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08화 (208/261)

208

냉동고 문을 연 그가 맛 구분 없이 아이스크림을 꺼내 품에 안았다. 석주가 얼른 장바구니를 가져왔다. 제대로 신난 아진이 아이스크림을 그곳에다 와르르 쏟아부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부터 큼지막한 것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이내 냉동고의 아이스크림 칸이 텅 비었다.

“너무 많은데.”

석주가 아진의 헛손질에 함께 딸려 온 냉동 만두를 제자리에 올려 두며 말했다.

“안 많아요.”

아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번쩍 들고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한숨을 내쉬며 냉동고 문을 닫은 석주가 그를 뒤따랐다.

편의점 직원이 계산대를 가득 채운 고급 아이스크림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진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부 계산해 주세요!”

그의 뒤에 선 석주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아진이 덥석 그의 손목을 쥐었다.

“아니, 아니! 내 카드로요!”

“……네 지갑, 네 재킷 안에 있는데.”

석주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아진은 셔츠 하나만 덜렁 걸친 차림이었다. 고깃집에서 나오는 길, 직원이 아진의 슈트 재킷을 내밀었으나 덥다며 거절했었다. 고로 아진의 지갑은 아직 고깃집에 있다는 뜻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아진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사고 싶었는데……. 내가 사장님인데……. 내가 돈 제일 많은데…….”

그가 석주의 넥타이 끝을 돌돌 말며 웅얼거렸다. 석주가 아진의 등을 길게 쓸어내렸다. 묘한 상황에 아이스크림 바코드를 찍던 직원이 우뚝 굳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석주가 자신의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네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아진에게 내밀었다.

“자. 네가 내 돈 빌려서 계산하는 거로 해.”

“빌려요?”

“응. 나중에 갚아. 그럼 네가 산 게 되는 거니까.”

“좋아요! 빌릴게요!”

아진이 돈을 덥석 낚아챘다. 그리고 직원에게 찌르듯 내밀었다. 말쑥한 직장인들이 계산을 하지 않고 튈까 걱정하던 직원이 산더미처럼 쌓인 아이스크림의 바코드를 찍어 갔다.

그 손놀림을 멍하니 보던 아진이 계산대 근처에 있던 작은 온장고를 발견했다. 주홍색 글씨로 [꿀유자차]라 적힌 노르스름한 병이 망막에 콱 박혀 왔다.

아진이 온장고 문을 열고 그것을 꺼내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이것도. 이것도 같이요.”

석주가 의아한 눈빛을 하는데. 아진이 그를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이건 형 거.”

형은 차가운 거 못 먹으니까.

“이거 드세요! 제가 사는 거예요!”

아진은 통 크게 편의점 직원에게도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네주었다. 직원이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예쁘게 웃어 준 아진은 아이스크림 두 다발을 번쩍 들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뒤따라 나온 석주가 봉지를 채 가려 했다. 그러자 아진이 손을 슥 뒤로 물렸다.

“내가 들래요.”

“……그럼 하나만 줘.”

석주가 개중 무거운 비닐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그것을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고깃집 반대 방향으로 활기차게 걸어가는 것이다. 석주가 얼른 그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아진이 히히 웃으며 바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석주가 그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을 정확히 마흔세 번째 하고 있었다. 아진이 마냥 신난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아무튼 싫었다.

아진은 흥얼흥얼 정체 모를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밤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서 그런가.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졌다. 머리칼 사이로 스미는 공기가 시원하면서도 보드라웠다.

거기다 고요한 거리와 살랑거리며 나뭇잎을 흔들어 내는 가로수, 적당히 은은한 빛을 내뿜는 가로등까지. 기분이 좋지 않으려야 좋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진은 부러 느리게 걸으며 그 시원한 적막함을 만끽했다. 그때, 바지 주머니가 우우웅- 하고 울렸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마마마(✿◖◡◗)❤

아들 뭐 해.]

선화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뚝 멈춰 선 아진이 한 손으로 토독토독 답을 찍어 보냈다.

[비서팀이랑 회식ㄱ해.]

오타가 난 걸 알지만 딱히 고치고 싶지 않았다.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뜨더니 답장이 금세 왔다.

[회식? 네가? 웬일? 강 비서도 같이 있어?]

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답을 썼다. 이번엔 오타가 더 많이 났다. 분명 가만히 서 있는데 몸이 자꾸 흔들흔들 움직여서 지진이라도 났나, 하며 땅을 팍 차기도 했다.

[웅 옆에. 아이크리ᅟᅵᆷ 사러 왓어]

[아이크림? 술 먹다가 아이크림을 사러 갔어?]

하필 사라진 ‘스’ 활자에 인상을 쓴 아진이 [아니 아이스크]까지 입력하는데. 선화의 메시지가 연달아 이어졌다.

[아무튼 석주랑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어.]

아진은 [아니 아이스크]까지 써 놓은 메시지를 그냥 전송해 버리고, 답장을 다시 썼다.

[응 알앗써.]

그 후 수 초 멀뚱히 기다렸는데, 더는 연락이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아진이 뒤꿈치에 힘을 주고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석주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한 발 그의 곁에 다가간 아진이 단단한 팔뚝에 찰싹 붙어 섰다.

“엄마가 형이랑 떨어지지 말래요.”

석주가 픽 웃었다.

“그래.”

두 사람은 나란히 밤거리를 걸었다. 아진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세상을 구경했다. 그러다 성미가 급해 벌써 울긋불긋해지고 있는 나무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날씨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건 늘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번엔 그 묘함이 곱절이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지도 벌써 한 계절이 지났구나, 싶어서.

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진이 다시 발을 뗐다. 석주는 그의 불규칙한 걸음걸이에 재촉 없이 발을 맞춰 주었다.

“가을이 오려나 봐요.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긴 하네요.”

“다행이지. 네가 더위 탈 일이 줄 테니까.”

“나 겨울엔 어때요?”

“예뻐.”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아진이 푸흐, 하고 웃었다.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는데. 겨울을 살아 보지 않아서, 이곳의 겨울은 어떤가 싶어서, 또 그 겨울 속에 있는 저는 어떤가 싶어서 물어본 거였는데.

“아니요. 그거 말고. 좀 살 만하냐고요. 덜 더우니까 잘 자려나? 형 없이도?”

“응. 아무래도 그렇지.”

석주의 눈가로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밤인데도 그 그림자가 또렷이 보였다. 아진이 그의 팔뚝에 콩 머리를 찧었다가 뗐다.

“그래도 형이랑 같이 자도 되죠? 덥든 춥든 형이랑 같이 자는 게 좋은데.”

“……그럼.”

“겨울엔 내가 형을 따뜻하게 해 줄게요.”

“고마워.”

같잖은 말이었는데, 석주는 진심을 다해 감사했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아진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한 말이었으나 농담은 아니었다. 석주에게 겨울이 얼마나 혹독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제가 그러했으니까. 칼바람에 살이 에이고, 꽝꽝 언 뼈가 지끈거리고, 차가워진 손발이 괴로워 눈물이 다 찔끔 났었다.

뭐, 에어컨도 있는 세상의 겨울이 70년 전의 겨울만큼 춥겠느냐마는. 그래도 적잖이 추웠으면 했다. 석주가 저를 갈망했으면 좋겠어서. 못된 생각이었다.

전생의 겨울을 되뇌던 아진이 갑자기 눈썹을 한껏 올렸다. 제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신 이유를 상기한 거였다.

“아까요.”

“응.”

“어, 그러니까 저 혼자 호텔에 있을 때요.”

“응.”

“누가 왔었거든요.”

그 말에 석주의 미간이 꿈틀 경련했다.

“……누가?”

“아니, 그걸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어…… 음……. 아, 호텔 직원이 왔었어요. 망고 빙수 주러.”

“그래서?”

“그래서, 어…….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었는데…….”

석주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아는 사람?”

아진은 두어 걸음 앞서가고서야 발을 멈추었다. 그가 아이스크림 봉지를 고쳐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는 사람은 아니지. 응, 아니야. 어, 그냥. 응. 아는 사람이랑 비슷한 사람이었는데…… 별일 없었다고요. 별일 없어서 너무 뿌듯했어요.”

“…….”

“내가 말해 놓고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뿌듯하고 개운하다는 뜻이에요. 기분이 좋다고, 그래서.”

가요. 아이스크림 녹겠다. 아진이 걸음을 재촉했다. 잠깐 무언갈 생각하던 석주가 그를 뒤따랐다.

얄궂게도, 아진은 걸을수록 취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인사말 때문에 긴장도 했고, 우연히 ‘아는 사람’까지 만났더니 몸이 축축 처졌다. 나름 낮잠도 잤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푸후, 하고 부러 크게 내쉬는 숨에 술 냄새가 담뿍 묻어났다.

아진이 아이스크림이고 뭐고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고깃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진이 반가운 표정으로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누군가가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진이 천천히 멈춰 섰다.

가게 앞에 있는 이는 석주였다. 정장을 입고, 어깨에 두루마기를 걸친 석주가 비스듬히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먼 하늘로 향해 있었고, 잇새로 뿜어지는 연기는 달빛을 담아 흐리게 빛났다. 파도 무늬가 옅게 새겨진 두루마기가 밤바람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석주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수백 번도 더 봐서 그가 연기를 뿜을 때의 입매가 어떠한지, 눈을 어떤 모양새로 깜빡이는지, 담뱃재를 어떻게 터는지, 또 불은 어떻게 붙이는지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환영이 보이는 건가.

너무 익숙해서 이다지도 생생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건가.

담배를 피우는 석주는 아진을 봐 주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응시하며 연기만 내뿜었다. 그의 입에 물린 담배가 짧아졌다가, 어느 순간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그러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진 쪽으로 흘러올 때쯤.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석주가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비서 팀 직원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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