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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84화 (18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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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은 어김없이 꿈을 꿨다. 근데 여태 꾼 꿈과 자못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꾼 꿈은 기억이었다. 겪었던 일을 장면 장면 보여 주던 기억. 근데 오늘 꾼 건 정말 꿈이었다. 온전한 꿈, 상상 그 자체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석주와 섹스를 했기 때문인데…….

    뭐 여기까지야 그래, 그와 함께한 밤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도 있었다. 근데 문제는 상대가…… 둘이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전생의 석주와 현생의 석주가 모두 있었다. 저는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서 온갖 음탕한 짓을 다 당했다. 두 사람의 커다란 손에 주물러지고, 빨갛고 뜨거운 혀에 빨리고, 거대한 구렁이 같은 좆들에 박히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이리로 도망가도 석주가 있고, 저리로 도망가도 석주가 있어 옴짝달싹 못 했다. 제가 겪은 그 어떠한 음란한 꿈보다도 난잡하고 질척했다.

    그러고 잠에서 깼는데 어찌나 넋이 빠지던지. 땀에 푹 젖은 머리칼이 찝찝하다기보다는 부끄러웠다. 대체 꿈에 얼마나 집중했으면 이렇게까지 땀을……. 거기다 발기한 아랫도리는 또 어떻게 해야…….

    아진은 벌떡 솟구친 제 바지춤을 바라보다, 냅다 욕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몸이 차게 얼 때까지 물을 맞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밖으로 나왔다. 전자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켰고, 고요한 방 가득 빗소리가 차 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아진이 젖은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근데 그렇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또 열기가 치밀어 올라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벌러덩 누웠다.

    “하아…….”

    아진이 크게 마른세수를 했다. 피가 끓는다. 피 끓는 청춘의 혈기가 왕성함을 나타내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끓었다. 물처럼 시원하게 끓는 것도 아니고, 죽처럼 묵직하고 걸쭉하게 끓는다. 핏줄 안에 열선이 깔린 것 같았다. 거기다 바글바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진은 에어컨 바람에 집중하며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가득한 석주와, 그의 나신과, 저를 내려다보는 진득한 시선을 어떻게든 죽여 보려 했다.

    자야지. 자야 해. 자자. 제발. 인제 그만. 자고 싶어.

    그렇게 바라며 눈을 꾹 감는데. 끝내는 잠드는 것에 실패했다. 음탕한 상념만 점점 더 커졌다.

    “씨발…….”

    팔로 눈두덩을 가린 아진이 욕설을 읊조렸다. 그러곤 벌떡 일어났다.

    서재로 가자. 책을 봐야겠다. 드라마를 봐도 좋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야 뭐든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아진은 할랑한 홈웨어 바지에 품이 넉넉한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방을 나섰다. 발걸음이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큼지막한 컵 가득 얼음을 펐다. 그 후 얼음 하나를 입 안에 달그락달그락 굴리며 서재로 가는데. 길목에 석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진이 다급하게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아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다 질끈 눈을 감으며 자책했다.

    숨긴 왜 숨어. 제가 그런 꿈을 꾼 걸 석주가 알 리도 없고.

    이를 악문 아진이 발뒤꿈치를 덜덜 떠는데, 석주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떨리던 다리가 우뚝 멎었다. 모퉁이에 붙어선 아진이 얼굴 반절을 슬쩍 바깥으로 내밀었다.

    석주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이, 한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는 걸 보아 부엌에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는데. 그의 입가에 어스름히 뜬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히 보던 얼굴이었다. 회사에서 내내 저 얼굴이니까. 그보다 머리 두 개가 작은 여자들한테 저렇게 웃어 준다. 하물며 남자한테도 빙긋빙긋 잘 웃는다.

    그래. 그때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여자한테도 웃었었지.

    잊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불쾌함과 짜증이 동시에 솟구쳤다.

    석주는 쓸데없이 잘생겨서, 쓸데없이 다정하고, 쓸데없이 친절하다. 아무리 전생의 석주와 다른 인물이라도 그렇지. 너무 딴판이었다.

    명진과 친하지 않으면 뭐 하나. 세상 사람들이랑 다 친한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희진 씨도 늦은 시간에 일하고 계신 건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석주가 몸을 반쯤 옆으로 돌렸다. 그러다 나른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처리하시면 될 것 같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월요일에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석주가 짧은 인사와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늦은 밤이라 부드럽게 내려온 머리칼이 그의 손길을 따라 차르르 움직였다.

    그것을 보던 아진이 무표정을 연기하며 복도로 들어섰다.

    “왜 그렇게 잘 웃어요?”

    “……사장님? 안 주무셨어요?”

    갑작스러운 아진의 음성에 석주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은 그가 성큼성큼 아진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아진은 우뚝 멈추어 서서 그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비스듬히 선 그가 못마땅하게 석주를 올려다봤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왜 그렇게 잘 웃냐고.”

    “……제가요?”

    “네. 비서님이요.”

    “잘…… 웃는 편은 아닌데요.”

    석주가 입가를 매만지며 부정했다. 아진의 눈이 새치름하게 뜨였다.

    “그렇지. 내 앞에선 잘 안 웃죠. 근데 회사 사람들한테는 되게 잘 웃는 것 같아서. 목소리도 나긋하고, 친절하고.”

    “어……. 그것도 제 일이다 보니.”

    “여자랑 하하 호호 웃는 게 일이라고요?”

    그런 게 일이라니. 네가 남창이야 뭐야. 아진은 비죽 솟아오른 못된 말을 간신히 삼켜 냈다. 석주에게 남창이냐고 비아냥거리다니. 보통 때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말인데. 제가 진짜 원래의 아진과 섞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술 맞게 뒤틀린 아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사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떤 소문이 도는지 알려면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합니다.”

    “수고요? 웃는 게 수고예요?”

    “예. 웃고 싶지 않은데 웃는 건 수고지요.”

    “…….”

    “사내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야, 직원들이 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회사 경영 방향을 잡기도 쉽습니다. 요즘은 고객만큼 중요한 게 직원이라서요.”

    “…….”

    “그 밖에도 사장님 사람으로서 제가 타인에게 친절해서 나쁠 게 없습니다.”

    “사장님 사람…….”

    “하지만, 싫다고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석주가 단호히 말했다. 아진이 정말 싫다고 하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불친절해질 기세였다. 딱딱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였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드라워진 눈빛과 입가에 은근히 뜬 미소로 그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진은 그 기세가 퍽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사장님 사람으로서.’ 그 문장이 유달리 마음에 들었다.

    심술로 부풀던 아진의 뺨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졌다. 아진이 얼음 잔을 반대 손으로 옮겨 쥐며 석주를 올려다봤다. 따뜻한 커피잔을 쥔 석주가 그와 지그시 시선을 맞추었다. 뭐 더 할 말이 있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아진이 입을 뗐다가 닫았다. 예쁜 군청색 눈동자가 좌우로 부산스레 움직였다. 잠깐 무언가를 골몰하던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왜…… 자꾸…… 존댓말 써요?”

    “네?”

    “아니, 뭐가…… 떠올랐는데. 내가 형이랑 존댓말 가지고 싸우더라고.”

    “……쓰지 말까요?”

    “모르겠어요.”

    설핏 미간을 구긴 아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정말 모르겠다. 석주가 제게 반말을 써 주길 바라나. 그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아진아, 하고 부르는 것도 좋은데.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내다움의 정점에 서 있는 석주를 제 발아래에 두고 있는 듯해서.

    아진이 석주의 새까만 눈동자에 가득 찬 자신을 보며 고민을 이어 가는데. 별안간 뜨끈한 무언가가 코로 주르륵 쏟아졌다. 아진이 별생각 없이 코로 손을 가져갔다. 헌데 석주의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사장님.”

    성큼 다가온 그가 아진의 목덜미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붉은 액체가 턱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을 손등으로 훔친 아진은 뒤늦게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근래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주혁의 생일잔치가 있던 이후 약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세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그러니 코피를 쏟을 만도 했다.

    “괜찮아요.”

    아진이 대수롭지 않게 코피를 닦아 내는데. 석주가 자신의 커피잔을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아진이 들고 있던 얼음 잔도 빼앗아 옆에 둔 그가 복도 끝에 있는 욕실로 아진을 끌고 갔다. 아진이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욕실에 들어온 석주는 아진을 세면대 선반에 앉히고는 수건을 가져와 코 아래에 대 주었다. 아진이 무심코 자꾸 고개를 뒤로 젖히자,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그러지 못하게 했다. 피가 식도나 기도로 넘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저 어디 아파요?”

    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은 아진이 자신의 몸 상태를 석주에게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아진을 살피던 석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잠을 못 주무셔서 그런 걸 겁니다.”

    “아…….”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병이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석주의 반응을 보아하니 몇 번 있던 일인 모양이었다.

    아진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코피가 멎길 기다리는데. 석주는 그새 피가 말라붙은 아진의 턱을 닦아 주고, 그의 손도 씻겨 주었다. 그 후엔 팔뚝이나 종아리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그 손길이 매우 좋았다. 차갑고, 시원했다. 피를 쏟아 저릿하던 몸이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코피는 금세 멎었다. 수건을 떼어 낸 아진이 찬물로 세수했다. 인중까지 꼼꼼히 씻어 낸 그가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어 내는데. 석주가 새 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자위 안 하십니까?”

    그 말에 아진이 버석하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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