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9화 (18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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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방해하길 해, 괴롭히길 해. 이곳엔 진걸도 없고 기헌도 없는데. 연애 그깟 거. 주혁은 아홉 번이나 헤어지고도 다시 한다는 그거. 못 할 건 또 뭔데.

구태여 문제를 찾자면, 제 가슴에 박힌 가시와 총알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과 상관없잖아.

아진이 석주를 곧은 눈으로 직시하는데. 석주가 한숨처럼 말했다.

“사장님. 연애라는 건-”

“나도 그게 뭔지 알아요.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거지, 바보는 아니란 말이야.”

아진이 날카로이 말을 쐈다. 석주의 언사에서 부정이 느껴졌다. 기분이 나빴다. 짜증이 났다. 석주가 저를 밀어 내는 것 같아서.

당신이 어떻게 감히, 어떻게 날. 그런 분노가 먼저 솟구쳤다. 바로 직전에 눈앞의 석주와 전생의 그 석주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그어 놓고. 아주 이랬다가 저랬다가 모순의 연속이었다.

화를 내니 또 열이 치밀었다. 찐득하게 치미는 기분 나쁜 열기에 아진이 훅 숨을 내뿜는데. 석주가 아진의 옆에 한쪽 다리를 굽히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장님, 저 좋아하십니까?”

아진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언뜻 들으면 서정적인 질문이었지만, 아진은 석주를 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당황하라고 한 질문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으면 대답을 피할 걸 알아서. 그 틈으로 이 순간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아주 영악하고 못된 질문이었다.

아진은 잠시 석주를 노려보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어깨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입을…… 맞추고 싶었어요. 형한테.”

“…….”

예상치 못한 진솔함에 석주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진이 발끝으로 의자를 당겨 석주에게 바짝 붙었다. 허리를 숙이며 그와 지그시 눈을 맞추고, 진심을 전하려 애썼다.

“형이랑 같이 있고 싶고, 형이 없으면 불안해요.”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그의 가슴팍과 어깨가 깊게 들썩거렸다. 아진의 감정이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촘촘히 짙게 박힌 석주의 속눈썹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아진을 당황시키려 한 질문인데, 그 당황이 곱절에 곱절이 되어 돌아왔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그가 어렵게 평정을 되찾았다.

“아진아.”

“…….”

“잘. 판단해야 해. 잘.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석주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석주의 검은 눈동자가 아진을 봤다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진의 허벅지 위에 느슨히 늘어진 하얀 손을, 깨끗한 손목을 보던 석주가 느리게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다른 이유라면 뭐요?”

“며칠 전의 사건 때문에 혼자인 게 불안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여름이라 너무 더워서 그럴 수도 있고, 근 며칠 내린 비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할 수도 있고, 기억이 뒤엉켜서 혼란스러워 그런 걸 수도 있어.”

석주가 지극히 아진을 추슬렀다. 그 말을 잠자코 듣던 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석주가 저를 참 어리게 보는구나 싶었다.

“형.”

“…….”

“나 형 좋아해요.”

“……아진아.”

“나는 내 감정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몰라요.”

아진이 조곤조곤 똑 부러지게 말했다. 석주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혼란과 갈등이 뒤섞인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진이 돌연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형이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전생의 석주든, 눈앞의 석주든 제게 지나치게 맹목적이어서. 그가 절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하등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건 큰일인데. 어쩌지.

아진이 흠, 하며 뺨을 긁적이는데. 석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 말에 아진의 낯이 밝게 갰다.

“그럼 형도 나 좋아하는 거예요?”

순진한 질문에 석주가 옅게 웃었다. 그가 아진의 손을 잡아 작은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고 있자니 여태 잘 감추어 왔던 감정이 불쑥 솟구쳤다.

“항상. 항상 그랬어. 항상 좋아했어. 항상 사랑했어.”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천박한 입술이 주제도 모르고 아진에게 사랑을 나불거렸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너를 모르던 순간에도 너를 사랑했고, 널 볼 수 없을 때도 널 사랑했고, 널 만난 후로는 모든 시간 단위로 너를 사랑했어.”

석주는 구역질하듯 마음을 토해 내다, 얼른 어금니를 겹쳐 물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이성을 갈무리한 그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진을 우러러보았다.

“다만…… 겁이 나서 그래.”

“…….”

“두려워. 많이.”

석주의 눈썹이 아래로 늘어졌다. 서글픈 얼굴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눈가가 파리해지기도 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의자에서 내려와 석주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색이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선상에 위치했다.

아진이 석주의 광대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뭐가 겁이 나는데요.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입을 보아 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지그시 아진을 응시하기만 했다.

답답할 만도 한데, 아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석주가 무서워하는 걸 제가 어떻게 해결해 주겠나. 그래도 같이 있어 줄 순 있었다. 그의 두려움을 함께 맞서줄 순 있었다.

“형이 뭘 겁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으면 좀 덜 무섭지 않겠어요?”

“…….”

“그러니까 우리 연애해 봐요.”

아진이 빙긋 석주를 보며 웃었다.

무슨 걸림돌이 있든 간에, 제가 그를 좋아하고. 그가 저를 좋아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다른 걸 재고 따지고 걱정해 봐야 운명은 그렇게 평이하게 우리에게 닥쳐오지 않는다. 때로는 사사로운 파도로, 또 때로는 숨이 막히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 만큼 거친 파도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근데 어째선지 그게 두렵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터라.

그 파도에 휩쓸린 우리가 부서지고 침몰한대도 괜찮다. 그건 그때 가서 괴로워하면 될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그 파도가 들이닥치기 전에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행복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아진은 전생에서 누리지 못했던 사랑과, 전생에서 만끽하지 못했던 행복이 고팠다. 그걸 다 가지고 싶은데, 그러려면 석주가 필요했다. 석주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 나는.

당신을 잃지 않을 생각이다.

* * *

아진은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먹어 치웠다. 어쩜 그렇게 차갑고 보드랍고 달콤한지. 아주 삼시 세끼를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 후엔 느긋하게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석주가 미리 골라 둔 슈트가 드레스 룸에 걸려 있었다. 얼음 하나를 입에 문 아진이 와이셔츠를 입고 단추를 끼웠다. 처음 슈트를 입을 땐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번지르르한 제 모습이 마음에 퍽 들기도 했다.

아진이 막 마지막 단추를 채우는데. 똑똑 노크 소리에 뒤이어 석주가 나타났다.

아진이 거울 너머로 그에게 눈짓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이었다. 그에 석주가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옆에 와 섰다.

“넥타이…….”

“넥타이요?”

아진이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넥타이가 왜. 오늘 석주가 골라 놓은 타이는 사선으로 굵직하게 패턴이 들어가 있고, 그 위로 명품 로고가 은근히 프린트된 것이었다. 아진이 들어 보이는데 석주가 그것을 슬쩍 잡아당겼다.

“넥타이. 내가 해 주고 싶어.”

“…….”

“원래 내가 하던 거니까.”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곧 푸흐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석주는 민망한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으나 넥타이를 손에서 놓진 않았다. 아진이 타이를 쥔 석주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를 놀렸다.

“연애 시작하고 처음 하는 말이 넥타이 해 주고 싶어라니.”

“…….”

석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본인이 하는 행동이 ‘꼴값’인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하고 싶은걸. 아진이 대학생 때부터 그가 타이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손수 해 주었었다. 첫 출근 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쭉 그랬다. 그것은 석주가 독점한 일이었다.

아진이 직접 넥타이를 맬 수 있게 된 게 말도 못 하게 섭섭하고 아쉬웠는데. 연애까지 하게 된 지금. 그 정도 욕심을 부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매 줘요.”

다 녹은 얼음을 꿀꺽 삼킨 아진이 석주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소 지은 석주가 아진의 셔츠 깃을 올렸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 주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단정한 손가락에 천이 걸렸다가, 말렸다가, 미끄러졌다.

근데 아진이 자꾸 비싯비싯 웃음을 흘렸다. 석주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괜히 민망해진 석주가 핀잔하듯 읊조렸다.

“왜 자꾸 웃어.”

“좋아서요.”

주춤거림 없이 답한 아진이 석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특유의 반짝거리는 청색 눈동자로 석주를 올려다보았다.

“저 연애 처음 하거든요.”

“…….”

“아니, 처음 할걸요?”

“…….”

석주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부끄러움과 즐거움이 보기 좋게 섞여 있던 얼굴이 차분해졌다. 가까운 거리라 아진은 그 변화를 놓치려야 놓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아진이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처음…… 하죠?”

그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석주의 넥타이 매기가 끝났다. 넥타이 끝을 아래로 살짝 잡아당겨 모양을 잡아 준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학생 때 두 번, 여자 친구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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