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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95화 (19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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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왕님이 우리 아줌마, 아니, 우리 이모 살려 줬나 봐. 용왕님 진짜 착해. 진짜 착한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감사한 분이야.

    기쁜 소식에 의자 아래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진의 눈가가 돌연 일그러졌다. 간신히 원래 색으로 돌아오던 흰자위가 다시 붉어졌다. 눈물이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퉁퉁 부은 입술이 쭈뼛쭈뼛 서럽게 들썩였다.

    “흐으…….”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아진에 선화와 꽃님이 입을 뻐끔 벌렸다.

    “진아. 왜 또 울어. 얘가 진짜…….”

    “병원은 내가 아니라 아진이 네가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이렇게 울어. 누가 보면 집에 초상난 줄 알겠네.”

    “다르지? 어? 우리 아진이 평소랑 너무 다르지?”

    “이게 기억에 문제가 있는 수준이 아닌데? 애가 아예 싹 바뀐 것 같다?”

    “맞아, 맞아. 책을 읽질 않나, 사전을 사 달라고 하질 않나, 요즘 출근도 엄청 잘해.”

    선화가 별것 아닌 일을 몹시 심각하게 말했다. 덩달아 꽃님도 심각해졌다.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린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진아. 너 요즘 뭐 헛것 보이냐? 기가 약해졌나? 웬 금수 같은 놈들이 또 들러붙고 그래? 잠은? 잘 자고? 이상한 꿈 같은 건 안 꿔?”

    “어머, 언니. 아진이가 언제 잠 잘 자는 거 봤어? 더군다나 요즘 더위가 어디 그냥 더위야? 통 못 자. 역시 굿을 해야 할까 봐. 언니가 좀 알아봐 줘.”

    “진짜 그래야 하나……. 일단 내가-”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손바닥으로 대충 눈물을 훔친 그가 빙긋 웃어 보였다.

    “나 괜찮아.”

    “…….”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냥…… 그냥 이모가 너무 반가워서 그래.”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얼른 닦아 낸 아진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근데 이모는? 이모는 뭐가 보이거나 그러진 않아?”

    다시 시작된 난데없는 질문에 꽃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이긴 뭐가 보여. 내가 무당이냐?”

    “아니면 됐어.”

    아진이 히히, 하고 웃었다. 꽃님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선화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 엄마는 좀 섭섭하다. 엄마는 못 알아봐 놓고 이모는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울고, 궁금한 것도 많고…….”

    그 말에 꽃님이 비죽 입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어딘가 으스대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그러게, 밥 좀 잘해 주지. 네가 아진이 밥 해 먹인 것보다 내가 해 먹인 게 더 많아서 그래. 아진이도 아는 거야. 자기가 누구 밥 먹고 컸는지.”

    “아, 진짜 언니. 이름만큼 구시대적 발상 할래? 요즘은 돈으로 키우는 게 대세거든?”

    “지랄. 애는 밥으로 키워야지.”

    아진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긴 대화였다. 아진이 푸흐흐 웃었다. 그러면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폈다. 엄마, 이모, 그리고 석주. 너무나 완벽한 사람들에, 완벽한 순간이었다.

    아진이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애교 부리듯 꽃님을 불렀다.

    “이모.”

    “왜.”

    “나 김치전 해 주라.”

    그 말에 꽃님의 입꼬리가 한껏 추켜 올라갔다. 그녀가 철썩 선화의 등을 후려쳤다.

    “이것 봐. 애는 밥으로 키워야 한다니까.”

    선화가 분하다는 듯 가자미눈을 떴다. 여유롭게 일어난 꽃님이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모가 지금 해 줄게.”

    그에 선화가 한 박자 늦게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같이 만들래.”

    “괜히 나대다가 김치 엎지 말고 앉아 있어, 그냥.”

    “아, 나도 할 거라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던 아진이 해사하게 웃었다.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

    옆자리에 앉은 석주가 화창한 웃음이 만개한 아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꽃님이 헝클이고 간 머리칼을 슥슥 빗어 넘겨 주었다. 아진의 웃음이 석주를 향해 왔다. 석주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 * *

    아진은 꽃님과 일주일 내내 함께했다. 본가에서 머무르는 그녀의 곁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해서 후다닥 회사에 갔다가 퇴근하면 또 꽃님을 만나러 갔다.

    아진은 꽃님이 이만 돌아가겠다고 입만 떼도 안 된다며 생떼를 부렸다. 덕분에 서울에 사흘 정도만 머무르려던 꽃님이 일주일이나 머무르게 됐다.

    그 일주일 동안 아진은 그녀와 함께 아침을 먹었고, 싱그러운 정원을 산책했고, 그녀가 베이킹 재료를 사러 가는 데에 따라갔고, 같이 커피를 마셨으며, 그녀가 보는 아침 드라마를 함께 봤다. 잠도 같이 자고 싶었는데 다 큰 놈이 왜 이렇게 징그럽게 구냐고 쫓겨났다.

    꽃님은 예나 지금이나 성격이 그대로였다. 아주 다정하진 않으나 모난 곳도 없는 성격. 어투는 괄괄하나 눈빛은 애정 넘치는. 그래서 좋았다. 여전히 제가 알던 꽃님이라서.

    사장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아진이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이른 아침 제주도로 떠난 꽃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였다.

    [제주도 도착했어?]

    답장은 금세 왔다.

    [그래.]

    짧은 답이었다. 아진은 곧장 또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점심은?]

    [아직.]

    다시 온 단답에 아진이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울엔 언제 또 와? 아니면 내가 갈]까지 입력하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진아. 이모 자리 오래 비워서 바쁘다. 너도 일해라.]

    그에 아진의 엄지가 우뚝 굳었다.

    “치…….”

    통통한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다치지 마, 이모]

    [뽀뽀하는 이모티콘]

    그리고 화면을 껐다. 꽃님은 전생에서도 일할 때 방해하는 걸 몹시 싫어했으니까. 요리할 때 귀찮게 굴면 뒤집개로 팔뚝을 철썩 후려치곤 했다.

    아진이 갑갑한 넥타이를 검지로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 꽃님에게 등짝을 맞으며 두부전 따위를 훔쳐 먹을 때가 좋았는데. 그가 아득한 옛날을 추억하며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보나 마나 석주이겠지만, 아진은 혹시나 하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나직이 대답했다.

    “네.”

    곧 문이 열리고, 예상했던 대로 석주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의 서류철이 두툼하게 들려 있었다.

    “사장님. 오늘 결재해 주실 게 많습니다.”

    “네에-”

    아진이 다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석주는 서류철을 소파 테이블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에서 만년필 한 자루를 가져왔다. 아진이 못내 귀찮은 기색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거라곤 부딪치는 직원들과 인사하기, 이름 휘갈겨 쓰기가 다인데 뭐가 이렇게 피곤하고 귀찮은지 모를 일이다.

    아진이 익숙하게 [한아진]이라는 이름을 휘갈겨 썼다. 그렇게 서명을 꼬박 8개를 하고 나서야 결재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석주가 허리를 숙이며 서류철을 덮었다. 그의 사원증이 아래로 늘어졌다. 달랑거리는 사원증에 무표정한 석주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지금의 석주보다 약간 앳된 얼굴이었다.

    귀엽네. 그 생각을 무심코 했던 것 같다.

    아진이 불쑥 석주의 사원증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석주가 아진 쪽으로 훅 쏟아졌다. 그의 발이 소파 테이블을 차면서 서류철 두어 개가 바닥으로 타닥, 탁 떨어졌다.

    “사장님.”

    석주는 다리에 힘을 주고 넘어지지 않으려 버텼으나 아진이 반대 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아 당기는 바람에 결국 기울어야 했다.

    아진은 턱을 올리고 곧장 석주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소파 팔걸이를 움켜쥔 석주가 버석하니 굳었다. 아진이 혀를 내어 고양이처럼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석주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회사에선 이러면 안 된다니까, 하는 꾸짖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커다란 손이 아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아진이 알게 모르게 웃으며 석주에게 매달렸다. 석주는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받쳐 그를 소파에 바로 앉힌 후, 유연한 맹수처럼 그의 위에 올라탔다.

    키스가 단숨에 깊어졌다. 널찍한 사장실 가득 질척한 소리가 차올랐다. 혀가 섞이고, 타액이 엉켰다. 아진은 오늘 유달리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기세 좋게 석주의 입 안으로 혀를 넣기도 했다.

    석주는 처음엔 가볍게 키스를 이어 가다 아진의 도발에 훅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아진의 위에 올라타 있는지라 넓은 등이 한껏 곡선을 그리며 말렸다. 아진이 그런 석주의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얇은 와이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근육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으응…….”

    뜨거운 숨결과 미적지근한 숨결이 질척하게 뒤섞였다. 아진의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자극적인 행위라 차가운 석주와 붙어 있어도 치미는 열이 갈무리가 안 됐다. 거기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혀를 움직이다 보니 턱과 목이 지끈거렸다.

    아진이 설핏 미간을 구기는데. 그 불편을 대번에 눈치챈 석주가 아진의 허리를 잡아 몸을 뒤집었다. 이제는 석주가 소파에 앉고, 아진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게 됐다. 석주는 아진과 입술을 붙인 채, 아진의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 와이셔츠 단추도 두 개 끌어 주었다.

    “하아…….”

    한결 헐거워진 차림새에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키스를 이어 갔다. 아진이 석주의 잘생긴 턱선과 귓바퀴를 더듬었다. 사타구니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체감하며 묘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붙어 있다가 떨어졌을 땐 시침이 하나 가까이 이동한 상태였다.

    아진이 저릿저릿한 입술을 매만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회사에서 입을 맞춘 건 처음이다. 항상 석주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행위는 자제해야 어쩌구 말했던 것 같은데 아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저를 이기지 못할 석주를 알아서.

    석주가 웃는 아진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의 뺨을 지분거리고, 흐트러진 셔츠 깃을 매만져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진이 석주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석주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어 아진이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

    “형.”

    석주의 맛으로 가득한 입맛을 다시던 아진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손끝으로는 멋들어지게 뻗은 석주의 어깨선을 따라 그렸다.

    “응.”

    “나 요즘 무지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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