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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허탈하게 직원을 응시하는데.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왔다.
“왜 그래?”
석주였다. 옆에 있는 그는 환영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익숙했다. 얼굴과 눈빛도 익숙했다. 헌데 서늘한 체온이 달랐다. 담배를 가까이하지 않아 매캐한 냄새 대신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는 것도 달랐다.
아진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봉지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억울했다. 오늘 진걸도, 전생에 절 그렇게 괴롭혔던 진걸도 아무 일 없이 흘려보냈는데. 석주는 헛것에 불과하면서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환영 주제에.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미 또 다른 석주가 제 곁에 있는데. 왜 자꾸 과거의 그가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알 수가…….
까지 생각하던 아진은 저도 모르게 대뜸 석주를 부르고야 말았다.
“있잖아요, 형.”
“응?”
“담배 피울 생각 없어요?”
“……뭐?”
석주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아진이 취기에, 혹은 다른 것에 흐려진 눈동자로 석주를 바라봤다.
“담배 피워 봐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석주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가 아진의 양쪽 눈을 번갈아 봤다. 그렇게 대단한 물음도 아니었는데,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잠시간 침묵하며 혼란을 잠재우던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떼는데. 아진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농담이에요.”
“…….”
석주는 그 웃음에 마주 웃어 주지 못했다. 그저 버석하니 굳은 채 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진이 가게 쪽으로 머리를 까딱거렸다.
“아이스크림 녹겠다. 들어가요.”
갑자기 덥네. 아진이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봉지를 곰 인형 안 듯 껴안았다. 그리고 여전히 술에 취한 걸음걸이로 가게로 향했다. 가로등에 비친 나뭇잎 그림자가 그의 걸음걸음에 묻어났다.
석주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 *
아진은 샤워를 마치고, 찬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켜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아직 술기운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해 뺨이 불그스름했다. 그래도 가을은 가을인지,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았는데도 잘 잤다.
침대에 걸터앉은 석주가 아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러다 그의 밤을 방해할까, 아쉽게 손을 거두었다.
“…….”
석주는 한동안 아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화로이 잠든 아진의 모습이 참으로 소중했다. 매일같이 보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도 좋았다. 그가 색색 내쉬는 숨에 맞춰 호흡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다른 세상으로 타 넘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통도 눈물도 없는 천국 같은 세상으로. 모든 게 사라지고 오로지 아진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한참 앉아 있던 석주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그의 옆자리에 누울 생각이었다.
방에서 나온 석주는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진이 침대에서 안전히 잠든 이 순간, 비로소 퇴근이었다. 그는 투명한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라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얼음도 넣지 않은 술은 독하고 썼다.
목젖을 아래위로 크게 움직인 석주가 다시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금세 끊겼다. 석주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을 나열했다.
“예, 안녕하세요. 오늘 2801호에 묵었던 사람입니다. 아뇨,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혹시 룸서비스를 갖다 줬던 직원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몹시 친절하셔서 기억에 남네요. 예.”
건너편에서 공백이 흘러왔다. 무언갈 검색하는지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주가 술을 머금었다. 그러고 있으니 이름 하나가 전달되었다.
석주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 박, 진걸이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정보를 알아낸 석주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잔에 술을 쏟아붓는데. 아일랜드 테이블 구석에 놓인 꿀 유자차와 눈이 마주쳤다. 술에 취한 직원들을 보내고, 아진을 추슬러 데리고 오면서도 잊지 않고 챙긴 거였다.
석주가 그것을 쥐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아이스크림 사이에 멀뚱히 있던 유자차는 언제 뜨거웠냐는 듯 차게 식어 있었다. 그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 * *
가을은 사계절 중에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가장 빠른 계절이며, 그 어떠한 계절보다 풍성한 변화를 일으켰다. 파랗던 세상이 울긋불긋해졌다가, 갈색빛으로 탁해진다 싶더니 거리 여기저기에서 낙엽이 발에 치이기 시작했다. 조금 서늘하게만 느껴지던 바람은 금세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하나의 계절 동안 아진도 바쁘게 변화했다. 낯선 세상에 적응하고, 열심히 배우고, 열렬히 사랑했다.
어느 날의 이른 새벽엔 석주와 함께 한강에 조깅을 하러 갔다. 시원한 바람과 비릿한 물 내음을 들이켜며 세차게 뛰는 기분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꼭 자유로운 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주말엔 꽃님을 보러 제주도에 갔다. 그녀의 카페에 하루 종일 퍼질러 앉아 있다가 그녀를 도와 설거지도 하고, 바닥도 쓸고 그랬다. 저녁에는 꽃님의 집으로 가 그녀가 해 주는 밥을 먹었다. 물론 석주도 함께였다.
또 석주가 업무로 바쁘던 어느 날은 선화와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 가서 옷도 사고, 선화의 귀걸이도 사고, 석주에게 줄 구두도 샀다. 발 크기를 몰라 고심하고 있으니 놀랍게도 선화가 뚝딱 알려 주었다. 그 밖에 석주의 셔츠 사이즈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아진이 석주의 선물을 산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석주에게 운전 연수도 받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석주와 함께하는지라 딱히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긴 하지만, 방 한편에 줄줄이 걸린 차 키를 보고 있으니 문득 차를 몰고 싶어졌다.
그래서 석주에게 운전하는 걸 배웠다. 그 괴물 같은 차를 운전하다니! 하고 겁을 먹긴 했는데. 막상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쥐니 마음이 편해졌다. 석주의 말에 따르면 운전이 취미일 만큼 차를 여기저기 몰고 다녔다고 했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건 차를 구매하는 거였고.
아진은 연수 전에 두어 권 읽은 교통 관련 책이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몸이 익숙해하는 건지. 신호를 보고 내비게이션을 보고, 알아서 깜빡이를 켜거나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직 즐기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흥미를 붙여 가는 중이다.
또, 미진과 함께 테니스를 쳤다. 잠깐 석주가 통화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바람에 된통 혼도 나고 걱정도 샀으나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닌데, 석주가 당분간 걷지 말라며 엄포를 놓는 바람에 며칠 출근도 하지 않고 침대 위를 지렁이처럼 기어 다녔다.
그 밖에 또 뿌듯한 점을 꼽자면, 이제 회사 미팅에도 참석한다. 꾸준히 공부한 결과였다. 안타깝게도 주도적으로 미팅을 이끌고 의견을 내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무래도 그건 아직 무리인지라. 그래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직원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이해할 줄은 알았다.
아진은 그것만으로도 몹시 뿌듯했고, 선화와 석주 역시 그 사실을 매우 좋아라 했다. 선화는 막내아들이 드디어 밥값을 한다며 때 이른 칭찬을 해 댔다. 정작 아진이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석주는 그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아진이 귀여운 듯했다. 칭찬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렇게 인생이 하루하루 더 충만해졌다.
아진은 드문드문 허공이나, 낯선 사람을 보며 굳어 있긴 했지만 그게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저 약간의 불편함이었다. 전생에 다리를 절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불편.
그러니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어둑한 드레스 룸. 인영 두 개가 딱 달라붙어 열심히 몸을 비비고 있었다.
“하우응…….”
석주의 손목을 두 손으로 쥔 아진이 입 속에 든 그의 손가락을 춥춥 빨았다. 그러다 묵직한 성기가 전립선을 후벼 파며 깊게 들어오는 순간, 입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손가락을 구역질하듯 뱉으며 신음했다.
몸이 빠르게 흔들렸다. 철썩철썩 부딪치는 엉덩이가 따끔거렸는데, 그래서 좋았다. 욱신거리는 배 속과 찌릿한 쾌감에 다리가 자꾸 안으로 모였다. 그러자 석주가 아진의 한쪽 다리를 넥타이 진열장 위에 올려 두었다. 가랑이가 훤히 벌어지고, 삽입이 깊어졌다.
“아흐, 읏, 흐우윽…….”
“하아, 아진아…….”
아진이 손자국이 덕지덕지 난 유리를 북북 긁었다. 기껏 손질한 머리가 땀에 젖어 온통 앞으로 쏟아졌다. 미처 못다 맨 넥타이는 꽈배기처럼 비비 꼬였고, 슈트 팬츠는 아무렇게나 구겨져 발끝에서 달랑거렸다.
주말의 늦은 오후, 선화와 오페라 공연을 보기로 해서 나갈 준비를 하던 차였다. 깔끔하게 입고 와야 한다는 말에 당연하게 슈트를 입는데. 석주가 출근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슈트를 골라 주었다. 품이 조금 넉넉한 재킷에, 와이셔츠 대신 부드러운 질감의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석주는 출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슈트를 차려입었다. 아진은 드레스 룸 한편에 기대서서 그가 옷 입는 걸 구경하다, 그가 넥타이를 쥐었을 때. 대뜸 제가 매 주겠다며 나섰다. 석주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눈을 해 보였다.
아진은 자신 있게 석주의 앞에 섰다. 그리고 넥타이를 받아 매 주기 시작했다. 서툰 손길은 느렸다. 그래도 용케 순서에 맞게 움직였다.
한껏 집중한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석주가 엄지로 미간을 살살 문질러 왔다. 그러다 뺨을 매만지고, 말랑하게 뭉개지는 살에 훅, 콧김을 뿜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춤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마며 콧잔등이며 턱 아래며 쪽쪽 입술을 눌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