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05화 (205/261)
  • 205

    “감독……님이신데요? 이번에 칸에서 상도 받으셨는데요? 오늘 참석자 중 가장 귀빈이신데요? 기다리시게 하려고요?”

    그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석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감해한다기보다는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어디 감히 다른 것을 아진보다 우선순위에 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아진이 석주의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 가볍게 쓸어내렸다.

    “저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석주의 손에서 카드 키를 가져가려는데. 석주가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기다리라고 하세요.”

    “…….”

    “황 비서도 괜히 들어가서 시달리지 말고 제가 올 때까지 호텔 바나 카페에 가서 시원한 거나 한잔하고 계세요. 그 감독 원래 술 마시면 이상한 고집 피우는 거로 유명하니까, 더 마셔서 아예 취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겁니다.”

    명진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떨떨한 표정이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어쩐지 미안해진 아진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석주가 예약해 둔 룸은 넓고 깔끔했다. 두 쪽 벽이 통창이었고, 침실 두 개에 다이닝 룸과 거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높은 천장에 조금 올드해 보이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무엇을 그렸는지 모를 그림도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아진은 냅다 구두부터 벗었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 슬리퍼 따위 신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배는 안 고파? 긴장해서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아진의 구두를 정리한 석주가 드레스 룸으로 향하며 물었다. 옷걸이에 아진의 슈트 재킷을 곱게 펼쳐 걸어 놓는데, 저 멀리서 아진의 목소리가 탁하게 들려왔다.

    “아까 뭐 좀 주워 먹어서 괜찮아요. 그냥 덥고…… 답답해…….”

    거실로 나온 석주가 에어컨 온도를 최하로 낮추었다. 아진은 널찍한 소파에 엎어져 욱신거리는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빙수 시켜 줄까?”

    석주가 호텔 슬리퍼를 소파 아래에 두었다. 그래 봐야 신지 않을 걸 알지만 수발을 드는 게 버릇이었다.

    아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빙수?”

    “응. 너 여기 망고 빙수 좋아하잖아.”

    “그래요? 내가?”

    아진이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노르스름한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도 같고.

    “좋아해. 너.”

    석주가 아진이 누운 소파 끝에 앉으며 말했다. 아진이 턱을 주억였다.

    “그래요. 먹어요.”

    석주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빙긋 웃은 석주가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아진이 소파 위로 엉금엉금 기어 그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줄줄이 나열된 책자를 구경했다. 석주가 소파 협탁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예, 안녕하세요. 여기 2801호입니다. 룸서비스 주문하려고요. 예. 망고 빙수 하나 부탁드립니다.”

    “치즈케이크도.”

    아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치즈케이크도요.”

    “어…… 자몽에이드. 자몽에이드도.”

    “자몽에이드랑-”

    석주가 더 시킬 게 있냐고 눈짓했다. 바쁘게 책자를 살핀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크로크 무슈도 부탁합니다. 예, 그렇게 네 개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석주가 짧은 인사와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아진이 책자를 넘기며 ‘크로크 무슈’를 찾았다. 그리고 노릇노릇한 샌드위치에 햄과 치즈가 든 걸 보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넥타이를 살살 풀어냈다. 그 후 잘 말아서 소파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한결 숨통이 트인 아진이 석주의 허벅지에 벌러덩 누웠다.

    석주가 아직 땀이 묻어나는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크게 쓰다듬었다.

    아진은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꼈다. 그러다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형 내려가야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가지 말라고 떼쓰면 안 갈 거예요?”

    “응.”

    석주가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아진이 샐쭉 아이처럼 웃었다. 석주의 엄지가 휘어지는 입술 끝을 슬쩍 눌렀다가 떨어졌다.

    “그럼 감독님은 어떡해요?”

    “취하면 괜찮아. 원래 그러기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안 취하면?”

    “황 비서 능력 좋아. 알아서 잘할 거야. 나중에 울면 뭐, 보너스도 주고 휴가도 주고…….”

    눈을 가늘게 뜬 석주가 명진을 달랠 방법을 줄줄이 내놓았다. 아진이 키득거렸다. 석주가 없어도 어떻게든 갈무리할 수 있는 일이면 보내고 싶지 않은데. 한가득 시킨 룸서비스를 그와 함께 먹고 싶은데.

    아진이 소담한 욕심을 내놓기 위해 입술을 뗐을 때였다. 석주의 가슴팍이 우우웅- 하고 진동했다. 아진의 얼굴에서 손을 거둔 석주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곳엔 홍보 팀 팀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엄지로 가볍게 화면을 스와이프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예. 들었습니다. 아, 지금. 네.”

    석주가 꼬박꼬박 대답하며 아진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가에 난처함이 어스름히 스며 있었다. 쩝, 입맛을 다신 아진이 입 모양으로 벙긋벙긋 말했다.

    ‘다녀와요.’

    어쩔 수 없었다. 석주가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 일을 대신 해 주는 건데 아이처럼 떼를 쓸 순 없었다. 이 행사가 틀어지면 저를 위해 기껏 와 준 선화와 미진에게도 송구할 것 같고.

    “예, 지금 갑니다.”

    말을 마친 석주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아진보다 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금방 올게.”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뺨을 지분거렸다.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고.”

    “네.”

    “바깥에 나가지 말고.”

    “네.”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진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안 가고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그 뻔뻔한 얼굴에 석주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진은 그 후로도 수 초간 의아하게 석주를 보다, 자신이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으아, 미안해요.”

    아진이 튕기듯 일어났다. 석주가 재차 웃으며 그런 아진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푹 눌러앉아 일주일 정도 저 귀여운 생명체를 물고 빨고 싶다만. 현실이 그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난 석주가 슈트 재킷을 아래로 탁탁 당기며 정리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울도 보지 않고 넥타이까지 정리한 그가 발을 떼는데.

    “뽀뽀도 안 해 주고 가요?”

    비스듬히 앉아 소파 등받이에 뺨을 묻은 아진이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매력적이었다. 석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잠시간 아무런 대꾸 없이 앞만 응시하던 그가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와 아진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곧 입술이 맞물렸다.

    욕실 거울 앞에 선 아진이 욱신거리는 입술을 매만졌다. 괜히 석주를 자극했다가 된통 혹사당한 입술이 따끔따끔했다. 그가 샵에서 발랐던 립을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음에도 입술이 붉었다. 그로 모자라 퉁퉁 붓기까지 했다. 석주의 혀에 찔리고 문질러진 입천장과 목구멍도 얼얼했다.

    “내가 해 달라고 한 건 뽀뽀였는데…….”

    어딘가 손해를 본 느낌이긴 하나 즐거웠으니 됐다. 쩝 입맛을 다신 아진이 물을 틀었다. 그리고 손을 씻으며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화장한 얼굴이 갑갑하고, 머리는 뻣뻣한 게 갈대 빗자루를 덮어쓰고 있는 느낌이고. 아무래도 샤워를 먼저 해야 할 듯싶었다.

    아진이 석주가 바지 틈에서 죄 빼놓은 와이셔츠 끝을 매만졌다. 그에게 잡히고 문질러졌던 허리와 등줄기가 선연했다. 첫 섹스 이후, 석주는 제 몸을 만지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마치 내내 지키고 있던 선을 없애 버린 것처럼.

    키스를 하다가도 바지 안에 손을 넣고 엉덩이를 주물럭거린다거나, 셔츠 안을 파고들어 등줄기를 쓰다듬는다거나 가슴을 지분거린다거나. 그렇다고 섹스를 자주 하는 건 아니었다. 석주는 딱 거기까지만 한다. 그 이후 아진의 언질이 없으면 미련 없이 물러났다.

    그게 때때로 아쉽긴 하지만 그만큼 편안했다. 지레 겁을 먹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어 안전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아진이 위로 시원하게 올라간 앞머리를 아래로 흩트리려 할 때였다.

    딩-동.

    날카로운 벨 소리가 룸을 울렸다. 움찔 어깨를 떤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수 분 전, 석주가 룸서비스를 시켰던 걸 상기했다.

    “빙수!”

    작게 혼잣말을 한 그가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달칵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룸서비스입니다.”

    커다란 카트를 옆에 세워 둔 남자 직원이 꾸벅 인사했다. 그는 반듯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진이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다. 곧 직원이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카트 손잡이를 쥐며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들어오세-…….”

    문 옆으로 비켜서던 아진은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우뚝 굳어야 했다. 심장이 쿵,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익숙한 얼굴이다.

    창두보다 훨씬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었으며 안타깝게도, 반가운 낯은 아니었다.

    이 인연을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그래. 악연. 혹은 원수라고 할 수 있겠다. 지지리도 밉고, 너무 미워서 질긴 사람. 어떤 악몽을 꾸어도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

    까무잡잡한 피부. 도드라진 광대. 네모나게 각진 턱. 강직하다 못해 사납게 생긴 눈매.

    직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아진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반짝였다.

    [MANAGER 박진걸]

    직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아진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반짝였다.

    정말 진걸이다. 닮은 사람이 아니라, 전생과 같은 이름을 한 그 진걸이 맞았다.

    아진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열기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렸다. 체온이 시시각각 증발하며 손발이 차가워진다 싶더니, 등줄기까지 선득해졌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