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06화 (20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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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어코 나를 찾아냈구나.

    기어코 또 나를 죽이러 왔구나.

    도망쳐야 하나. 어디로,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석주는 어디 있을까. 전화를, 전화를 해야 하는데. 근데 핸드폰은 어디 있지. 어디 뒀더라. 재킷 안에 둔 것 같은데. 그럼 재킷은 어디 있지.

    핸드폰을 찾아 석주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진걸이 저를 가만히 둘까. 그 언젠가처럼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 대지 않을까. 저의 멀쩡한 두 다리에 조소하며 한쪽을 분지르지 않을까. 죽은 동생을 기억하냐며 제 뒤통수가 부서질 때까지 땅에 들이박을지도 몰랐다.

    아진이 점점 더 깊고 어두운 악몽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데.

    “손님?”

    진걸이 다시금 아진을 불렀다. 아진이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며 진걸을 쳐다봤다. 그러나 진걸은 아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칼을 빼내 위협하지도, 걸걸한 음성으로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호텔의 가장 비싼 방에서 묵는 손님을 대하느라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눈짓 몸짓 어디에도 아진을 위협할 의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

    아진이 진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호흡을 골랐다.

    이곳에선 아무도 저를 모른다. 전생에 연이 있는 이들을 제법 마주쳤으나 그 누구도 절 알아보지 못했다. 석주는 물론이거니와 꽃님도, 그리고 창두도 절 몰랐다.

    그러니 진걸도 저를 모를 것이다. 그 역시 그저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진걸이 제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저는 전생과 달리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다. 진걸이 전처럼 마구잡이로 절 짓누를 순 없었다.

    마른침을 연달아 삼킨 아진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진걸이 카트를 밀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아진은 소리 없이 닫히는 문을 두려운 눈으로 보다,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음식은 저쪽 테이블에 세팅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진걸이 다이닝 룸에 길게 놓인 식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아진이 긍정했다. 진걸은 바쁘게 움직였다. 카트에서 천을 먼저 꺼내 깔고, 음식을 내려놓고, 식기도 가지런히 정렬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자몽에이드도 오른쪽에 두었다.

    그동안 아진은 벽에 기대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진걸이 나이프를 내려놓을 땐 흠칫거리며 긴장하기도 했다. 허나 아무런 일 없이 음식 세팅이 끝났다.

    진걸이 카트를 끌고 다이닝 룸에서 나왔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단조로이 인사한 그가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문으로 향했다. 아진이 눈으로 그를 뒤쫓았다. 슈트를 입고 있는 진걸은 전생과 묘하게 달랐다. 다부진 체격은 여전했으나 살이 조금 내려 늘씬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던 전과 달리 바르고 섬세했다.

    문을 열고, 카트를 밖으로 뺀 진걸은 재차 인사하더니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진이 오롯이 혼자 남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그가 진걸이 두고 간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홍색의 자몽에이드, 샛노란 망고 빙수 등 쨍한 색감의 음식들이 참 맛깔나 보였다.

    털레털레 걸어간 아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쳐든 채 높은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다 픽- 웃음을 흘렸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난스럽지 않게, 덤덤하게. 그를, 악몽을, 악연을 흘려보냈다.

    그걸 인지하자 어처구니없게도 뿌듯해졌다.

    어쩐지 과거를 조금 털어 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는데, 그걸 잘 버텨 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숙이 박혀 있던 가시가 빼기 쉽게 쑥 올라온 듯했다. 이러다 어느 순간 허탈할 만큼 쉽게 빠질 것 같았다.

    그럼 비로소 자유가 되겠지.

    아진은 늘어진 채로 가슴팍을 슥슥 문댔다. 그러다 망고 빙수가 눈에 들어왔다. 줄줄이 나열된 수저 중 가장 큰 숟가락을 든 그가 과육과 우유 얼음을 한가득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차갑고 달콤한 맛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 맛을 찬찬히 음미하던 아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 * *

    석주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호텔 룸으로 돌아왔다. 거나하게 만찬을 즐기고, 샤워 후 샤워 가운 차림으로 자던 아진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집에 가자.”

    석주가 가물가물한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끌어왔다. 그리고 차가운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 손바닥이 몹시 좋았다.

    “다 끝났어요?”

    아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응.”

    “감독님은요?”

    “취해서 여기 호텔 방 어디에서 자.”

    “황 비서님은, 울었어요?”

    “음……. 아니. 근데 회식 자리에서 울 기세던데. 오늘 마시고 죽겠대.”

    “……회식?”

    아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회식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라. 석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통 이렇게 큰 행사 끝나면 해. 더군다나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다들 열심히 먹고 마시겠지.”

    “우리는요? 우리는 안 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석주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우리?”

    “네. 회식은 다 같이 하는 거잖아요.”

    “윗사람이 그런 자리에 참석하면 직원들이 불편해해.”

    “하지만…….”

    묘한 억울함에 아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석주는 늘 회식에 참여했었는데. 그러니까 전생의 석주 말이다. 그는 태회파 식구들과의 술자리에 항상 동행했었다. 큰형님이면서, 제일 윗사람이었는데 술자리마다 꼬박꼬박- 아, 그건 회식이 아닌가.

    아니, 근데 내가 왜 불편하대? 내가 뭘 했다고?

    “내가 불편해요? 왜요?”

    아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대충 두르듯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이 스르륵 내려가며 동그랗고 반질반질한 어깨가 드러났다.

    “네가 불편한 게 아니라, 네 위치가 불편한 거야.”

    석주가 샤워 가운을 당겨 바르게 입혀 주었다.

    “…….”

    아진이 심통 난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의 대답이 못마땅하다는 낯이었다. 석주가 소리 없이 한숨을 뿜었다. 아진의 심통을 무시하기가 힘들다. 그가 동물 귀처럼 봉긋하게 솟은 아진의 머리칼을 슥슥 빗겨 주며 물었다.

    “가고 싶어? 가 봐야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형 있잖아요.”

    “…….”

    “어 뭐, 황 비서님도 있고……. 잠깐 가면 안 돼요? 나도 해 보고 싶은데. 회식.”

    아진이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그러면서 동그란 눈으로 석주의 눈치를 보는 게 정말 회식 자리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진도 오늘 축하할 일이 있었다. 비록 쩌렁쩌렁하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진걸과의 만남을 탈 없이 넘긴 것을 자축하고 싶었다.

    허락을 기대하는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보던 석주가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잠깐 얼굴만 비추는 거야.”

    “네!”

    “옷 입어.”

    그 말에 아진이 산책을 준비하는 강아지처럼 드레스 룸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즐겁게 팔랑거리는 머리칼을 보던 석주가 피식 웃었다.

    * * *

    작은 크기로 운영되는 고급 소고깃집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회식은 보통 팀별로 하는데, 홍보 팀은 팀원들끼리 상의 후 와인을 마시러 갔고, 비서 팀은 오늘 같은 날은 소주라며 소고깃집으로 왔단다.

    가게 앞에 선 아진은 무심코 넥타이를 옥죄려다, 더울 거라는 석주의 말에 타이를 차에 두고 왔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괜히 앞머리만 뒤집어 깠다가 다시 슥슥 빗어 내렸다.

    “…….”

    석주는 별다른 재촉의 말 없이 아진의 뒤에서 그의 결심을 기다렸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아진이 짧게 심호흡하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 위에 달려 있던 종이 딸랑-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고깃집 특유의 달짝지근한 갈비 양념 냄새가 훅 밀려왔다. 아진이 꼴깍 마른침인지 군침인지 모를 것을 삼키며 안으로 향했다.

    그를 뒤따르던 석주가 슬쩍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진이 옅게 미소 지었다.

    소나무 벽화 위로 금빛 조명이 은은히 내리쬐는 좁은 복도를 지나자 줄줄이 나열된 테이블이 나타났다. 석주의 언질로 아진을 기다리던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서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서 오세요.”

    “회식에 오는 건 처음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비서 팀의 얼굴은 석주의 상상만큼 어둡지 않았다. 물론 아주 해맑게 웃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울상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뜻밖의 환대에 아진이 환하게 웃으며 까딱까딱 묵례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석주는 눈치껏 그를 끌고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고깃집 직원이 빠르게 식기와 밑반찬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진과 석주의 슈트 재킷을 거두어 가려 했다. 아진은 재킷을 건네주었으나, 석주는 거절했다. 그는 재킷을 본인의 의자 뒤에 걸쳐 두었다.

    석주는 메뉴판을 훑으며 이것저것 주문한 후, 가장 비싼 꽃등심을 테이블마다 인수에 맞게 추가해 달라고 말했다.

    아진이 등장한 이상, 아무래도 이 자리는 그가 개인 카드로 계산하는 게 미덕이니만큼 값비싼 것을 주문해 주는 게 맞았다. 그럼 나오려던 불만도 사그라지지 않겠나.

    곧 선홍빛의 고기가 줄줄이 나왔다. 비서 팀이 환호성을 질렀다.

    “사장님,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난데없는 인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진이 대충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석주를 보며 부끄럽다는 듯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석주가 옅게 웃었다.

    고깃집 직원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빠르게 익어 가는 고기를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입을 뗐다.

    “근데 왜 우리는 술 안 마셔요?”

    다 마시는데. 아진이 다른 이들의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술도 마시게?”

    아진의 입맛에 맞을 만한 밑반찬을 그의 앞으로 옮겨 주던 석주가 눈썹을 올렸다.

    “그럼 회식인데 안 마셔요?”

    아진이 되레 놀랍다는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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