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8화 (18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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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다고 다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어. 한선화 님의 철부지 막내아들. 대가리 꽃밭. 할 줄 아는 거라곤 돈 낭비뿐인.’

아진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통을 가리켰다. 선화가 소파 깊숙이 등을 묻으며 쯧쯧 혀를 찼다.

‘욕심이 그렇게 많아서 어째.’

‘그러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좀 과해. 그렇지?’

‘너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아주 하찮은 것부터 아주 비싼 것까지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든 가지려고 하고. 울고, 떼쓰고, 화내고……. 네 형이랑 누나가 수더분해서 다 져 줬기에 망정이지…….’

‘좋은 형과 누나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도 어릴 때는 자질구레한 것들이라 그냥 그냥 넘어갔는데, 요즘은 차에 명품에…….’

‘엄마가 돈이 많아서 다행이야.’

심드렁한 음성에 선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며 보기 좋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다. 내가 돈이 이렇게 많은데, 내 새끼가 갖고 싶다는 거 못 사 줄 이유는 또 뭐냐. 사. 다 사. 또 갖고 싶은 거 없어?’

선화가 빈정거림을 담아 물었다. 아진은 눈치 없는 반푼의 얼굴을 연기하며 목으로 탁음을 냈다.

‘음……. 하나 있긴 한데.’

‘뭔데. 또 차야?’

‘아니.’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엉금엉금 선화의 앞으로 기어 와서는 그녀의 허벅지에다 얼굴을 올렸다. 말갛고 철없는 만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선화가 사랑해 마지않는 얼굴이었다.

아진이 큼지막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소곤소곤 말했다.

‘강석주.’

‘……석주?’

‘응. 강석주가 갖고 싶어.’

‘그건 엄마가 못 사 주는 건데.’

‘그럼 같이 살래. 석주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

어딘가 아집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무도 그러지 말라고 안 했는데, 거절했다간 발을 구르며 울기라도 할 기세였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운지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늘 그랬다. 아진은 석주와 관련한 일이면 항상 이렇게 사족을 못 썼다.

선화가 아진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냥. 떨어지기 싫어서. 형 엄마 회사에 취직한 이후로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봐. 일주일에 다섯 번 겨우 보나. 그것도 길게 못 봐. 그게 존나 짜증 나. 대체 취직은 왜 시킨 거야?’

‘어떻게든 너랑 붙여 두려고 시켰지.’

‘이게 무슨 붙여 두는 거야. 진짜 붙여 두려면 내 몸종, 어? 그런 걸 시켰어야지.’

‘얘는 요즘 세상에 무슨 몸종이야. 그리고 석주는 내가 낚아채지 않았으면 다른 회사에 취직했을걸? 그 학벌에, 그 성적인데? 그럼 일주일에 다섯 번은 무슨. 한 번도 제대로 못 봤을 거다.’

그 말에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입술은 안으로 모으고, 눈썹은 살짝 올린 그 표정이 어찌나 귀여운지. 선화가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눈가를 문질렀다. 아진이 한쪽 눈을 어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건 그렇네. 역시 우리 엄마 똑똑하다.’

‘엄마는 항상 계획이 있지.’

‘그래도 전만큼 얼굴 자주 못 봐서 짜증 나. 요즘 잠도 잘 못 잔다고. 강석주 없어서.’

‘어머, 그래? 어쩐지. 눈 밑이 거뭇거뭇하더라.’

선화의 낯에 대번에 걱정이 스몄다. 아진이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슬쩍 원하는 것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응.’

‘나 석주 형이랑 독립하면 안 돼?’

‘뭐?’

‘형을 우리 집에 살게 하면 불편할 거 아니야. 얹혀사는 기분 들어서. 그러니까 그냥 내가 형이랑 나가서 살게.’

그 말에 선화의 입술이 뒤틀렸다. 아진이 고개를 안으로 말고 애교 떨 준비를 했다. 선화가 허락해 주지 않을 거라 예상한 탓이었다. 근데 선화가 전혀 예상 밖의 답을 내놓았다.

‘……너랑 둘이 사는 것도 석주는 충분히 불편할걸? 네가 좀 예민하니. 까다롭고, 싸가지도 없고……. 어쩜 정진이랑 미진이랑 똑같이 키웠는데 너만 이렇게-’

‘아, 엄마! 너무한 거 아냐!’

아진이 홱 몸을 뒤로 물렸다. 선화가 깔깔 자못 방정맞게 웃으며 아진의 뒤통수를 잡아 다시 자신의 허벅지로 끌고 왔다. 아진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로 얼굴을 갖다 댔다.

선화가 그의 결 좋은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사랑스러운 아들의 머리카락은 그저 머리카락일 뿐인데도 감동적이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이라 더 그랬다.

‘독립하고 싶으면 해라. 집은 엄마가 구해 줄게. 근데 석주 허락은 네가 알아서 받고.’

‘뭐야.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준다고?’

‘독립이 별거니. 정진이랑 미진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유학 가서 살았는데, 뭐. 거기다 같은 서울 바닥이면 독립도 아니지. 근데 석주가 좋다고 하겠어?’

‘강석주 무조건 오케이 해. 형은 내 말이면 다 들어줘.’

선화가 설마 그러려고, 하는 표정으로 아진을 내려다봤다. 그에 아진이 바닥에 엎어져 있던 핸드폰을 쥐어 보란 듯이 석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이어지더니 이내 툭, 하고 끊겼다. 곧 석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진아.

그리고 꿈속의 아진은.

‘형.’

-무슨 일 있어? 형 지금 미팅 가는 길인데. 조금만 이따가 다시 전화해도 될까?

‘아니, 안 돼.’

-하아……. 무슨 일인데.

‘응, 별건 아니고. 형. 나랑 살래?’

-……뭐?

‘동거하자 나랑. 둘이서.’

-…….

‘왜 대답이 없어.’

-갑…… 자기 왜.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요즘 얼굴도 잘 못 보잖아. 나 어제도 잠 못 잤어. 엊그제는 코피도 흘렸어. 막 콸콸 흘려서 눈앞이 핑 돌더라. 다 형 때문이야. 형이 없어서 그래.’

-코피? 또? 병원엔 갔어?

‘병원에 가서 뭐 해. 형이 없어서 그렇다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자주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아. 형 회사 관두라는 소리 이제 안 할게. 대신 같이 살자. 그럼 하루에 한 번은 어떻게든 볼 거 아냐.’

-…….

‘빨리 대답해. 빨리. 같이 살 거지? 나랑?’

-…….

‘아이, 혀-엉. 석주 혀엉. 나랑 살자. 응?’

-……그래.

‘진짜?’

-응. 같이…… 살자, 아진아.

손쉽게 석주를 가졌다.

* * *

아진은 석주가 자신을 피할 줄 알았다. 입 맞춘 후 줄행랑을 쳤으니 당연히 불편하지 않겠나.

근데 월요일 아침. 석주는 무표정한 얼굴의 강 비서로 나타났다. 옷을 챙겨 주었고, 차를 운전했고, 아진이 알아야 할 오늘 일정을 간단히 알려 주었으며, 사장실까지 데려다줬다.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꼭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아니, 진짜 그 일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쯤 되니 되레 아진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결국 꾸벅 인사하고는 사장실을 나서는 석주를 말로 잡아채고야 말았다.

“우리 키스 처음 하는 거 아니에요?”

석주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뒤를 돌았다.

“아닙니다.”

예상외로, 석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진의 눈썹이 위로 비죽 올라갔다.

석주는 어제 키스하고, 아진에게서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아진이 제 뺨을 때리는 상상까지 했다. 입맞춤의 시작은 그였지만, 제 잘못이라 하면 제 잘못이라고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득했던 키스를 상기한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는데. 아진이 다시 물었다. 오히려 놀란 건 그였다. 키스가 처음이 아니라니.

“그럼 종종 했었단 말이에요?”

“그것…… 도 아닙니다.”

“그러면요?”

석주가 짧게 숨을 끊어 냈다. 그리고 고저 없는 음성으로 그와 닿았던 입술을 열거했다.

“세 번 했습니다. 첫 번째는 사장님이 술에 취하셔서. 두 번째는 제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싶다는 장난으로. 세 번째는 화풀이로.”

“……화풀이요?”

“예. 물어뜯다시피 하셔서 제 아랫입술이 터졌었습니다.”

아랫입술에 찍히던 아진의 치아를 상기한 석주가 혀로 입가를 슬쩍 핥았다. 주책맞게 아랫도리에 열이 몰려서 시선을 허공으로 흩뿌려야 했다.

“…….”

아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물어뜯었다고?

와……. 나 상 또라이였구나.

매일 꾸는 꿈으로 말미암아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는데. 석주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놀라웠다. 동시에 수치스러웠고.

아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댔다. 그러다 한쪽 얼굴을 가린 채 석주를 쳐다봤다.

“그래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예?”

“벌써 세 번이나 했으니까, 이번이 네 번째니까, 여태 그랬던 것처럼 없던 일로 칠 생각이냐고요.”

그 말에 석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진의 말을 곰곰이 되뇌던 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없던 일로 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야…….”

무어라 말하려던 아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딱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제가 뭘 기대했더라. 무엇을 원했더라.

그냥…… 그냥, 수십 년 전 장대비가 쏟아졌을 때처럼. 저와 석주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때처럼. 그와 저의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랐다.

사장님과 종이 아닌, 비서와 사장님이 아닌 다른 관계가 되길 기대했단 말이다. 조금 더 특별하고, 애틋하고, 서로와 서로가 하루의 중심이 되는 그런 관계.

그래서 그게 무슨 관계냐면……. 아진이 입술을 겹쳐 무는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석주가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저랑 연애라도 하시려고요?”

“…….”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연애. 제가 원했던 게 그건가. 석주와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걸까. 제가 그에게 느끼는 욕심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런 거였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석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어 주는 게 싫고, 함께하지 않는 게 싫고, 그와 입 맞추고 싶은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아진이 책상 위로 손을 가볍게 포개며 되물었다.

“연애 그거, 하면 안 돼요?”

“…….”

“안 될 건 또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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