 것보다야 낫지. 요즘 얼굴 보기 좋다. 환-하네.”
“그래?”
아진이 관자를 입에 넣었다. 입을 꼭 다물고 오물오물 씹는 게 귀여워 선화는 웃고야 말았다.
이내 석주도 수저를 놓았다. 아직 식사 중인 건 아진뿐이었다. 선화의 눈에 슬슬 지루함이 차오를 때였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들의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선화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아이구, 한 회장님?”
누군가가 인사를 해 왔다. 낯선 사내였다. 아니, 사내라 하기엔 지나치게 나이가 많았다. 곱게 정돈된 백발에 인자하게 진 주름에,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신사였다. 그는 품이 조금 넉넉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데도 뱃살이 없었다.
그를 본 선화의 낯이 반가움에 활짝 갰다.
“어머, 청장님.”
벌떡 일어난 그녀가 악수를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청장이 빙긋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