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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아진이 바깥에서 술을 마시는 게 달갑지 않은 터라. 더군다나 이곳엔 사람도 많은데. 술기운에 뺨이 발긋해진 아진이 헤실헤실 웃을 걸 상상하면 명치 언저리가 답답해졌다.
근데.
“저희 소주 주세요. 소주.”
아진이 고기를 굽는 직원에게 대뜸 주문했다.
“예, 알겠습니다.”
직원이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를 떴다. 곧 성에가 낀 녹색병이 나왔다. 신난 아진이 그것을 뜯으려는데, 석주가 병을 채 가 손수 뚜껑을 땄다. 그리고 아진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아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차오르는 술을 쳐다봤다.
그 후, 아진은 석주의 잔에 술을 따라 주려 했다. 근데 석주가 잔을 뒤로 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운전해야지.”
“회식인데 안 마신다고요?”
아진이 조금 전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쓸데없이 귀여웠다.
“난 아직 퇴근 안 했어. 네가 네 방 침대에서 잠이 드는 순간이 퇴근이야. 그때까진 널 보필할 의무가 있고.”
“…….”
아진이 새치름한 눈으로 석주를 쳐다봤다. 석주는 그래도 안 된다는 듯 자신의 소주잔을 아예 테이블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석주가 적당히 익은 고기를 그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아진은 부루퉁한 낯으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날카로이 물었다.
“왜 우리 자리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 말에 아진의 접시로 부지런히 고기를 옮기던 석주의 팔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말마따나, 아진과 석주가 앉아 있는 테이블엔 두 사람이 다였다. 6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었는데, 텅 빈 상태였다. 반면 다른 테이블은 직원들이 꽉 들어차게 앉아 있었다.
“…….”
어쩐지 답답해지는 명치에 석주가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희생양을 탐색했다. 선택된 건, 늘 그렇듯 그였다.
“황 비서님. 잠깐 이리 오시죠.”
멀찌감치 앉아 있던 명진이 우뚝 굳었다.
명진이 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잔에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따라 주었다. 명진이 그것을 곧장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어…….”
그와 잔을 부딪치려던 아진이 그런 명진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그 시선을 오해한 명진은 아진이 다시 따라 준 술도 냅다 입 속으로 내리꽂았다. 그에 아진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황 비서님. 혹시 제가 불편하세요?”
“예-에? 아니요. 아닙니다. 불편하긴요. 편합니다. 편해요. 아주 편합니다.”
명진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해맑게 갑질을 시전하는 아진에 죽어나는 표정이었다. 석주가 아무 말 없이 명진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아진이 이번엔 얼른 그의 잔에다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근데 왜 자꾸 혼자 마셔요.”
“…….”
“같이 마셔요. 같이. 짠-, 이렇게.”
빙긋 웃은 아진이 소주를 삼켰다. 쓰면서도 매운 술에 으,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맛없다’였다. 석주가 그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직원에게 달짝지근한 술을 추천받아 그것을 주문했다. 술은 금세 나왔다.
그동안 아진은 명진을 향해 종알종알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 엄청 바쁘셨죠. 진짜 대단하세요. 강 비서님도 보필하시고, 우리 엄마도, 아니, 어, 회장님도 보필하시고, 술 취한 감독님이 떼쓰는 것도 들어 주시고.”
“아이고, 아닙니다. 바쁘긴요. 중요한 건 강 비서님이 다 처리하셨는데요, 뭐.”
그새 마음이 풀린 명진이 씩 입꼬리를 당겼다. 두 사람이 다시 잔을 부딪쳤다. 아진은 달짝지근한 술이 좋은 듯 부지런히 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술병 하나가 동났을 때쯤.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명진이 양손으로 철썩 자기 허벅지를 치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서 아진 쪽으로 슬쩍 상체를 기울였다.
“사장님. 요즘 분위기가 조금 바뀌신 것 같습니다.”
“제가요?”
“예. 출근도 잘 하시고, 저랑 강 비서님 말도 잘 들어 주시고, 아주 좋습니다. 좋아요.”
명진이 혼자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감동 어린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했다.
“아까 인사말 끝나고도 원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리셨을 텐데. 얌전히 귀빈분들이랑 인사도 해 주시고, 악수도 해 주시고……. 요즘 아주 일할 맛이 납니다.”
“제가 예전엔 어지간히 개차반이었나 봐요.”
“아무래도 좀 그런 편- 아이고, 아닙니다. 직원들 불편할까 봐 항상 자리 비워 주시고. 그때도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명진이 파드득 어깨를 떨며 말을 고쳤다. 아진이 키득키득 웃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또 술병 하나가 동났다. 아진과 명진은 언뜻 봐도 취한 듯한 행색이 됐다. 그와 동시에 절친이라도 된 듯 머리를 딱 붙이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명진이 대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사장님. 제 딸 보실래요? 지인-짜 예쁩니다. 다행히 저를 안 닮고 우리 와이프를 닮아 가꼬 어찌나 예쁜지. 이 보세요. 히야……. 이제 아빠, 아빠, 말도 합니다.”
“우와. 진짜 황 비서님 하나도 안 닮았네요. 귀엽다.”
아진이 화면 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를 보며 웃었다. 딸 칭찬이 좋은지 명진이 껄껄거렸다. 그리고 다시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는데. 누군가가 테이블 앞에 와 섰다. 오가며 몇 번 봐서 안면이 있는, 그러나 이름은 모르는 비서 팀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비서 팀 신재현입니다. 술 한잔 받아도 되겠습니까.”
“와, 그럼요, 그럼요. 안녕하세요. 재현 씨. 여기 앉으세요.”
아진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데.
“여기 앉아요.”
의자를 밀며 일어선 석주가 아진의 옆으로 이동했다. 직원이 아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샐쭉 살갑게 웃었다. 아진이 덩달아 웃으며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석주가 넥타이를 슬쩍 아래로 끌어 내렸다.
회식은 길고 부산스럽고 후끈하게 이어졌다. 고기 연기로 사위가 안개라도 낀 듯 뿌옜다. 다들 적잖이 술이 들어가니 아진에게 다가와 살갑게 말도 걸고, 술잔도 부딪쳤다. 아마 명진의 말마따나, 근 몇 달 아진의 행동과 표정이 말랑말랑하니 말 붙이는 게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선을 넘는 무례한 일은 없었다.
그러다 오늘 행사가 있던 드라마의 예고편이 뜰 시간이라, 식당에 양해를 구하고 큰 TV 화면으로 그것을 감상했다.
직원들은 한껏 집중하다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아진도 그 무리에 껴 있었다. 바지사장이라 딱히 한 것도 없는데 기쁘고 뿌듯하고 그랬다. 예고편 앞에 나오는 회사 로고에 소름이 돋아 목을 움츠리기도 했다.
짧은 감상이 끝나고, 술자리가 다시 이어졌다. 석주가 술에 취해 어깨가 축 내려앉은 아진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그만 마시라고 말려도 듣질 않더니. 결국 취해 버렸다. 그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짧은 침이 10을 훌쩍 넘어 있었다.
너무 오래 있었다.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가려 했는데 눌러앉아 버렸다. 이제는 진짜 빠져 줘야 할 때였다.
석주가 뜨끈뜨끈해진 아진의 등을 문지르며 가자고 말하려 할 때였다.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먼 테이블에서 직원 하나가 발랄하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아이스크림 좋지, 술 마시고 난 후에는 아이스크림이지, 라며 숙덕거리는데.
“저요!”
아진이 번쩍 손을 들었다.
“…….”
“…….”
장내가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아진에게 모여들었다. 집중된 시선에 아진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그 천진한 모습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차마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아진을 귀엽게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혈연으로 높은 자리를 꿰차서 그렇지, 아직 이십 대긴 이십 대구나, 제법 깜찍하네, 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아…….”
아찔해지는 눈앞에 석주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더는 아진을 이 자리에 둘 수가 없었다.
“저희가 다녀오죠.”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일으켰다. 아진이 멍하니 석주를 올려다봤다. 내가? 내가 가야 해? 귀찮은데, 하는 표정이었다. 석주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진이 네가 사 주면 다들 좋아할 거야.”
그 말에 몽롱하게 풀려 있던 아진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떼는데.
“아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명진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몸짓과 달리 표정은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 같았다. 석주가 힘으로 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우리가 갑니다. 황 비서는 좀 쉬세요.”
늦은 시간이라 주위에 문을 연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편의점으로 발을 옮겼다.
“아이스크림!”
아진이 쏠랑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전방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딱 붙어선 그가 홉뜬 눈으로 종류를 살폈다. 하나같이 괴상한 이름을 달고 있는 아이스크림들이 낯설었다.
집에 있는 건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딸기와 초콜릿 그림이 그려진 게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지만 아진이 생각하던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다.
“으엑, 형. 여기 물고기 아이스크림도 있어. 징그러워라…….”
석주가 냉장고 유리에 이마를 처박은 아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아진이 그를 보며 울상을 했다.
“떠먹는 게 맛있는데……. 여긴 안 파나 봐요…….”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냉장고를 얼싸안고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그게 그렇게 억울해?”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
석주가 그 몰래 미소 지었다. 어쩜 마음이 이리도 예쁜지 모르겠다. 그가 아진을 끌고 편의점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또 다른 냉동고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엔 아진이 좋아하는 떠먹는 아이스크림이 가격표에 0 하나를 더 달고 곱게 줄지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다!”
아진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냉동고를 덥석 쥐었다. 누가 보면 아이스크림이랑 친구인 줄 알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