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03화 (203/261)

203

“…….”

석주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아진이 시킨 일을 묵묵히 해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아진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게 너무 괴로웠다.

석주의 눈썹이 아프게 구겨졌다. 마른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아진아.”

“흑, 흐으윽…….”

“미안해.”

“흐으, 윽, 흐우…….”

“미안하다.”

석주는 계속해서 사과를 이어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작아진다 싶더니 뚝 끊겼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진의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 * *

아진은 동트기 직전의 새벽 언저리에 눈을 떴다. 몸이 찌뿌듯한데 개운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 재낀 탓에 눈알이 따끔거리고 눈가가 당겼지만, 그래도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아진은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 뒤늦게 주위를 살폈다. 근데 어째 방이 낯설었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낯선 건 아니고 묘하게 익숙한데 여기가 어디더라……. 아, 석주의 방이었다. 꿈속에서 본 적 있었다.

석주의 방은 아진의 방보다 조금 작았고, 단조로웠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창가에 놓인 1인용 소파를 제외하고는 가구랄 것도 없었다. 다만 책장에 책이 많았고, 조명이 어두웠다. 또 은근히 석주의 냄새가 났다. 그가 쓰는 로션 냄새. 바디 워시 냄새. 섬유 유연제 냄새. 그런 거.

방을 구경하던 아진이 벅벅 눈두덩을 문댔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몹시 거슬렸다. 그때, 커다랗고 서늘한 손 하나가 손목을 부드럽게 채 갔다.

“상처 나.”

석주였다. 그는 옆으로 누워 아진에게 팔을 내어 주고 있었다. 아진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그가 옆에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진은 석주를 한참 보다가, 그에게 잡힌 자신의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얀 살결엔 석주의 입술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격렬한 정사를 했는데. 석주는 제 온몸을 핥으면서도 잇자국을 내놓지 않았다.

전생의 석주와는 사뭇 다른 버릇이었다. 전생의 석주는 홍역이라고 오해할 만큼 제 온몸을 씹어 댔었는데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몸이 산뜻하다. 분명 마지막으로 절정에 다다랐을 때만 해도 온몸이 끈적거렸는데. 지금은 보송보송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석주가 저를 씻겼다는 뜻이다. 엉망이 된 제 방 대신 이곳에서 잠들어 있던 것도 석주가 한 일이리라.

그렇게 뒤치다꺼리를 했으니 피곤할 만도 한데, 어째 석주의 얼굴에 잠기운이 없었다. 표정이 약간 나른하게 풀려 있을 뿐, 눈매는 평소와 같이 또렷했고 눈동자도 맑았다.

“안 잤어요?”

아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응.”

석주가 짧게 긍정했다. 아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옆을 지키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인 석주가 이상했다.

“왜요?”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 넘겼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갈라지는 느낌이 몹시 좋았다.

“행여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자고 있으면…….”

“있으면?”

“외롭잖아.”

“…….”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외로워? 내가? 그러려나. 잠들어 있는 그를 보다 애꿎은 상념에 빠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외로워할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저도 절 잘 모른다. 두 번이나 생을 살았는데 둘 다 그다지 긴 삶이 아니었던 터라 저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아진이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석주가 푸흐, 하고 옅게 웃었다.

“거짓말이야. 사실 내가 외로워서 깨어 있었어.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실감하고 싶어서. 잠들면 나 혼자잖아.”

퍽 낭만적인 말이었다. 밤. 그건 석주와 아진에게 유달리 특별한 시간이었다. 밤이 괴로워서, 밤이 외로워서 서로를 원했었다. 근데 꿈속이 외로워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석주는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알던 ‘그’ 석주만큼 잠이 귀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런데도 ‘그’ 석주와 눈앞의 석주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그의 밤의 중심에 제가 있어서 그랬다.

“형은…… 여전하네요.”

아진이 석주의 손목에 난 반달 자국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

석주가 침묵했다. 그가 손끝으로 아진의 머리칼을 살살 빗어 넘겼다. 잠시간 정적을 끌어가던 그가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여전해.”

그 말에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아진의 호흡이 뚝 끊겼다. 입가에 희미하게 떠 있던 미소도 사그라졌다.

나는 여전해.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 언젠가 석주의 집에서 독립해 나왔던 날. 그와 처음으로 전화 통화를 했던 날. 그때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형은, 형은 안 자요?’

-……나야 잘 시간 되려면 멀었지.

‘그 시간이 몇 시인데요?’

-음……. 새벽 한두 시쯤. 아니면 서너 시쯤.

‘그게 뭐야.’

-그냥 넘어가 주라. 나는 여전해.

석주는 제가 없어 자지 못했고, 그것을 몹시 당연히 여겼고, 그것에 괴로워하거나 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진은 그 문장을 음절 하나 빠짐없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의 부재로 불편을 겪던 석주가 좋아서.

근데 눈앞의 석주는 그것을 모를 터였다. 모르는 게 맞았다. 되레 제게 뭐가 여전하냐고 물어봐야 했다. 우리가 몸을 섞은 건 오늘이 처음이고, 나신으로 함께 밤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여전하다’라는 말은 우리의 상황에 맞지 않았다.

무슨 말인 줄 알고 대답한 건가. 아니면 대충 문맥에 맞춰 대꾸해 준 건가.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에 뺨을 묻은 채로 그를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두렵기도 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석주가 이마에 쪽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조곤조곤 듣기 좋은 음성으로 아진을 도닥거렸다.

“더 자. 오늘 일요일이야. 일어나서 인사말 연습하고, 다 끝내면 아이스크림 먹자.”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에 아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석주가 함께 웃으며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진은 몇 번 눈을 끔뻑이는 것으로 의문을 털어 버렸다. 그냥 바보 천치처럼 살고 싶었다. 꿈속에서 제가 저를 지칭하던 ‘대가리 꽃밭’과 ‘철없는 막내 도련님’ 같은,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는 이로 살고 싶었다.

아진이 석주의 옆구리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석주가 그를 한 아름 감싸 안았다. 섹스하면서 몸을 맞붙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포옹이었다. 훨씬 담백하고, 서정적인.

“형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요.”

아진이 가지런히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계속 내 옆에 있어. 벌써 10년이나 같이 있었지만, 앞으로 20년 30년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요.”

계속 내 밤을 지켜 줘요. 내 슬픔을 돌봐 주고, 못된 기억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감시해 줘.

그러나 석주는 대답이 없었다. 아진이 눈만 위로 올려 석주를 쳐다봤다. 울음으로 붉어진 눈가에 그새 짜증이 스몄다.

“왜 대답 안 해요?”

신경질 난 고양이 같은 꼴에 석주가 마른 웃음을 띠었다. 아진의 눈가에 입 맞춘 그가 아래로 미끄러진 마른 몸을 추켜 올리며 말했다.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내가 널 떠날 일은 없어.”

“…….”

“나는 네가 아니고서는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거든.”

석주가 아진의 날개뼈를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지금처럼 연인으로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좋아해 주지 않아도 돼. 아는 형 취급도 괜찮고, 비서 취급도 괜찮고, 하물며 몸종 취급도 괜찮아. 그냥 네 옆에 있게만 해 주면, 나는 그것으로 충만할 수 있어.”

남이 들었다면 과하지 않냐며 기겁할 만큼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말이었는데. 아진은 마냥 좋기만 했다. 제가 석주를 오롯이 쟁취한 것 같아서. 이 멋진 사내를 제 발아래에 둔 것 같아서. 굳이 그의 다리를 부수고, 족쇄를 채우고, 억압하며 잡아 두지 않아도 그가 언제나 제 곁에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아진이 석주의 허리를 크게 감싸 안았다.

“내가 형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다는 말이네요.”

“그래. 그럴 일은 없어.”

석주가 단호히 대답했다. 아진이 키득키득 천진하게 웃었다. 확실한 관계. 높낮이 없는 지평선. 위협도 위험도 없는 훗날. 아진이 항상 바라 오던 거였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프러포즈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해피 엔딩. 그 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마침표를 찍어도 아쉽지 않은 순간. 그 충만한 완전함.

눈을 감은 아진이 길게 호흡하며 미소 짓는데. 석주가 아진을 불렀다.

“근데 아진아.”

이미 끝난 대화가 석주로 인해 다시 열렸다.

“버려도 돼.”

“……뭐라고요?”

스르륵 눈을 뜬 아진이 얼떨떨한 낯으로 석주를 올려다봤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뺨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버리고 싶으면 버려.”

“…….”

“발로 차고, 내팽개치고, 문전 박대해. 그래도 돼.”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아진은 석주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뭐 하러 그러겠나. 석주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는 잘못한 게 없는데.

갑자기 단전이 뜨거워졌다. 아진이 팔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아래로 끌어 내리며 되물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그러면 슬퍼할 거면서.”

“그건 내 몫이야.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니,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진의 눈썹이 오르막을 그렸다. 속눈썹이 위로 바짝 붙어 올랐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석주가 얄미웠다. 우리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는데. 다음 시즌이 필요 없었는데. 석주가 자꾸 그 여지를 남겨 두려 한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아진이 또렷이 말했다.

“싫어요. 난 노력할 거예요. 형을 안 버리도록.”

“…….”

“그러니까 형도 노력해요. 나한테 버림받지 않도록.”

꼭 협박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 봤자 말간 얼굴이 어눌하게 하는 협박이었으나, 석주에겐 제법 선득한 말이었다. 석주가 크게 심호흡하며 대답했다.

“……그래. 최선을 다할게.”

아진이 석주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혹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감시하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석주를 노려보다시피 하던 아진이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의 허리를 껴안고 잠깐 숨을 참았다. 마치 울분을 가득 담아 떼쓰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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