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91화 (19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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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 내며 물었다.

“형은 뭐 좋아해요?”

“응?”

“좋아하는 거요.”

“좋아……하는 거?”

“네. 저는 아이스크림. 약과. 초콜릿. 콜라. 그런 거 좋아해요. 아, 에어컨도 좋아해. 형은요?”

석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좋아하는 거. 흔한 질문인데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답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회사 재무 상태를 물어봤으면 쉽게 대답해 줬을 텐데. 석주가 혀 위에 남은 쌉싸름한 커피 맛을 되뇌며 고민하는데. 아진이 고민에 도움을 주었다.

“이왕이면 내가 형한테 뭔가, 음, 사 줄 수 있는 거?”

“…….”

“아, 형도 롤렉스랑 파텍필립. 그거 좋아해요? 그거 사 줄까요?”

아진이 좋은 생각 아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에 아진이 발끈했다.

“왜 웃어요. 나 사 줄 수 있어요. 엄마가 그랬는데. 내 카드 한도 없다고. 세상에 못 살 게 없다고.”

“푸흐, 됐어. 그런 건 충분히 많아. 이미 네가 많이 사 줘서.”

“그래요? 내가 이미 사 줬다고요? 음…….”

예상치 못한 말에 아진이 목으로 신음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석주가 재차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봐?”

“어……. 우리 이제 연인이잖아요. 그건 되게 특별한 관계니까 뭔가 좋은 걸 해 주고 싶었어요. 드라마에서 보니까 돈 많은 주인공이 애인한테 뭘 많이 사 주더라고요.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옷도 사 주고, 차도 사 줬어요. 그러면서 이게 다 자기 관심이고 마음이라고…….”

“…….”

“저도 형한테 관심을 주고 싶어요. 마음도 주고 싶고.”

아진이 딸기 과육과 초콜릿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담뿍 떠먹으며 웃었다. 그 예쁜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석주가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로 마음을 표현하자면,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몇 없는데.”

“왜요? 형이 이거 사 줬잖아요.”

아진이 아이스크림을 들어 보였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따위 것으로 제 마음을 표현할 순 없었다.

“너무 하찮잖아.”

“하찮지 않은데. 지금이 내가 하루 중에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형이랑 밥 먹고, 아이스크림 먹는 거.”

아진이 샐쭉 천진하게 웃었다. 곱게 접히는 눈가에 햇살이 묻어났다. 석주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진이 그를 따라 멈춰 섰다. 그리고 입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굴리며 석주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석주가 목울대를 아래위로 크게 움직거렸다.

“나는…….”

“네.”

“네 넥타이 매 주는 거 좋아해.”

“…….”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다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깟 게 뭐라고. 분명 귀찮은 일인데 좋아하는 석주가 신기했다.

“그거 말고요.”

“글쎄. 다 좋아서 딱히 하나를 꼽기가 힘드네.”

“에이…….”

아진이 시시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석주가 옅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사사로운 것은 사사로워서 좋았다. 굳이 크고 비싸고 특별한 게 아니더라도 충분했다.

“그냥 이렇게 네 옆에 있는 게 좋아. 너랑 대화하는 것도 좋고, 네가 아이스크림 먹는 걸 보는 것도 좋아.”

석주가 단조로이 말을 잇는데. 이번엔 아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석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석주가 턱을 살짝 안으로 말았다. 등줄기가 단단해졌다. 혹 제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긴장이 됐다.

“왜 그래?”

석주가 물었다. 아진이 아이스크림이 묻은 숟가락을 쫍 빨며 입을 뗐다.

“우리요.”

“응.”

“회사 안 가면 안 돼요?”

“……뭐?”

“아니, 갑자기 가기가 싫네.”

긴장으로 굳었던 석주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어…….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요?”

예상과 달리 쉽게 나온 허락에 아진이 눈썹을 올렸다. 석주가 엄지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콩국수에 아이스크림에 차가운 걸 잔뜩 먹어 놓고도 뺨이 뜨끈뜨끈했다. 석주가 손바닥을 펼쳐 아진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근래 부지런하게 출근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아.”

“오……. 망나니처럼 산 게 이럴 땐 좋네요.”

“근데 어디 가려고? 피곤해? 아니면 더워? 일단 집으로 갈까?”

석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등을 굽히고, 아진과 눈을 맞추는데. 아진이 석주의 손을 잡아 왔다. 손바닥이 착 맞붙고, 손가락이 얽혔다. 그가 턱을 위로 올리며 비밀스레 속삭였다.

“우리 데이트해요.”

“……데이트?”

“네. 나랑 있는 게 좋다면서요. 그럼 데이트가 딱이지. 그것도 드라마에서 봤어요. 둘이서 밥 먹고, 가로등 아래에서 입 맞추고, 영화 보면서 손잡고,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고, 머리띠 하고 놀이동산 가던데.”

“…….”

“우리도 그거 해요. 데이트.”

이렇게 손잡고.

아진이 석주와 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해사하게 웃었다.

결국 석주는 아진의 고집에 따라 영화관으로 왔다. 평일 낮 영화관은 한산했다. 석주는 다급하게 비서실에 연락해서 저와 아진이 두 시간, 길면 세 시간 정도 부재중일 거라고 통보했다.

전화를 받은 명진은 ‘사장님이야 그렇다고 해도 강 비서님까지요? 비행기라도 타세요?’라며 놀란 기색이었으나 석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회사 째고 영화관에 데이트하러 왔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

코로 한숨을 내쉰 석주가 막간을 이용해 메일을 확인하는데. 네온사인이 요란한 영화관 내부를 구경하던 아진이 자신의 넥타이를 꾹꾹 잡아당겼다.

“둘 다 이런 차림으로 오니까 이상하다, 그죠. 집에서 옷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1950년대에도 극장은 있었다. 비록 아진은 그곳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딱딱한 복장으로 출입하는 곳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진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데. 석주가 그의 뒤통수부터 목덜미까지 가볍게 쓰다듬었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괜찮아. 뭐, 우리한텐 영화 보는 게 일이기도 하고. 온 김에 저거 보자.”

석주가 줄줄이 걸린 영화 포스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진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회사에서 제작한 거야. 나는 가편집본으로 봤는데, 아진이 넌 못 봤으니까 이번 기회에-”

“뭐야……. 우리 일하러 온 거 아니고 데이트하러 온 거거든요?”

아진이 눈을 홉뜨며 불만을 내놓았다. 석주가 핸드폰 모서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럼 다른 거 볼까?”

“…….”

“보고 싶은 거 있어?”

아진이 포스터를 훑어봤다. 그러다 대충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매표소로 향했다. 아진이 쫄래쫄래 그를 뒤따랐다.

허나 아진이 보고자 한 영화는 저녁은 되어서야 회차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석주가 보자고 했던 영화를 예매하게 됐다. 왠지 진 기분에 아진이 아랫입술을 말아 무는데.

“팝콘 사 줘.”

석주가 말했다.

“네?”

아진이 눈꺼풀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뭘 사 달라고?

“팝콘. 사 줘. 아진이 네가.”

석주가 매표소 옆에 붙은 매점을 가리키며 말을 반복했다. 그를 빤히 보던 아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급하게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자 석주가 아진의 재킷에서 그의 지갑을 꺼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아진이 성큼성큼 매점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전광판에 온갖 종류의 음식이 가득했다. 팝콘, 콜라, 핫도그, 나초, 아진은 맛도 모르는 것들이 잔뜩이었다.

아진이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대로 써 본 적은 없다만, 이 네모난 플라스틱 안에 돈이 들어 있다는 건 알았다. 드라마에서 몇 번 보기도 했고, 석주가 쓰는 것도 자주 봤다.

“뭐 먹고 싶어요. 내가 다 사 줄게요.”

아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석주에게 뭘 사 주는 건 처음이었다. 신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석주가 아진의 곁에 붙어서며 팝콘 메뉴 중 하나를 가리켰다.

“팝콘. 캐러멜 맛. 그게 달아. 네 입맛에 맞을 거야.”

“좋아요. 캐러멜 맛.”

아진이 매점 직원에게 카드를 찌르듯 내밀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당차게 말했다.

“캐러멜 맛 팝콘 주세요. 제일 큰 거로.”

“네, 캐러멜 팝콘 큰 거 주문받았습니다. 음료는 안 필요하세요?”

상냥하게 돌아온 질문에 아진이 냉큼 대답했다.

“제일 비싼 거요.”

“비싼, 비싼 거요…….”

직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음료 몇 개를 줄줄이 읊어 주었다.

“핑크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티 있습니다. 그걸로 드릴까요?”

아진이 “어, 아이스…….” 하고 말을 끌었다. 잠깐 석주를 눈짓한 그가 다시 물었다.

“따뜻한 건 없어요?”

그 말에 석주가 자신의 입가를 쓰다듬으며 꾹 웃음을 삼켰다.

극장 내부는 조용했다. 관객도 몇 없었다. 석주와 아진은 가장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진은 팝콘을 야금야금 먹으며 극장 안을 구경했다. 수백 개가 훌쩍 넘는 푹신한 의자와 바다만큼이나 큼지막한 스크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진의 팔걸이에 핑크 레모네이드를 꽂아 준 석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울지도 몰라. 우리만 있는 게 아니어서 에어컨 온도를 따로 조절할 수가 없어. 일찍 알았으면 미리 영화관 쪽에 이야기해서 관 하나를 비웠을 텐데 그게-”

“괜찮아요. 형 있잖아.”

“…….”

“형 있으면 안 더워요.”

아진이 히히, 하고 아이처럼 웃으며 팝콘을 한 주먹이나 입에 넣었다. 고급 슈트를 번지르르하게 입고 있으면서, 웃는 꼴은 몹시도 천진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던 석주가 픽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석주는 이따금 아진이 입으로 들이미는 팝콘을 받아먹으며 수북이 쌓인 사내 메신저와 메일을 확인했다. 그러고 있으니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진이 호오오, 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팝콘을 집어 먹는 손은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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