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04화 (20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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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절의 개막*

    무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던 아진은 무심코 앞머리를 흩트리려다, 석주가 얼른 손목을 잡아채고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이른 아침 이발소에, 아니, 샵이라는 곳에 다녀왔다. 가볍게 화장도 했고, 머리 손질도 했다. 앞머리를 모두 올리고 이마를 훤히 드러낸 스타일이었는데,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서 꼭 헬멧을 쓰고 있는 듯 답답했다. 입술에 발린 립은 무겁고 끈적하게 느껴졌으며 그나마 적응했던 구두도 오늘따라 아프게 발을 옥죄었다.

    팔자에도 없는 연극배우가 된 기분에 아진이 연신 한숨을 내쉬는데, 석주가 휴지로 아진의 이마에 맺힌 땀을 꾹꾹 누르듯 닦아 냈다. 지척에 서 있던 명진이 얼음이 잔뜩 든 물 잔을 내밀었다. 아진이 그것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홧홧하게 울렁거리는 속은 진정이 안 됐다.

    눈을 때리던 쨍한 조명 빛과 저를 향한 수많은 시선을 상기하자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아요.”

    아진이 석주의 소매를 구겨 쥐며 울상을 했다. 석주가 옅게 웃으며 그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잘하셨습니다.”

    “말을…… 엄청 더듬은 것 같은데…….”

    “두 번밖에 안 더듬으셨습니다. 어차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많이 없어요. 먹고 마시느라 바쁘지.”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 공식적으로 하셔야 할 일은 다 끝났으니 한숨 놓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아진이 어깨를 스르륵 늘어트렸다. 일주일 내내 준비했던 인사말이 드디어 끝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만. 석주도 명진도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니 무대 위에서 똥을 싸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진이 슈트 재킷을 벗으며 기대에 찬 눈빛을 했다.

    “다 했으면 이제 집에 가도 돼요?”

    낯선 공간이 싫었다. 연회는 서울 내 유명 호텔에서 진행됐는데 지나치게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에, 그들이 각양각색으로 내뿜는 목소리와 냄새에 멀미가 다 났다.

    명진이 펄쩍 뛰며 다시 아진의 재킷을 끌어 올렸다.

    “아이고, 안 됩니다, 사장님. 연회 시작한 지 17분 됐습니다. 벌써 가시는 건 좀…….”

    아진의 머리 위로 다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누가 보면 집안에 우한이라도 있는 줄 알 터였다. 명진은 그런 아진이 익숙한 듯, 능청맞게 그를 달랬다.

    “귀빈들이랑 잠깐씩만 인사하시죠. 진짜 잠깐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하고 악수 한 번 하고 지나가시면 됩니다. 차-암 쉽죠?”

    “하나도…… 안 쉬운 것 같은데…….”

    울상을 한 아진이 석주를 쳐다봤다. 내가 진짜 이걸 해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석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낯선 사람을 한 명 한 명 만날수록 죽어 갔다. 어색하게 웃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상대방에 눈치를 보고, 께름칙하게 악수하고, 더위에 시달리며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가 명진의 눈초리에 다시 옥죄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열댓 명쯤 만났을까. 구세주가 등장했다. 선화였다. 끔찍이 아끼는 막내아들의 공식적인 행사라 친히 행차하신 거였다. 아진에게 밀집되어 있던 관심이 그녀에게로 훅 쏠려 갔다. 덕분에 아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명진은 석주의 명령으로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떠났다.

    사람들 사이로 선화가 찡긋 눈으로 인사하는 게 보였다. 아진이 난감해하고 있던 걸 아는 듯했다. 아진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 최고’ 하고 엄지를 올려 주기도 했다.

    엉겁결에 해방된 아진이 다채로운 요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거기서 두툼한 연어와 크림치즈가 잔뜩 올라간 부르스게타도 집어 먹고, 무화과가 올라간 카나페도 먹었다. 아침부터 긴장해서 뭘 제대로 먹은 게 없는지라 뒤늦게 허기가 졌다.

    석주가 접시에 아진이 좋아할 만한 것을 담아 왔다. 사람들을 등지고 벽 쪽으로 서서 얼굴을 가린 아진이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헛웃음을 흘렸다. 제 꼴이 우스웠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양반들 같은데. 왜 전부 체통 없이 서서 밥을 주워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인이면 모름지기 밥상에 바르게 앉아 뜨끈한 국과 밥을 먹어야지…….

    아진이 부르스게타 하나를 석주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뺨 한쪽이 슬쩍 부푸는 그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석주가 왜 웃냐고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달콤한 멜론에 짭조름한 하몽이 말린 꼬치를 입으로 가져가는데. 익숙한 인영이 눈앞을 휙 스쳐 갔다.

    “어……. 누나!”

    미진이었다. 선화의 둘째 딸이자 아진의 누이인. 이런저런 일로 서너 번쯤 본 터라 안면을 튼 상태였다. 망설임 없이 꼬치를 내려놓은 그가 주인을 본 강아지처럼 미진을 향해 뛰어갔다. 한 박자 늦게 그를 발견한 미진이 미간을 좁혔다.

    “야. 바깥에서 방정 떨지 말라니까. 얘가 아직도 지가 십 댄 줄 알아. 귀여우면 다냐?”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아진이 헤벌쭉 웃었다. 미진이 떨어지라는 듯 어깨를 튕겼지만 아진이 다시 붙어 왔다. 언젠가 선화가 말했던 대로, 미진은 꽃님과 성격이 판박이였다. 그래서 낯을 가리던 아진은 식사 한 번으로 그녀와 단번에 친해질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아진을 뒤따라온 석주가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강 비서님.”

    미진이 가볍게 눈을 접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팔꿈치와 손목을 감싸 쥔 아진이 종알종알 물었다.

    “누나 바쁜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네 일인데 와야지. 엄마도 오셨잖아. 근데 이 오빠 새끼는 또 못 온다네. 매번 지가 제일 바쁘지…….”

    “괜찮아. 누나랑 엄마 왔으니까.”

    아진이 배시시 웃었다. 미진이 웃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툭툭 팔뚝을 두드렸다.

    “오늘 자-알생겼네, 동생.”

    “누나도 예뻐.”

    “알아.”

    미진이 보란 듯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그녀는 아진과 은근히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둘 다 선화를 닮은 거였지만, 아무튼. 고운 피부와 통통한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눈매는 아진처럼 고양이와 닮아 있었는데, 아진보다 조금 더 새치름하고 뾰족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몇 년은 젊어 보였다. 아진과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연년생이라 해도 어색함이 없었다.

    아진은 기품 있는 미진이 좋았다. 양반집 규슈처럼 곱고 단아한 느낌은 아닌데, 항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발음이 명확하고 눈빛이 또렷한 게 멋져서 좋았다. 물론, 그녀가 말은 툭툭 던져도 저를 예뻐한다는 게 가장 좋았다.

    “사이트 배너 자리 빼놨다. 이번 드라마 넣어 주려고.”

    미진이 샴페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에 아진의 눈썹이 반갑게 올라갔다.

    “와, 정말? 고마워. 근데 배너가 뭐야?”

    미진의 입매가 해괴하게 뒤틀렸다.

    “……네 그 뻑 난 머리통은 언제쯤 제정신으로 돌아올까?”

    “굳이 돌아와야 하나. 지금도 좋은데.”

    “어휴…….”

    아진은 살갑게 미진과 손을 꼭 잡고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다른 이들이 딱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석주는 두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쫓았다. 이따금 직원들이 뭘 물으러 오면 그의 선에서 답을 주곤 했다.

    그러다 미진이 아는 사람을 만나며 떨어지게 됐다. 멀어지는 미진의 뒷모습을 아쉽게 보던 아진이 석주를 올려다봤다.

    “이제 가면 안 돼요?”

    “음…….”

    “강 비서님. 나 더워.”

    “…….”

    “머리도 아파. 사람이 너무 많아…….”

    아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울상을 했다. 석주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만하면 꽤 오래 있었다. 만날 사람도 얼추 다 만났고. 나머지는 아진 없이 제가 혼자 처리할 수 있었다.

    “위층에 룸을 잡아 두었습니다. 거기서 잠깐 쉬시죠.”

    그 말에 아진의 낯빛이 환하게 갰다. 발을 아프게 옥죄는 구두도 벗고, 시원하게 샤워하고, 에어컨을 세게 틀어 두고, 깨끗한 침대 위에 늘어져 있고 싶었다. 물론 옆자리엔 석주가 있어야겠지.

    아진이 얼른 가자며 앞장섰다. 석주가 입구 반대쪽으로 가는 아진을 수거해다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연회장을 나오자 군중의 밀도가 훅 줄었다. 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킷을 벗었다. 석주가 당연하게 그 재킷을 받아 팔에 걸었다.

    아진이 엘리베이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손목을 슬쩍 감싸 쥐고 로비 쪽으로 향했다. 곧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얼마 있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그곳에 몸을 실은 아진이 석주의 시원한 손을 주물주물 만져 댔다.

    석주가 아진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카드 키를 꺼내 엘리베이터의 버튼 아래에 댔다. 그러자 가장 꼭대기 층에 저절로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때. 손 하나가 닫히는 문틈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어디, 어디 가세요! 저만 두고!”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명진이었다. 그는 어디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맺혀 있었다.

    “사장님이 피곤하다고 하셔서요. 모셔다드리고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나직이 대답한 석주가 닫힘 버튼으로 손을 뻗는데. 명진이 쑥 상체를 내밀었다. 그 발악 섞인 몸짓에 난감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려다가 다시 열렸다.

    “감독님이 급하게 찾으십니다. 프로모션 관련으로 건의 드릴 일이 있다고. 술 좀 드시더니 갑자기 무슨 필이 오셨는지, 당장 오늘 밤에 예고편 오픈 예정인데 뭘 바꾸고 싶답니다. 홍보 팀 팀장이 비서님 기다리는데, 울기 직전입니다.”

    말은 홍보 팀 팀장이 울기 직전이라는데, 정작 울기 직전인 건 명진 같았다. 아진이 석주를 올려다봤다. 가서 그를 구해 줘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는데. 석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리라고 하세요. 사장님 모셔다드리고 올 테니까.”

    그 말에 명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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