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2화 (182/261)

182

아진이 호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만 채 다시금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마음에 들었다. 한옥도 충분히 좋았지만, 이곳이 훨씬 미래, 그러니까 2023년다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롯이 아진의 취향으로만 꾸민 집이란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넓적한 밴드를 손목 전체에 둘러 준 석주가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회장님한테는 오늘 여기서 잔다고 연락했어. 다쳐서 들어가면 걱정하실 것 같아서. 내일은 다시 본가로 가자.”

“네.”

“시계는 멀쩡해 보이는데, 혹시 모르니까 수리 맡길게.”

“네.”

은근한 미소를 띤 아진이 꼬박꼬박 긍정했다. 석주의 반말은 꿈속에서 말곤 처음인 것 같은데. 몹시 마음에 들었다. 사장님 대신 아진아, 하고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것도 좋았다.

“자자, 이제.”

석주가 일어났다. 아진이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봤다. 어디서, 어떻게 자는데, 라는 표정이었다. 석주가 다치지 않은 그의 손목을 조심히 쥐고 일으켰다. 아진은 쫄래쫄래 그를 따라나섰다.

도착지는 웬 낯선 방이었다. 본가의 아진의 방만큼이나 컸고, 한쪽 벽이 통창이었으며 에어컨은 세 대나 있었다. 침대도 TV도 큼지막했고, 검은색의 기다란 소파도 놓인 채였다.

방에는 출입문을 제외하고도 문이 두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욕실 또 하나는 드레스 룸으로 이어졌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길목엔 포장을 뜯지 않은 쇼핑백과 상자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소파 뒤쪽으로는 선반이 박혀 있었는데, 그곳엔 사진이 가득했다. 가족들과 찍은 사진들이었다. 본가 방에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의아했는데. 모두 여기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사진 속에는 드문드문 석주의 얼굴도 있었다.

출입문 옆 벽에는 금빛 조명이 켜진 찬장이 있었는데, 그곳엔 차 키로 추정되는 것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언뜻 봐도 열댓 개는 되는 듯했다.

아진이 멍하니 방을 구경하는 동안 석주는 에어컨을 틀고, 반쯤 언 물 한 병을 침대 협탁에 올려 두고, 잠자리를 봐 주었다. 이불을 들친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와서 누우라는 뜻이었다.

아진이 어색하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석주는 이불을 배까지만 덮어 주고, 조명을 낮춰 주었다. 에어컨 리모컨을 들어 온도도 다시금 확인했다. 그 손놀림이 몹시 익숙했다. 본가에서 잠자리를 봐 줄 때도 그랬는데, 이곳은 더했다. 석주의 표정도 한결 느슨했다. 이 집이 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자.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내 방은 바로 옆이야.”

석주가 왼쪽으로 손을 뻗으며 자신의 방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진의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겨 주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혼자 자기 싫어요.”

석주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몸을 반만 돌려 아진을 쳐다봤다. 아진이 말똥한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 잘 때까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괜히 조급해진 아진이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아니, 같이 자 줘요. 어차피 나 더위 많이 타면 같이 잤었잖아요. 그건 기억나.”

꿈속에서 베개를 들고 석주의 방으로 쳐들어가던 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석주는 못내 난감하다는 티를 내면서도 저를 받아 주었고, 안아서 재워 주었다. 지금 아진은 그의 품이 필요했다.

“졸리는데, 자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서.”

“…….”

“혼자 자면 나쁜 꿈 꿀 것 같아요.”

“…….”

“내가…… 그 직원, 그 직원이랑 비슷한 사람을 아는데, 어, 그게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

아진이 마른세수를 했다. 씻는 중에도, 석주가 손목을 치료해 주는 중에도 드문드문 창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대로 꾸역꾸역 잠이 들면 분명 그가 나오는 꿈을 꿀 것이다.

낫을 들고 쫓아오는 창두. 칼을 들고 쫓아오는 진걸. 절뚝이는 다리로 어둑한 숲속을 배회하는 저. 그 아득하고 영원한 도망. 잠에서 깰 때까지, 어쩌면 깨서도 끝나지 않을 꿈.

아진의 얼굴이 두려움에 침잠했다. 그가 이불을 꾹 꼬집듯 쥐는데. 석주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못해 침대로 다가왔다. 아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몸을 옆으로 옮겨 석주의 자리를 만들었다. 석주가 굳은 낯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내리고 바르게 누웠다. 꼭 송장 같은 자세였다. 아진도 그의 옆에 누웠다. 두 사람은 두 뼘 정도 떨어진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얄궂은 분위기가 천장에서부터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진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적막이 불편하다. 석주가 곁에 있으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 그가 옆에 있는데도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교류가 전혀 없어서 그랬다.

제가 알던 석주였다면, 전생의 석주였다면, 절 이렇게 방치하지 않았을 텐데. 저를 안아 주고 보듬어 주었을 텐데.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언정, 세상에서 꽃님 다음으로 저를 많이 안아 주고 달래 주던 사람인데, 까지 생각하는데.

석주가 아진 쪽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뻗었다. 그리고 자기 옆의 침대를 쓰다듬듯 두드렸다.

“이리 와.”

“…….”

“안아 줄게.”

아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석주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석주가 다시금 침대를 두드렸다.

“얼른.”

아진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품으로 흘러 들어갔다. 석주는 익숙하게 아진의 머리 아래에 팔을 넣어 주고, 반대 손으로는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돌연 코가 찡해졌다. 추스르지 못하고 막아 두기만 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뒤늦게 범람하는 듯했다.

그래도 아진은 울지 않았다. 저는 이제 스무 살짜리 풋내기가 아니라, 스물일곱 살의 어른이니까. 눈을 꾹 감고 석주의 위로를 바늘 삼아 터진 마음을 기웠다.

그러다 울렁거리던 속이 한결 가라앉았을 때쯤. 아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경찰서로 보냈어. 이미 절도 전과랑 사기 전과가 있었다네. CCTV 확인했는데, 그전에도 손님들 물건에 손을 댄 모양이야. 아마 절도에 폭행까지 더해서 처벌받지 않을까 싶어.”

“처벌? 뭐…… 팔이라도 잘리나?”

“……뭐?”

석주가 휙 아진을 쳐다봤다. 팔을 자른다는 말에 놀란 듯했다. 아진이 피식 웃으며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그러고는 석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석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가, 곧 아진을 마주 안아 주었다.

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석주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허공을 응시했다.

돼지. 즉, 창두는 전생에도 절도를 행했던 이다. 그러다 팔까지 잘리고 흉한 모습이 됐지. 근데 왜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보다는 의아했다. 저는 전생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창두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서.

아니, 따지고 보면 저도 전생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도 양반집 아들이었다가 납치를 당해서 잠깐 팔자가 뒤틀렸던 것 같으니까.

그럼 다 전생과 비슷한 삶을 사는 건가.

……그렇다면 석주는 뭐지.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지. 그의 팔자는 뭐지.

제가 보기에, 전생의 석주와 지금의 석주는 접점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깡패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석주만 전생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용왕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진이 눈앞에 있는 석주를 빤히 바라봤다. 석주가 특유의 잔잔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아 냈다.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얼른 자.”

커다란 손이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던 손가락이 목덜미를 가볍게 긁고 지나갔다.

“……네.”

움찔 어깨를 떤 아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놓고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석주의 잘생긴 얼굴을 흘끔거리며 혼란함에 복작복작한 머릿속을 정리해 갔다. 그러다 눈알이 뻑뻑해져서 꾹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했다. 전생이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나만 확실하면 됐지. 지금 눈앞에 있는 석주가 ‘그’ 석주가 아니라는 것. 더위를 타지 않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운다. 같은 사람일 리 없었다.

그저 저를 소중히 여겨 주는 이다. 제가 알던 석주와 달리 저를 아프게 하지도, 울게 하지도, 외로이 두지도 않는 사람.

그래. 그거면 됐다.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석주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저를 감싸는 게 나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아진은 석주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 손목을 치료했다. 그저 긁히고 쓸린 상처라 굳이, 싶었지만 그래도 석주가 원하니 가 주자 싶어서 간 건데. 석주가 이것저것 귀찮은 검사를 추천했다. 그놈, 그러니까 창두가 벌을 많이 받게 하려면 아픈 곳이 많을수록 좋단다.

그 말에 아진은 열심히 검사에 임했다. 넘어지면서 다쳤을지도 모를 엉치뼈나 골반, 척추까지 검사했다.

그렇게 검사를 끝내고 나니 석주가 바빴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서류를 떼고 의사를 만나 무언가를 은밀히 의논했다. 표정이 일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걸 보아 창두가 아주 큰 벌을 받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진은 처음엔 석주를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근데 석주는 그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아진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누구와 부딪치기라도 할까, 소문이라도 돌까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1인용 병실을 하나 잡아 주고는 그곳에서 기다리라 했다. 태블릿을 펼쳐 드라마도 켜 주고, 무선 이어폰도 연결해 주었다. 그는 금방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병실을 나섰다. 소파에 앉아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준 아진은 소파 쿠션에 턱을 괸 채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진이 미간을 한껏 구긴 채 드라마에 빠져들어 있을 때였다.

“여기 딸기 쿠키 프라페입니다.”

예쁜 색의 음료가 아진의 앞에 놓였다. 아진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버릇처럼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다 뒤늦게 석주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그가 무선 이어폰을 빼며 시선을 올리는데. 음료를 갖다 준 이가 꾸벅 묵례하더니 뒤를 돌았다. 언뜻,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어…….”

아진의 입술이 빨대를 놓쳤다. 주둥이로 올라오던 음료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저 익숙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아는 얼굴. 제가 이 세상에 와서 아는 얼굴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두툼한 덩치. 까무잡잡한 얼굴. 적당히 도드라진 광대. 크진 않으나 또렷한 눈매.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 웃으면 서글서글하게 보이지만 얼마든지 험상궂게 변할 수 있는 분위기.

“명진이…… 형님?”

명진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