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3화 (18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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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붕 뜬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에 뒤돌아 가던 남자가 휙 등을 돌렸다.

“예?”

“…….”

“혹시 저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드러난 얼굴은 분명 명진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명진이었다. 이전에는 품이 조금 넉넉한 정장을 고수했다면, 지금은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입고 있다는 게 달랐지만, 또 턱 아래에 흉터도 없고 손가락도 멀쩡하다는 게 달랐지만 아무튼 그였다.

아진이 음료를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어, 어떻게…….”

지나치게 놀란 듯한 아진의 반응에 명진이 턱 아래를 긁었다. 그러다 짧게 탄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저 저번 주에 복귀했습니다. 육아 휴직이 끝나서요. 일찍이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업무가 바빠서……. 죄송합니다. 괜히 인사드리러 가 봐야 귀찮아하실 것 같아서요.”

“…….”

“그건 그렇고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제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놈 그거 진짜 나쁜 놈이더라고요. 지금도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의 말투에 묘하게 사투리가 묻어났다. 언뜻 표준어를 쓰는 듯하지만, 드문드문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유추할 수 있는 억양이 있었다. 아진이 따라 할 수 있을 만큼이나 익숙한 부산 사투리였다.

무례할 정도로 집요하게 명진을 쳐다보던 아진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아진은 명진이 반가웠다.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 거친 시대에서 이 세상까지 무사히 도착했구나. 번지르르한 슈트를 입고,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육아 휴직이라고 하는 걸 보아 가족도, 자식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저와 연이 닿아 이렇게 만난 게 기뻐 마음이 다 푸근해졌다.

아진의 살가운 말에 명진이 눈썹을 올렸다. 평범한 안부 인사였는데 몹시 놀란 것 같았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아, 예. 그럼요. 잘 지냈습니다. 딸 크는 거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요?”

“예. 아, 보내 주신 출산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잔뜩 보내 주셔서 집이 다 꽉 찼습니다. 거기다 백화점 상품권에, 와이프 산후조리원까지 신경 써 주시고……. 강 비서님이 해 주신 거겠지만,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와이프가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아진이 설핏 웃으며 명진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눈앞에 있는 명진이 제가 알던 명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그를 보다 보면 70년 전의 명진이, 제가 보지 못한 명진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와 석주가 죽고 가장 힘들었을 이.

많이 슬퍼하고, 많은 일을 겪었을 이.

제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명진까지는 걱정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석주와 가장 오래된 이라 그의 죽음이 몹시 괴로웠을 텐데. 조직의 2인자로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을 거였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고요?”

“예? 아유, 그럼요. 와이프 출산 전에 건강 검진 싹-했습니다. 딸 대학 갈 때까지는 건강해야 하니까요.”

명진이 자신의 가슴부터 배까지 쭉 쓸어내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아진이 덩달아 웃었다. 행복해 보여서, 건강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진이 웃는 걸 물끄러미 보던 명진이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마저 감상하십시오. 저는 병실 앞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시면-”

“강 비서님은 뭐래요?”

“강 비서님이요?”

명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석주가 이 대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질문의 저의를 유추하던 그가 자신 없는 낯으로 답을 내놓았다.

“아, 강 비서님은 사장님이 혼자 계시는 게 불안한 모양입니다. 급하게 찾으셔서 제가 왔습니다. 근데 그새 커피 취향이 바뀌셨네요. 프랜차이즈 커피는 입에도 안 대시던 분이. 그것도 이렇게 단걸 찾으실 줄이야……. 처음에 강 비서님이 이거 사 오라고 하셔서 농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명진이 허허, 하며 웃었다. 아진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요. 황…… 비서님한테 뭐라고 안 하던…… 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복귀하고 딱히 별말 없으셨는데요. 그냥 업무 파악 빨리 부탁한다는 정도…….”

명진은 아진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난데없는 추궁에 혹 자신이 실수한 게 있나, 눈알을 바쁘게 굴리기도 했다.

“강 비서님이랑…… 안 친해요?”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대화에 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과거 두 사람은 죽마고우였다. 이번 생에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명진이 다시금 자신의 턱을 벅벅 긁었다.

“예? 어 친, 친하죠.”

“얼마나요?”

“어……. 아시다시피 사장님의 비서이신 강 비서님의 비서가 저인지라 대부분의 업무를 함께합니다.”

아진이 예상한 답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물은 거였는데. 그가 쿠션 위로 턱을 괴며 명진을 올려다봤다.

“그게 다예요?”

“예?”

명진은 이제 괴로워 보였다. 이 문답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아진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음료 감사합니다.”

“……예. 그럼.”

명진은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바쁘게 병실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그의 모습이 빤히 보였다.

아진이 태블릿 홈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꺼졌다. 그가 검은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스무디를 쭙쭙 빨아당겼다.

이곳의 석주는 명진과 친하지 않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전생의 연으로 다시 만나긴 했지만, 회사에서 우연히 만난 정도이지 아마 평범한 직장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진이 알기로 전생에서 석주의 삶에 중요했던 이들은 저, 그리고 그의 ‘식구’들이 다다. 진짜 피가 섞인 식구가 아니라, 명진을 비롯해 그와 많은 싸움판을 함께해 온 조직원들 말이다.

근데 지금은 그 식구들이 하나도 없다. 가장 특별했던 명진마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석주의 삶에.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의 편협한 인간관계에. 중요한 이는 단 한 명.

저뿐이었다.

아진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볼을 빵빵하게 채우는 스무디가 몹시 맛이 좋았다.

아진은 스무디를 든 채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앞이 희뿌열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참 시원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두툼할 정도로 많이 뗀 진단서와 의사 소견서 등을 명진의 손에 들려 보냈다. 의사와 만나고, 경찰과 통화하느라 하루가 통째로 사라졌다.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데. 재킷 안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우우웅, 하고 진동했다. 석주가 폰을 꺼내 들었다.

[회장님]

선화였다. 석주가 얼른 통화 아이콘을 스와이프했다.

“예, 회장님.”

-응, 석주야. 점심은 먹었니?

단아한 목소리가 안부를 물어 왔다.

“예. 먹었습니다.”

-그래.

선화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석주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차렸다. 어깨가 절로 꼿꼿하게 펴졌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석주가 터 준 말문에 선화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응. 경찰서에 말이야.

“예.”

-아진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같던데.

“…….”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쪽이랑 연이 좀 있잖니. 말이 곧장 내 귀로 들어오네?

석주가 코로 길게 호흡을 내뿜었다. 예상한 질문이었다. 이런 일을 선화에게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아진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 석주가 차분한 음성으로 사건을 나열했다.

“어제, 주혁이 생일이라 청담동에 가셨었는데, 그곳에서 직원과 잠깐 마찰이 있었습니다. 직원이 아진이 시계를 탐내서요.”

-그래서. 아진이 다쳤어?

“조금이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선화가 숨을 내쉬는 게 어렴풋이 들려왔다. 긴장한 석주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래. 더 묻진 않을게.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석주가 알아서 처리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아니야. 석주가 항상 애써 주는 거 나도 잘 아는데, 뭐. 우리 애 팔자가 그런 걸 어쩌겠어. 아마 이번에도 석주 덕분에 그 정도로 끝난 걸 거야. 그렇지?

“…….”

-고마워, 매번.

“아닙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응?

“예.”

통화는 예상보다 짧게 끝났다. 갑갑한 마음에 석주는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거듭했다. 아진의 고집에도 그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를 지키는 게 제 업무이거늘. 선화를 볼 낯이 없다. 그가 짜증스레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자괴감에 고요히 몸부림치는 사이, 아진은 평화로이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희뿌연 세상 위로 내리꽂히는 비가 시원했다.

전생이었다면 이런 장대비가 퍽 불편했을 것이다. 설거지도 처마 아래에서 해야 하고, 걸음걸음마다 흙탕물을 밟아야 하고, 꿉꿉하고, 빨랫감도 많고, 마루에 자꾸 비가 튀고, 밤에는 춥기까지 하니까.

근데 지금은 불편한 게 하나도 없다. 장마가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데, 아진은 비를 밟은 적이 찰나도 없었다. 매일 바깥에 나왔는데 구두는 항상 반짝였고, 몸은 산뜻한 감을 유지했다. 머리칼 역시 젖지 않았다.

매일 아침 지붕이 있는 주차장에 주차된 차를 타고, 출근해서는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는 사장실에 있다. 퇴근할 때도 그렇다.

집은 여전히 한옥이지만 70년 전 석주의 집과는 다르다. 아진의 신분 역시 달랐다. 아진은 집에서 일하는 이가 아니라, 집의 주인이었다. 비가 오든 말든, 소파에 널브러져서 직원이 가져다준 아이스초코를 빨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비에 젖은 정원을 구경하기도 했다.

현재의 아진에게 비는 맞는 게 아니라, 즐기는 거였다.

“좋네……. 비…….”

아진이 얼마 남지 않은 스무디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셨다. 회사 가는 길에 석주한테 하나 더 사 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둣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석주가 곁에 다가와 섰다.

“이만 회사로 돌아가시죠. 아니면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어제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석주는 아진이 들고 있던 빈 스무디 통을 가져가 손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진의 손가락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집에 가면, 형이 같이 있어 줄 거예요?”

아진이 잔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손가락 마디 사이에 묻은 물기까지 꼼꼼히 닦던 석주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가 아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곧 고개를 주억였다.

“예. 곁에 있겠습니다.”

“그럼 집에 가요. 같이.”

“……예.”

물기를 모두 닦은 석주가 손수건을 접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아진이 비실비실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우울해하긴커녕 웃고 있는 아진이 이상했다. 다행이긴 하나 예상 밖이었다.

그 말에 아진이 음- 하고 목으로 탁음을 냈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좀…… 그렇네요.”

아진은 입술을 겹쳐 물며 웃음을 참았다가, 다시 피식-하고 웃고야 말았다. 석주가 덩달아 미소 지었다. 뭐가 됐든 방긋방긋 예쁘게 웃는 걸 보니 한시름 놓였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나요?”

석주가 물었다. 아진이 장난스레 눈썹을 올렸다. 턱을 으스대며 말해 줄까, 말까 놀리듯 움직이던 그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음, 그냥.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요.”

그리고 그 반가운 사람이 당신이랑 안 친해서.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뒷말은 차마 내놓기 부끄러워 숨겼다.

그렇게 친했던 두 사람인데. 가족처럼 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이 지금은 어중간한 사이이다. 반면 저는 여전히 석주와 이렇게 지척에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쟁도 아닌데 승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철없는 감정인데, 실로 좋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진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석주를 지나치며 또 키득키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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