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96화 (19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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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응.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아진이 히히, 하고 아이처럼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완벽한 인생이었다. 가족에, 꽃님에, 석주까지.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행복한데 집도 으리으리하고 돈도 많다. 당장 오늘 저녁 식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남이 먹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아득한 내일에 겁먹지 않아도 된다.

처음 이 세상에 눈을 떴을 땐 당황스럽고 무서웠는데. 지금은 마냥 좋았다. 너그러운 용왕님이 전생에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누려 보라고 저를 이곳에 데려다준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진의 광대가 행복으로 탐스럽게 솟아올랐다. 석주가 엄지로 그것을 살살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살결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행복해 보여.”

그 말에 아진이 고개를 들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예쁘게 빛났다.

“정말요?”

“응. 보기 좋아.”

아진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는 한동안 석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석주는 그 시선을 차분히 받아 냈다. 이따금 검은 눈동자가 경련하듯 움직였는데, 그 의미를 알 순 없었다. 다만, 보일 듯 말 듯 하게 올라간 입꼬리로 말미암아 지금 그의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형은?”

“어?”

“형도 행복해요?”

“…….”

석주의 입이 직선을 그었다.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고, 어떠한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이를테면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에 놀란 듯한, 그것을 처음 자각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석주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그라드는 말끝에 혼란과 죄책감이 묻어났다. 아진이 다시 널찍한 어깨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사내답게 각진 석주의 턱선을 검지로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형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석주가 꾹 눈을 감았다. 아진의 뒤로 숨은 손이 힘껏 말렸다가 풀렸다. 그러다 아진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늘씬한 등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따끈따끈한 아진의 체온에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나도 행복해.”

“…….”

“분에 넘치게, 행복해.”

“…….”

“늘 행복했어. 네 곁에 있었으니까.”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 간질간질한 애정에 아진이 작게 웃었다. 그가 석주의 사원증 줄을 돌돌 말며 말했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집?”

“응. 형이랑 나랑 둘이 사는 우리 집.”

“…….”

석주가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묘하게 긴장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진이 배시시 웃으며 석주를 올려다봤다. 그저 집에 가자는 것인데 뭐가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이번 생엔 갈 곳이 참 많다. 선화의 집도, 석주와 함께 사는 집도, 거기다 꽃님이 있는 제주도까지. 하나같이 저를 반겨 주고, 환영해 주는 곳들이다. 그곳에서 저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고 친구고 연인이었다.

전생에는 갈 곳이 없어서 마루에 퍼질러 앉아 있기 일쑤였는데. 그 아득함과 쓸쓸함이 버틸 만하게 괴로웠었지.

먼 과거를 상기하던 아진이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 미간을 슬쩍 구겼다가 편 그가 석주의 허벅지 위에 바로 앉았다. 그리고 다시 도독한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석주는 아진의 목을 가볍게 감싸 쥐며 입맞춤에 응했다. 숨이 엉키고, 코끝이 부딪치고, 혀가 넘나들었다.

“으응…….”

아진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석주의 배에 아랫도리를 비비적거렸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게 하고 싶었다.

그가 바지 아래로 들어간 석주의 셔츠를 위로 잡아당기며 거친 숨을 내쉴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저 황 비서입니다.”

명진이었다.

놀란 아진이 허둥지둥 석주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무게 중심을 잃어 단단한 대리석 테이블에 머리부터 처박힐 뻔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잡아채 소파에 조심히 앉혀 놓았다.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크게 쓰다듬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널브러진 서류철을 정리하며 반대 손으로는 테이블 끝으로 굴러간 만년필을 주워 왔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삐져나온 와이셔츠까지 바지 안으로 넣은 그가 막 아진의 옆에 곧게 섰을 때. 달칵 문이 열리고, 명진의 머리가 쑥 나타났다.

“혹시 강 비서님 여기 계십, 어, 계시네. 강 비서님 미팅 시간 다 됐습니다.”

“예, 지금 나갑니다.”

석주가 무표정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서류철을 탁탁 소리 내며 겹쳤다. 아진은 멍한 얼굴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미팅이 있어서 나가 보겠습니다.”

아진에게 꾸벅 묵례한 석주가 뒤를 돌았다. 뚜벅뚜벅 단정한 구둣발 소리가 세 번쯤 울렸을까. 명진이 자신의 목 언저리를 가리키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강 비서님, 사원증이…….”

“예?”

석주가 반문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목 뒤로 넘어가 있는 사원증을 발견했다. 석주는 당황한 기색 없이 그것을 잡아 앞으로 돌렸다.

“…….”

명진이 끔뻑끔뻑 석주를 쳐다봤다. 대체 뭘 했기에 사원증이 돌아갔냐는 듯한 무언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석주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살짝 흐트러진 넥타이를 꽉 옥죄기만 했다. 그는 명진을 지나쳐 먼저 사장실을 나섰다.

“가죠.”

“아, 예. 사장님 나가 보겠습니다.”

명진이 꾸벅 아진의 뒷모습을 향해 묵례했다. 곧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아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는 한동안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검은 그리움

“안녕하십니까. HS 스튜디오 대표 한아진입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유달리 더웠던 여름이 끝물에 다다랐습니다. 이번 여름, 여러분이 흘려 주신 소중한 땀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반드시 멋진 작품으로 되돌아올 겁니다. 그 파도가 한국은 물론,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적실 수 있도록 HS 스튜디오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우리 HS 스튜디오가 투자⋅제작에 참여한 의 공개 기념 추카, 축하, 축…….”

종이에 빼곡히 쓰인 활자를 따라 읽어 가던 아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몇 시간째 들고 있어 쭈글쭈글해진 종이가 파르르 경련했다. 아진이 짧게 심호흡하며 다시 글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디까지 읽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글자들이 소용돌이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아진이 소파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다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석주의 허벅지에 얼굴을 얹었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선화와 노는 것도 아니고, 석주와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꽃님을 보러 제주도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어색한 활자들과 씨름하고 있으려니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 못 하겠어. 나는 못 해. 형이 대신 하면 안 돼요?”

울상을 한 아진이 종이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다음 주 주말. 회사에서 파티를 주최한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공들여 오던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공개 기념 행사인데, 국내외로 관심이 대단하단다. 오래 고생한 만큼 회사 직원들과 투자자, 드라마 감독과 배우, 엔터테인먼트 관련자 등 많은 이가 모여 축하하는 자리랬다.

아진은 회사 사장이니만큼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말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게 아주 곤혹스러웠다.

말을 길게 해 본 적도 없고, 많은 사람 앞에 대표로 선 적도 없다. 석주가 참고하라고 작년, 재작년에 있었던 인사말 동영상을 보여 주었는데 아진은 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오줌이 마려워서.

아진이 푸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석주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아진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안 돼. 이런 건 네가 직접 해야 해. 사장님이잖아.”

“그럼 내일부터 형이 사장님 해요. 내가 엄마한테 말할게요.”

“아진아.”

“아…… 아아…….”

아진이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러다 종이로 얼굴을 벅벅 문댔다. 발뒤꿈치가 소파 위로 쿵쿵 튕겼다.

“나는…… 바보라서…… 이런 거…… 못 해…….”

“네가 왜 바보야. 너 똑똑해. 내가 너 가르쳐 봐서 알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지, 하면 잘 해.”

그 말에 아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했다.

“하기 싫은 게 문제인 거예요! 그게 제일 문제라고! 나 진짜 하기 싫어!”

“…….”

“나는 바지사장인데! 진짜 사장도 아닌데!”

마구 짜증을 내던 아진이 아……, 하고 맥없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늘어트렸다. 또 열이 오른다. 명치가 뜨겁고 볼이 뜨끈해지는 기분이 영 별로였다. 종이를 대충 소파 아래로 버린 아진이 석주에게 달라붙었다.

“나 더워요.”

“에어컨을-”

“아니, 그거 말고. 뽀뽀해 줘요.”

“…….”

“뽀뽀해 주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어쩌구 더 읽어 볼게요.”

아진이 석주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요즘 자주 보는 웃음이었다. 틈만 나면 덥다고 들러붙는데 그럴 때마다 애교 부리듯 귀엽게 웃곤 했다. 마치 ‘내가 이렇게 예쁘게 웃는데 거절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당초 석주에게 아진은 감히 밀어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 그랬다.

뭐, 석주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애교였다.

석주가 아진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가 놨다. 말 그대로 뽀뽀였다. 그러나 아진은 어딘가 실망한 기색이었다. 입술을 비죽 내미는 게 심통 난 어린아이 같았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석주가 아진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진의 낯이 금세 화사해졌다. 그는 익숙하게 석주의 목을 껴안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간지러운 뽀뽀는 자연스럽게 키스로 이어졌다.

몇 분 후, 아진은 소파에 누워 있었고, 석주는 맹수처럼 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아진은 입 안을 배회하는 석주의 혀를 쭙쭙 빨며 근육이 두툼하게 붙은 팔이나 늘씬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헐렁한 그의 홈웨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군살일랑 없는 옆구리를 뜨거운 손으로 쓸어내리자, 석주의 거친 숨결이 입 안으로 훅 뿜어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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