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92화 (19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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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결국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에, 팝콘 통을 비웠다. 조금 남긴 했는데 더 손대지 않는 걸 보아 물린 것 같았다. 석주는 그것을 집어 자신의 발 아래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실내가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아진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영화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흘끔흘끔 석주를 곁눈질하게 됐다. 석주는 평소보다 느슨히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 영화를 본 적은 많지만 석주와 함께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경한 느낌이긴 했으나 ‘데이트’라는 특별한 말로 불리기엔 조금 모자랐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데이트야.

콧잔등을 찡긋거린 아진이 석주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근데요.”

“응.”

석주가 한쪽 어깨를 아래로 내리며 귀를 내밀었다. 아진이 소곤소곤 물었다.

“왜 영화 보는 걸 데이트라고 해요?”

“…….”

스크린을 향해 있던 석주의 시선이 아진에게 옮겨 왔다. 아진이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봤다. 어두운 사위에도 커다란 눈은 반질반질하게 빛이 났다. 그 눈을 지그시 보던 석주가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둡고, 가깝잖아.”

“가깝다는 건 그렇다 치고, 어두운 건 왜요?”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석주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 눈동자가 언뜻 평소와 달랐다.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석주가 아진과 자신 사이에 있던 팔걸이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아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아진은 얼떨결에 석주의 옆구리로 훅 빨려 들어갔다.

“이런 걸 할 수 있으니까.”

“…….”

“지금처럼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고.”

석주의 목소리가 몹시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꼭 그의 음성이 귓바퀴를 북북 긁는 것 같았다. 특유의 저음이 주는 저릿한 울림에 아진은 연신 목을 움츠렸다.

그간 내내 숙맥처럼 굴더니 갑자기 저돌적인 석주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아진은 단정하고 말수가 적으며 수동적인 석주보다 이런 석주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익숙하면 일단 편안했다.

잠깐 굳어 있던 아진이 석주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좋네, 영화관. 우리 영화관 데이트 앞으로 자주 해요. 이왕이면 맨 뒷자리에서.”

“……그래.”

석주가 아진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의 엄지로 그의 뺨을 슥 쓸어내렸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뺨이 눌리는 느낌이 매력적이었다. 가능만 하다면 영화 보는 내내 주무르고 싶은데, 아진이 미친놈 보듯 할까 두 번만 더 만지고 관두었다.

아진은 그 후로도 석주를 연신 훔쳐봤다. 영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색색으로 물드는 석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제 시선을 알아차리면 슬쩍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춰 주는데 그게 몹시…… 섹시했다.

영화는 자연히 흥미에서 멀어졌다. 수백억을 들여 만들었다는 영상도 석주의 미모에 비할 바가 안 됐다.

아진의 온 신경이 석주에게 몰려갔다. 몸을 붙이고 있는 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닌데. 그와 키스도 했고, 좆도 빨렸고, 한 침대에서 자기도 했는데. 하물며 전생의 석주와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짓을,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했는데 뭐가 이렇게 설레고 떨리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한참 석주의 얼굴을 감상하던 아진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온 그의 손을 쳐다봤다. 팔이 어찌나 긴지. 제 어깨를 감싸고도 남아돌았다. 전생과 달리 흉터 하나 없는 손은 단정하고 희었다.

아진이 슬쩍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석주의 손은 차가웠다. 열이 발씬거리는 제 손과는 상반되는 온기였다. 손등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손바닥까지 온통 차가웠다.

몇 번 석주의 손을 건드리던 아진이 석주의 눈치를 봤다. 석주는 큰 반응 없이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아진은 덥석 석주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양껏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쓰다듬고, 손등을 누르고, 단단한 손바닥을 간질이듯 지분거렸다. 넘실넘실 흘러오는 시원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문득. 석주가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이렇게 손이 찬 걸 보면 분명 손끝이 시릴 것이다. 아진은 전생의 경험으로 손이 찬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아진이 두 손으로 석주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석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진은 석주의 손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그를 곁눈질했다. 석주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진이 다시금 호오-, 입김을 불었다. 석주가 다시 움찔거렸다.

그와 몸이 맞닿아 있으니 그 떨림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입술이 장난처럼 손가락에 닿을 때면 숨을 참는 것도 선연히 느껴졌다. 그래 놓고 앞을 바라보는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게 제법 귀여웠다. 동시에 저 무표정을 부수고 싶다는 못된 욕구가 들었다.

아진의 뺨에 동그란 장난기가 차올랐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으며 연신 입김을 불었다.

근데 그 순간.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아진이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위로 영화 대신 과거가 상영되었다.

그 언젠가 꽃님이 죽고, 석주의 방에 머무르던 때가 있었다. 쏟아지는 시간이 괴로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청소를 시작했었지. 걸레로 마루를 박박 닦은 다음 수돗가에서 그것을 치대는데. 두루마기를 걸친 석주가 퇴근했었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응, 오늘도.’

‘…….’

‘내일도 일찍 올 거야.’

그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찬물에 손가락이 어는 듯해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석주가 제 손을 감싸 쥐어 왔다. 그 후 고개를 숙이고 호오……,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었다.

놀란 저는 손목을 뒤틀었다. 허나 늘 그랬듯, 석주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걸레…… 빨던 손인데…….’

‘비누로 씻었잖아.’

‘그래도…….’

그렇게 한동안 석주에게 손이 잡혀 있었다. 석주는 손등과 손가락에 입술을 비비기도 했는데, 그 덕에 차갑던 손이 순식간에 홧홧해졌다. 그 열기가 찢어지고 부서진 심장까지 뜨겁게 달구는 것 같아 손을 빼내려던 찰나. 석주가 절절한 음성으로 절 불렀었다.

‘아진아.’

‘…….’

‘나도 팔자고 운명이고 그런 거 잘 모르는데. 아진이 네가 사랑받을 팔자라는 건 맞는 것 같아.’

‘…….’

‘너는 몹시…… 사랑스럽거든.’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저를 응시해 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래서 너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충만해. 행복하고, 기뻐.’

석주는 진심이었다. 정말 충만해서 넘쳐흐르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그러다 돌연,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그러니…… 이렇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계속.’

‘사장님…….’

‘너만 사랑하면서 살게. 너만.’

‘…….’

‘네 팔자에 있는 사랑, 그거 다 내가 줄게.’

석주의 애절한 음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과거를 관람하는 아진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엇나갔다. 영화의 거친 사운드 위로 석주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아진아, 보고 싶었어.’

‘…….’

‘그리고 보고 싶어…….’

계속 보고 싶어. 너를.

마지막 문장은 웅웅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진이 숨을 거꾸로 집어먹었다. 눈가가 뜨끈뜨끈했다. 쇳덩이라도 삼킨 것처럼 명치가 묵직했다. 석주의 감정은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무겁고, 버겁다. 아니, 시간의 흔적이 묻어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그땐 제 슬픔이 우선이었던 터라 그의 감정을 오롯이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석주가 저를 참 많이 사랑했구나, 싶었다.

물론 늦은 깨달음이다. 하등 쓸모없는 깨달음이다. 그걸 지금 알아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사람은 죽고 없으니까.

아진이 석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석주가 웃으며 어깨를 감싸 왔다. 아진이 그를 마주 보며 흐리게 미소 지었다.

석주는 이내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진은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화는 못 볼 듯싶었다.

* * *

집으로 가는 차 안. 아진의 핸드폰 위로 반짝 불이 들어왔다. 메시지가 온 거였다.

[어마마마(✿◖◡◗)❤

진아. 집에 일찍 와. 이모 옴.]

“엄마가 집에 일찍 오래요. 이모……가 왔다는데.”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며 ‘알았어’ 하고 답을 찍어 보냈다.

이모. 현생은 물론 전생에서도 입 밖으로 내어 본 적 없던 단어였다. 어쩐지 까끌거리는 입 안에 혀로 볼 안쪽을 핥았다.

제게 이모가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선화가 가장 자주 통화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그녀였다. 언니, 언니, 하면서 시답잖은 것부터 중요한 회사 일까지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곤 했다.

그 이모가 집에 놀러 온 모양이었다.

아진이 석주에게 ‘이모는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물으려는 찰나. 또 핸드폰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주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쭈혁쓰

주말에 스쿼시 ㄱ]

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주말이라는 단어 말고는 해석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주혁이한테도 메시지가 왔어요. 주말에 스쿠시, 스쿼-어시, 스쿼시를 기역……하재요.”

“…….”

“기역이 뭐야? 얘는 멀쩡한 한글 놔두고 왜 자꾸 이상한 말을 쓰는지 모르겠네…….”

아진이 흠, 하며 목으로 탁음을 내는데. 석주가 인상을 썼다.

“가지 마.”

그 말에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신호를 응시하는 석주의 눈가에 짜증이 스며 있는 게 보였다. 손톱으로 핸들을 긁어 대는 게 뭔가가 마뜩잖은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주혁의 메시지라든가, 주혁의 말투라든가, 주혁의 존재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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