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90화 (190/261)
  • 190

    “여자 친구라면…….”

    “애인 말이야.”

    “……제가요? 애인이 있었다고요?”

    아진이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캐물었다.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던 그가 석주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감싸 쥐었다.

    “왜요?”

    희한한 질문이었다. 너 애인 있었어, 라는 말에 왜요, 라니. 석주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떼는데.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고는 질문을 고쳤다.

    “아니, 근데 왜 지금은 없어요?”

    “딱히 이성에게 흥미가 없으니까.”

    “근데 여자 친구 있었다면서요.”

    “있긴 했는데, 한 달 이상 만나질 않았어.”

    “뭐야, 그게?”

    아진이 떨떠름하게 입술을 뒤틀었다. 애인이 있긴 있었는데 여자한테 크게 관심도 없었고 제대로 만나지도 않았다? 아진이 흠, 하고 목으로 탁음을 내며 고심했다. 혹시 또 그건가. 석주 괴롭히기. 그 뭐더라, 아, 그래. 사디스트처럼? 애인이 생겼다고 석주를 놀려 먹기라도 한 건가.

    아진이 심각하게 과거 아진의 심중을 파악하는데. 석주가 슈트 재킷을 입혀 주었다. 아진이 재킷에 팔을 꿰며 말했다.

    “그럼 뭐 형이 처음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우리 연애가 한 달을 넘기면, 그래도 되겠지.”

    석주의 말투가 평소와 은근히 달랐다. 짜증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출근하자.”

    석주가 드레스 룸 문을 열며 말했다. 아진은 대충 핸드폰만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향하며, 또 종알종알 궁금한 것을 쏟아 냈다.

    “형은요? 형은 연애해 봤어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해 봤으려나?”

    “아니, 아진이 네가 처음이야.”

    단호한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아진이 흐흐, 하고 웃었다. 기분 좋은 대답이었다. 저는 처음이 아닌데, 석주는 처음이라. 승부도 아닌데 이긴 듯한 유치한 감정이 들었다.

    구두를 신은 두 사람이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익숙한 생김새의 차가 보였다. 석주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아진이 차에 올라탔다. 석주는 운전석에 타서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었다. 아진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석주는 멋진 남성이다. 사내인 제가 보기에도 멋진데, 여자들 눈에 멋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근데 어째서 연애가 처음일 수가 있나. 대체 어떤 생을 살아왔기에 저 얼굴을 가지고, 저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했나.

    “벨트 해.”

    석주의 말에 아진이 안전띠를 쭉 당겨 달칵 채웠다. 곧 차가 출발했다. 아진이 석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형에 대해서 말해 봐요.”

    “나에 대해서?”

    “나는 형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서요. 형은 내 주민등록번호까지 안다면서요.”

    “어…….”

    석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뜸 자신에 대해서 말해 보라니 어디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먼저 나열해야 하는지 어려웠다. 그에 아진이 기본적인 것부터 물었다.

    “가족은요? 부모님은? 형제자매는?”

    “없어.”

    “뭐가요?”

    “가족도,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없다고.”

    “…….”

    “아버지는 날 때부터 없었고, 어머니는 신장이 좋지 않으셨는데, 이식을 받지 못해서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

    “…….”

    아진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 제가 너무 경솔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석주의 인간관계가 매우 협소하다는 걸 추론할 수 있었다. 스물네 시간, 온종일 저와 붙어 있으면서 가족에 대해 언급한 적도, 누구와 사적으로 통화하는 것도 못 봤으니까.

    괜히 물었다.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물며 눈을 굴리는데. 석주가 핸들을 돌리며 능숙하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스무 살 때까지 방황했지.”

    “방황이요?”

    “잘 포장해서 방황이고 적나라하게 말하면 깡패 짓.”

    “…….”

    깡패. 익숙하나 반갑지 않은 단어에 아진이 딱딱하게 굳었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손이 꾹 말렸다. 그런 아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주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자신의 비루한 삶을 나열해 갔다.

    “딱히 배운 것도 없고, 학교도 흥미가 없고, 그래도 몸은 쓸 만해서 이것저것 못된 짓을 좀 했어. 그땐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괴롭던지. 뭘 자꾸 부수고 싶고 무너트리고 싶더라고.”

    “…….”

    “근데 다행히, 미성년자였던 터라 못된 짓도 한계가 있어서 빨간 줄은 없어. 작은 조직의 심부름꾼 정도였거든.”

    석주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히 당기며 조소했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섰다.

    아진이 검지로 귀 아래를 긁으며 더듬더듬 물었다.

    “엄마, 엄마가 형 되게 좋은 학교 나왔다고 했는데……. 공부도 무지 잘했다고…….”

    “스무 살에 공부를 시작했어.”

    “스무 살에요?”

    “응. 악착같이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대학교에 입학했고.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에 장학금에 과외까지, 뭐 이것저것 해서 무사히 졸업했지. 회장님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아진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깡패였다가, 공부해서 대학생이 됐다니. 영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왜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았나. 무슨 계기로 깡패 짓을 하다가 공부를 시작했을까.

    “갑…… 자기 공부는 왜 했는데요?”

    “찾아갈 방법이 그것뿐이어서.”

    석주가 핸들에 손목을 걸치며 말했다. 전방을 향해 있는 눈이 아주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에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뭘 찾아가는데? ……꿈? 이상? 그가 석주의 설명을 기다리며 눈을 끔뻑이는데. 석주가 흐리게 웃으며 아진을 바라봤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깡패, 양아치, 그런 거 말고.”

    “좋은…… 사람…….”

    “잘한 일이지. 그 덕에 아진이 널 만났으니까.”

    아진이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는 사이 차가 다시 출발했다. 얼마 안 달린 것 같은데 금세 회사가 나타났다. 독립한 집은 본가와 달리 회사가 가깝다더니. 정말이었다.

    차는 부드럽게 돌아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아진의 전용 칸에 차를 댄 석주가 시동을 껐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진은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채 고민하고 있었다.

    석주가 흘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출근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다. 아진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아진의 늘씬한 허벅지 위로 늘어진 하얀 손을 흘끔거리는데. 아진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왜. 실망했어? 내 과거가 방탕해서?”

    긴장한 석주의 목울대가 뾰족하게 도드라졌다. 아진이 묘하게 핏기가 가신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그냥…… 제가 알던 사람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태초부터 없던 아버지. 병환에 돌아가신 어머니. 깡패였던 석주. 제가 알던 그 석주와 너무할 정도로 판박이였다. 지금 그가 깡패가 아니라는 건 달랐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

    당신은 그 사람과 얼굴과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구나. 곽창두처럼 전생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그럼 당신은 그 사람일까. 진정 그 사람일까.

    덮어 둔 의문이 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데. 석주가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그리고 무딘 난도질로 붉어진 아진의 입술을 슬쩍 아래로 잡아당겼다. 깨물지 마. 다정한 타박이 더해졌다.

    “비슷했으면 좋겠어?”

    그가 물었다.

    “아니요.”

    아진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눈동자가 경직되어 있었다. 무언갈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진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달랐으면 좋겠어요.”

    “…….”

    “저 그 사람 되게 싫어하거든요.”

    석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버석하게 마른 미소를 띠었다.

    “……다를 거야, 아마. 걱정하지 마.”

    아진이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뭣도 모르면서 단언하는 게 같잖았다. 뭔지 알고. 가늠조차 못 하면서. 전생을 들먹거리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혀를 찰 거면서. 뭘 안다고 다르대.

    근데 사람 마음이 이상하게도, 석주가 저리 말해 주니 은근히 안심이 됐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이제 출근해요.”

    그렇게 말한 아진이 안전띠를 풀었다. 그 후 차 문까지 여는 찰나. 그가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네?”

    “좋아해.”

    난데없는 고백이었다. 분위기와도 맞지 않았고, 문맥과도 맞지 않았다. 아진이 멀뚱멀뚱 석주를 쳐다보는데. 석주가 빙긋 웃으며 다시 마음을 전했다.

    “좋아해, 정말.”

    아진은 한동안 석주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거운 입꼬리를 당겼다.

    “저도요, 형.”

    말을 마친 아진이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뒤엉킨 시간에 멀미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 * *

    오전 내내 일에도 드라마에도 집중하지 못하던 아진은 점심으로 얼음이 잔뜩 올라간 콩국수를 먹고서야 활기를 되찾았다. 시원하고 고소한 게 없던 입맛도 되찾아 주는 맛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석주는 김이 폴폴 올라오는 만둣국을 먹었다.

    그 후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더위에 가게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매일같이 들르는 곳이라 아진은 이제 메뉴를 보지도 않고 좋아하는 맛을 턱턱 골라냈다.

    아이스크림이 묵직하게 든 컵을 받아 든 아진이 배시시 웃었다. 석주가 살짝 흐트러진 아진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따라 웃었다. 그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산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고, 반대 손에는 아진이 벗은 슈트 재킷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회사로 복귀했다. 석주는 연신 아진을 흘끔거렸다. 쨍한 햇살 아래,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아침에 제가 매 준 넥타이를 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는 아진은 눈이 부실 만큼 반짝인다. 예쁘고, 아름답고, 귀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이 더위에 점심시간마다 그를 끌고 나오는 중이다. 예전에는 사장실로 본식부터 후식까지 죄 사 갔었는데. 아진의 기억이 돌아오면 된통 혼날지도 모르겠다.

    석주가 커피를 홀짝이는데. 아진이 그를 불렀다.

    “형.”

    “응.”

    석주가 얼른 대답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