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1화 (18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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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질린 그가 발작하듯 창두를 밀어 냈다.

“저, 저리 가. 저리…… 가!”

그의 손이 퍽 창두의 가슴팍을 쳤다. 그에 창두가 코로 성난 숨을 내쉬며 아진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억지로 시계를 빼려 했다.

“안, 안 돼…….”

아진은 그의 허벅지와 무릎을 마구 차고, 반대 손으로 창두의 손을 꼬집듯 긁었다.

그러나 격렬한 반항에도 창두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진의 손목을 잡아챈 힘만 더 거세졌다.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비틀린 살갗이 찢어지듯 따끔거렸다. 창두가 씩씩거리며 아진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오, 병신 같은 게. 말로 할 때 주지 그냥. 어?”

“우흑…….”

창두가 번쩍 손을 올렸다. 옹골차게 말린 주먹이 아진의 오뚝 솟은 콧잔등을 겨냥했다. 손찌검을 예상한 아진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벌컥. 창고 문이 열렸다.

“뭐, 뭐야?”

흠칫 놀란 창두가 뒤를 돌아봤다. 커다란 그림자가 창고 안으로 드리웠다.

아진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했다. 지금 이곳이 산속인지 창고인지, 전생인지 현생인지 구분도 모호했다. 그 경계에 갇혀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헛구역질이 다 올라왔다.

그 순간. 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두가 쾅-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누가 쪼그려 앉아 있는 창두의 옆통수를 발로 후려 버린 것 같았다.

“컥…….”

엄청난 충격에 창두의 눈알이 뱅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폭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다란 다리가 창두의 하관을 콱 내리찍었다. 대번에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엉망으로 찢어졌다. 고작 한 대. 한 대였을 뿐인데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됐다.

그 후로도 일방적인 폭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미 벽에 머리를 박았을 때부터 정신을 잃은 창두의 몸이 고깃덩이처럼 흔들거렸다.

“이…… 또…….”

창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 위로 퍽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덮여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진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창두를 쳐다봤다. 폭력. 주먹. 피. 고통. 하나같이 아진에게 버거운 것들이었다. 상기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잊고 있던 기억이, 공포가, 서러움이 쥐불놀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아……. 아아…….”

어깨를 한껏 옹송그린 아진이 귀를 틀어막고 덜덜 떨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은 창두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저 폭력이 어느 순간 저에게도 쏟아질 것 같았다.

석주가. 석주가 필요했다. 석주가 있어야 했다. 그가 저를 지켜 줄 것이다. 그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언제. 대체 언제 오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설마 이번에도 늦진 않겠지. 이번에도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도 그러면 나는……, 까지 생각하며 눈물을 떨구는데.

“아진아.”

묵직하게 가라앉은 저음이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흡, 숨을 멈춘 아진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무릎을 굽혀 아진과 눈을 맞춰 왔다.

아진이 울음에 붉어진 입술로 그를 불렀다.

“……형.”

석주였다.

“괜찮아?”

석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만면에 걱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를 멍하니 보던 아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바쁘게 굴려 아진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혹 상처가 있나 싶어서. 그러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주려 손을 뻗었다. 허나 석주는 아진에게 닿지 못했다. 손이 온통 피범벅이었기 때문이다.

석주가 얼른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슈트 재킷에다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런 석주를 보던 아진이 슬쩍 창두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석주가 어깨로 그 시선을 가렸다. 그러더니 한결 깨끗해진 손으로 아진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빙긋 웃었다.

“가자. 집에.”

“…….”

차가운 석주의 손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애타게 바라며 덧그리던 그 체온이었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도, 열에 달뜬 뺨도 매만졌다. 그러다 뒤늦게 아진의 손목이 온통 새빨개진 걸 발견했다. 얼마나 우악스럽게 잡혔는지. 시계와 마찰한 살갗이 드문드문 쓸려서 피가 올라오고 있었다.

“…….”

석주의 낮이 차갑게 굳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아진 몰래 바쁘게 움직였다. 흉기를 찾는 거였다. 아무래도 저 파렴치한의 손목을 잘라 내야 할 성싶었다.

위스키 병을 발견한 그가 저것으로 손목을 자를 수 있을까, 심도 있게 고민하는데. 아진이 석주의 어깨에 툭 얼굴을 묻어 왔다.

“더워요.”

“……집에 가자.”

석주는 깔끔하게 복수를 포기했다. 복수고 뭐고 아진이 최우선이었다.

“응……. 집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의 집에. 안전하고 멋진 나의 집에. 당신이 있는 나의 집에.

안온한 자신의 방을 떠올린 아진이 나른한 숨을 내쉬는데. 석주가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아진은 큰 고민 없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손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다. 석주에게 기댄 것도 몸을 가누지 못해서였다. 일어나서 걸을 자신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눈꺼풀도 가물가물했다.

잠깐 아진을 밀어 낸 석주가 등을 돌렸다.

“업혀.”

아진이 눈을 끔뻑이며 널찍한 등을 쳐다봤다. 그러다 바닥을 짚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 후 석주의 등에 엎어지듯 몸을 얹었다.

석주가 미끄러지는 아진의 허벅지를 쥐어 그를 고쳐 업었다. 그는 축 늘어진 성인 남성을 업고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일어났다.

“고개 숙이고, 눈 감아.”

그 말에 아진은 끄덕끄덕하더니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석주의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바디 워시 냄새, 스킨 냄새 그런 게 섞인 냄새였다. 석주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는 냄새였다.

그리고 특유의 시원한 체온. 뭉근히 밀려오는 청량함. 덕분에 지글지글 끓던 아진의 가슴팍이 미적지근하게 식었다.

석주는 앞길을 막은 창두의 다리를 쓰레기 치우듯 발로 걷어 내고는 창고를 나섰다. 아진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복도로 나온 석주가 뚜벅뚜벅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아진이 함께 들썩였다. 규칙적인 발걸음이 묘하게 익숙했다.

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석주의 목을 답삭 껴안고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이상하지.

제가 업혀 있는 석주는 담배 냄새도 나지 않고, 체온이 뜨겁지도 않은데. 꼭 제가 전생의 석주에게 업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석주를 만나고, 완전히 경계를 놔 버린 아진은 정신을 놓았다가 되찾길 반복했다.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데, 잠깐 눈을 떴을 땐 차창 가득 빗방울이 맺힌 차 안이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선 집의 거실 소파였다. 한옥인 본가와 달리 천장이 매우 높고, 나무 냄새 대신 은은한 디퓨저 향이 나는 곳이었다.

아진이 먼 천장에 달린 기하학적 디자인의 조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홈 슬리퍼 특유의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얼음이 동동 뜬 물잔을 든 석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저릿저릿하던 손발도 잘 움직였다.

아진의 옆에 앉은 석주가 물잔을 내밀었다. 아진이 그것을 꼴깍꼴깍 단번에 비워 냈다. 얼음만 달그락거리며 남았다. 개중 하나를 사탕처럼 입에 넣은 아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한층 맑게 갰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석주가 아진의 손목시계를 조심히 풀며 물었다. 아진이 턱을 주억였다. 그의 입 안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움직였다.

석주는 그에게 욕실을 안내해 주고, 속옷을 비롯한 홈웨어도 갖다 주었다.

아진은 샤워를 오래 했다. 찬물 아래에 한참 서서 술기운과 약 기운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씻고 나왔더니, 마찬가지로 씻은 모양인지 머리칼이 조금 젖고, 옷을 갈아입은 석주가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예, 황 비서님.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예.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예.”

아진을 발견한 석주는 얼른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아진을 데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 테이블엔 얼음이 가득한 찬물과 구급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진은 묘하게 익숙한 몸짓으로 소파 아래, 테이블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석주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과 연고, 밴드 따위를 줄줄이 꺼내 놓았다. 그리고 쓸린 아진의 손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내일 병원 가자.”

“네.”

아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큰 상처라곤 생각되지 않았으나 거절하면 석주가 싫어할 것 같았다. 근데 소독약이 파인 상처에 닿는 순간. 어깨를 움찔 떨며 놀랐다.

“앗, 따가…….”

그에 석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상처 위로 후우- 하고 바람을 불었다. 찬 바람에 따끔거리던 통각이 한결 가셨다. 아진이 상처를 들여다보는 석주를 빤히 응시했다. 걱정과 아픔으로 점철된 그의 낯이 썩 마음에 들었다.

석주는 조촐한 상처를 공들여 치료했다. 그를 구경하던 아진이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공간. 높은 천장. 통창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서울 야경. 본가보다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의 소파와 테이블. 멀찌감치 보이는 부엌 겸 다이닝 룸. 검푸른색의 바닥과 가구들.

“여기는 어디예요?”

“우리 집.”

“……우리 집?”

“아진이 너랑 내가 사는 집.”

“아…….”

독립해서 석주와 함께 산다던 그 집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본 집이다. 석주와 사장님 호칭을 갖고 대판 싸웠던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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