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93화 (193/261)

193

“형 혹시…… 주혁이 싫어해요?”

“응. 싫어해.”

냉큼 나온 대답에 아진이 턱을 안으로 당겼다. 석주가 원색적으로 감정을 티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놀라웠다. 동시에 흥미도 생겼다. 아진이 콘솔 박스 위로 팔꿈치를 걸치며 물었다.

“왜요?”

“너랑 친해서.”

붉은 신호에 차를 멈춘 석주가 이번에도 단호히 대답했다. 아진이 자신의 눈썹을 슥슥 문대며 그의 말을 해석하려 했다.

“나랑 친해서 싫다면…… 그, 어, 질투, 뭐 그런 건가.”

“맞아, 질투.”

석주가 긍정했다.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리 당당하게 나오니 놀려 먹을 생각도 안 들었다. 그가 석주의 옆얼굴을 빤히 보는데 핸드폰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답]

[답해라]

[ㅃㄹ]

[스쿼시]

[오랜만에 ㄱ]

[테니스나 골프도 갠춘]

[끝나고 술도 빨자]

무표정하게 메시지를 훑어본 아진이 토독토독 답을 적어 보냈다.

[싫어.]

전송 버튼을 누른 아진이 그대로 핸드폰을 뒤집어 석주에게 보여 주었다. 석주의 눈동자에 아진이 보낸 두 글자가 또렷이 박혔다. 그와 동시에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훤히 보이는 속내에 아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근데 주혁이 싫다면서 비싼 시계는 왜 사다 줬어요?”

롤렉스, 그거. 주혁이가 되게 좋아하던데. 아진이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며 물었다.

“싸구려 줬다간 그 빌미로 널 괴롭힐 놈이라서.”

“으응, 그렇구나.”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뭐 그런 느낌인가. 그가 시계를 보며 헤벌쭉 웃던 주혁을 상기하는데.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형은 마조야. 마조. 너는 사디스트고. 으, 씨발 둘 다 변태냐?’

맞아. 그 단어 뜻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진이 다시 핸드폰을 밝히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사디, 사디스트랑 마조, 그거를 벗어나려나 봐요.”

순간 차가 꿀렁거렸다. 석주가 액셀을 잘못 밟은 거였다.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주를 쳐다보는데. 석주가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덩달아 놀란 아진이 더듬더듬 주혁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주-혁이가 그랬어요. 나는 사디고, 형은 마조 끼가 있대요. 둘 다 이상하대. 무슨 뜻인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직 못 찾아봤어요. 뭔 병 같은 건가?”

“……은 ……끼.”

어금니를 꽉 짓씹은 석주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진이 왼쪽 귀를 석주 쪽으로 내밀었다.

“뭐라고요?”

“아니, 아니야. 찾아보지 마. 알 필요 없는 단어야.”

석주가 강경하게 말했다. 절대 하지 말라며 아진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어 뒷좌석에 던져 놓았다. 아진이 텅 빈 손을 꿈지럭거렸다. 궁금한데. 석주가 저렇게 말하니 더 궁금한데. 찾아보지 말라니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아무튼 그걸 벗어나려나 봐요. 주혁이가 그랬거든요. 저는 형 괴로워하는 거 보면서 즐거워하고, 형은 벌 받는 거 좋아한다고.”

“…….”

“근데 오늘 형이 주혁이가 싫다고 딱 말해 줬으니까. 그리고 나도 형이 싫어하는 거 굳이 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우리 이제 사디스트도 아니고, 마조도 아닌 거네요.”

아진이 순진한 얼굴로 사디와 마조를 연신 언급했다. 누가 들으면 어쩌나 겁나는 문장의 연속이었다. 석주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구겨졌다.

“하아……. 그래.”

그가 여전히 붉은 신호등을 노려보며 떫은 혀를 움직였다. 간만에 정수리가 뜨끈뜨끈해졌다. 치미는 짜증이 도통 갈무리가 안 됐다. 창턱에 팔을 걸치고 눈썹을 긁던 그가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네.”

“혹시 회장님이나 이모님한테 그 소리 하면 안 돼.”

“사디랑 마조요?”

“응, 그거.”

“나쁜 말이에요?”

“응.”

“알았어요.”

아진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옅게 웃으며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십 분 후. 차가 본가 주차장에 멈춰 섰다. 뒷좌석에서 핸드폰을 챙긴 아진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석주가 그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핸드폰 줘 봐.”

“제 거요?”

“응.”

아진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석주가 홈 화면을 밀어 올리자 주혁과의 메신저 창이 나타났다. [싫어.]라고 보낸 아진의 메시지 아래로 시끄러운 주혁의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씨바넘. 나쁜 새끼. 배신자. 싸가지-까지 읽던 석주가 메시지 창을 통째로 삭제했다. 그로 모자라 주혁의 전화번호를 찾아 [차단]이라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진이 뭘 했냐고 눈으로 물었으나 석주는 빙긋 웃기만 할 뿐, 답을 해 주진 않았다.

* * *

“이모는 어떤 사람이에요?”

집에 들어와 구두를 벗은 아진은 홈슬리퍼를 건너뛰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진의 구두를 정리하고, 홈슬리퍼에 발을 꿰던 석주가 우뚝 굳었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답할 말을 고민하는데. 아진이 종알종알 대신 말을 이었다.

“좋은 분이라는 건 알아요. 엄마가 그분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근데 저는 처음 만나니까. 조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아진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는데. 석주가 그의 팔뚝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 안 해도 돼. 반가운 분이니까.”

“…….”

그 말에 아진이 후우, 하고 심호흡했다. 석주가 괜찮다는 듯 재차 그를 다독거렸다. 그때, 현관 복도 끝에서 선화가 쏙 얼굴을 내밀었다.

“아진이 왔니?”

“다녀왔습니다.”

아진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응. 석주도 왔네.”

“예, 회장님.”

“저녁은?”

“안 먹었습니다.”

“그래. 얼른 짐 두고 와. 밥 먹자.”

“예.”

꾸벅 묵례한 석주가 아진의 재킷과 서류 가방을 들고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아진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봤다. 오늘 종일 붙어 있었는데도 떨어지는 게 아쉽다. 그가 마른 입맛을 다시는데, 선화가 그의 손목을 채 이모가 기다린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아진이 충동적으로 선화를 불렀다.

“엄마.”

“응, 아들.”

“나 이제 집에 돌아갈래. 석주 형이랑 사는 집에.”

그 말에 선화가 휙 아진을 쳐다봤다.

“왜?”

“거기가 회사랑 더 가깝잖아.”

“뭐야. 기억 돌아왔어?”

걸음을 멈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진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넥타이 끝을 돌돌 말았다.

“어? 그건…… 아닌데, 여기 있는 것보다는 거기 있는 게 더, 음, 더 머리에, 아니, 기억에 좋을 것 같아……서?”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에 선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설득을 이어 가려는 찰나. 선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렴.”

“정말?”

예상과 달리 쉬운 허락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래도 아쉽네. 오랜만에 아들이랑 살아서 좋았는데.”

선화가 아진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크게 빗어 넘겼다. 아진이 “자주 올게.” 하며 배시시 웃었다. 선화가 덩달아 웃으며 아진의 등을 쓰다듬었다.

“언제든 와, 언제든.”

아진은 그 말이 참으로 좋았다. 언제든 올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마냥 좋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그녀와 석주만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호롱불 모양의 조명등이 가지런히 선 복도를 지나 거실로 접어들었다. 근데 어째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이모로 보이는 이가 없었다.

“이모는?”

“아, 이모 지금 주방에서 롤케이크 만들어.”

“……롤케이크?”

“응. 너 그거 엄청 좋아하잖아. 단거 잘 안 먹어도 그건 사족을 못 쓰면서. 온 김에 잔뜩 만들어 두고 가겠대. 혹시 그것도 기억 안 나?”

“…….”

아진이 침묵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화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너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왔을 때. 이틀 동안 롤케이크 엄청 먹었잖아. 그거 이모가 만들어 두고 간 거야.”

“아…….”

아진이 짧게 탄식했다. 이 집에 처음 왔던 날. 늦은 새벽 식사를 하고 석주가 후식이라며 롤케이크와 자몽을 갖다 줬었다. 폭신폭신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다음 날 점심 후에도 저녁 후에도 후식으로 그것을 먹었었다. 그러다 더는 케이크가 없다는 석주의 말에 실망했었지.

그게 이모가 만든 거였구나.

아진이 돌돌 말았던 넥타이를 아래로 쭉쭉 잡아당기는데. 선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모는 기억해?”

아진이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화가 애달픈 낯으로 아진의 이마를 슥슥 쓸어 넘겼다.

“정말 널 어쩌면 좋니.”

“미안…….”

“이모 너 엄청 예뻐했어. 지금도 예뻐하고.”

“그래?”

“응. 가서 인사하자. 얼굴 보면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선화가 아진을 이끌었다. 아진은 께름칙한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사실 이모고 고모고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래 봐야 아진에게는 낯선 이라. 지금은 선화와 석주만으로도 넘치게 충분했다. 다른 인연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대충 인사하고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주방에 들어섰다. 고소한 버터 냄새와 달큰한 설탕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오븐 때문에 후덥지근한 열기도 느껴졌다. 반갑지 않은 온도였다. 아진이 구겨지는 미간을 참으며 무표정을 연기하는데.

“언니. 아진이 왔어.”

선화가 살갑게 이모를 불렀다. 누군가가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벌써 어색한 기분에 아진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때.

“어, 아진아. 마침 다 됐다. 나가서 기다려. 여긴 더워.”

익숙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두드렸다. 그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아진아. 여자의 것치고는 낮은 음성. 투박한 발음. 그러나 힘이 좋아서 고함을 지르면 하늘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것 같은 목소리. 제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이는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설마, 설마…….

입을 뻐끔 벌린 아진이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이모라 불린 이는 냉장고에서 종이 포일에 말린 동그랗고 통통한 롤케이크를 꺼내고 있었다.

그녀는 풍채가 좋았다. 시원하고 가벼워 보이는 원피스 위로 꽃 모양 참이 달린 깜찍한 앞치마를 하고 있었는데, 쟁반을 쥔 손이나 발목이 두툼했다. 살결은 희지도, 검지도 않았으며 팔꿈치 아래나 손등에 얼룩덜룩한 흉터가 나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면 냄비나 프라이팬에 데면서 흔히 생기는 상처였다.

머리카락은 중단발 정도의 길이였고, 파마를 해서 곱슬곱슬했다. 그것을 한데 모아 커다란 집게 핀으로 고정해 놓았고, 목덜미에 언뜻 목걸이 줄이 보였다.

아진이 숨을 우뚝 멈췄다. 심장이 쿵, 쿵, 쿵 크게 뛰었다. 오죽 크게 뛰는지 제 심장 박동에 머리칼이 흔들리는 듯한 환촉이 일 정도였다.

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이모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의 마른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뭐 해. 나가 있으라니까.”

그때. 이모가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몸짓이 어찌나 느린지. 공기가 다 멈춘 것 같았다. 사위에 즐비한 달콤한 설탕 냄새에 질식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얼굴이 드러났다. 속쌍꺼풀이 가는 눈. 위로 살짝 까뒤집힌 입술. 소녀처럼 주근깨가 퍼진 광대. 더운 부엌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 눈가에 짙게 진 주름.

아진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이 흐려져 얼른 벅벅 닦아 냈다. 허나 눈물은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

그녀였다.

그녀였다.

“꽃……님이…… 아줌마…….”

꽃님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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