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80화 (18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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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목소리 되게 좋다.”

    아진은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대뜸 감상을 내놓았다. 난데없는 말에 석주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걱정스레 물었다.

    -……술 많이 드셨습니까?

    “어, 별로 안 마신 것 같은데……. 아니, 쫌. 쫌 마셨어요. 쫌.”

    -…….

    “근데 걷기가 힘들어. 엘리베이터가 없어졌나 봐요. 나 좀…… 데리러 와요…….”

    아진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말하고 나니 서러웠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사라질 건 뭔가. 어이가 없어서.

    -지금 가겠습니다.

    “응. 끊어요.”

    -끊지 마세요. 그냥 들고 계세요.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아진은 착하게 다시 귀에 갖다 댔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게 번거롭고 무겁고 귀찮은데도 그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네……. 들고 있어요…….”

    꼬박꼬박 대답한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통화하는 사이 체온이 더 올랐다. 눈알이 뜨끈뜨끈했다. 어떻게든 열기를 식혀 보려 눈을 꾹 감는데. 수화기 건너로 석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서 내리는 소리. 띠딕, 하고 차를 잠그는 소리. 매끈한 바닥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구둣발 소리. 옅게 들리는 숨소리 같은 거.

    석주가 아진에게 오는 소리였다.

    그걸 멍하니 듣던 아진이 별안간 눈썹을 잔뜩 구겼다.

    “형. 나요……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속도 안 좋아…….”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들기름을 물처럼 마신 듯 속이 니글거렸다. 몸도 축축 처지고, 그 와중에 덥기까지 하고. 아주 홀딱 벗고 바닥에 대자로 눕고 싶었다. 그래도 양반집 아들인데 체통을 지켜야지, 싶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중이었다.

    -금방 갑니다.

    “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는데. 석주가 잔잔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오늘 즐거우셨습니까?

    “맛있는 케이크 먹었어요.”

    아진이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건너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크가 즐거우셨나 보네요.

    “그리고 주혁이가 선물 좋아했어요.”

    -다행입니다.

    “응, 다행이네요…….”

    아진이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손바닥 가득 땀이 묻어났다. 더위의 적나라한 증거를 확인하자 더 드센 열기가 치밀었다. 아진이 끙, 하고 앓으며 칭얼거렸다.

    “형. 나 더워요. 너무 더워…….”

    -다 와 갑니다.

    아진이 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몸이 타는 것 같다. 피부와 근육이 뙤약볕의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녹아내렸다. 석주의 체온이 그리웠다. 그가 전처럼 그 커다랗고 단단한 손바닥으로 제 뺨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했다.

    아진이 열에 달뜬 숨을 버겁게 내쉬는데. 눈앞에 구두 하나가 다가와 섰다. 아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으나 구두의 주인이 석주가 아님을 알았다. 그의 구두는 항상 깔끔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구두는 앞코가 낡아 있었으며 빗물로 인한 얼룩도 져 있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낡은 구두의 주인이 물었다. 아진이 느리게 얼굴을 들었다.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이곳의 직원들이 입는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귀에는 싸구려 큐빅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키가 컸고 살집이 조금 있긴 했으나 뚱뚱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봤다면 좋은 덩치라며 칭찬할 만한 체격이었다. 머리는 스포츠머리로 바짝 깎인 채였고, 아진을 보는 눈은 빙긋 웃고 있었다.

    아진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인데, 아무리 봐도 누군지 떠오르질 않았다. 제가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고민하던 아진은 몇 박자 늦게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발견했다.

    [STAFF 곽창두]

    곽창두. 생경한 이름이었다.

    아진의 시선을 눈치챈 창두가 손으로 이름표를 가렸다. 그러면서 아진을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천이 좋아 보이는 검은색 와이셔츠나, 햇빛이라곤 묻지 않은 뽀얀 피부와,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몸이나, 주름도 얼룩도 없이 반짝이는 구두와, 그의 손목에 찬 고급 시계 같은 것들을.

    창두가 아진에게 손을 뻗었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형이 곧 와요.”

    아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까딱였다. 그에 창두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사장님. 누굽니까?

    “응……. 직원요.”

    친절한 직원. 나른한 음성으로 대꾸한 아진이 창두에게 휘휘 손을 휘저었다.

    “가세요. 그냥.”

    그러나 창두는 물러나지 않았다. 입술을 비죽 뒤틀더니 덥석, 아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제가 부축해 드린다니까.”

    우악스러운 힘에 아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이 타닥,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아진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다. 근데 창두가 그쪽 팔꿈치도 잡아챘다.

    “핸드폰, 핸드폰.”

    아진은 어깨를 뒤틀며 그의 손길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창두의 힘은 셌다. 아진은 몸만 퍼덕거릴 뿐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술과 약에 취한 터라 그러잖아도 보잘것없는 힘이 영 맥을 못 추렸다.

    창두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혹 목격자가 있나, 확인했다. 그러더니 복도 구석, 벽과 같이 검게 칠해져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반쯤 들리다시피 한 아진이 짐짝처럼 질질 끌려갔다.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저쪽에서 조금 쉬다 가시죠, 손님.”

    “아니, 괜찮은데……. 이것 좀 놔, 놔주세요…….”

    “이렇게 계시면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됩니다.”

    창두는 아진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아진이 멀어지는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석주가 싫어할, 아니, 걱정할 텐데. 지나치게 친절한 직원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가.

    이성이 반 이상 휘발한 아진은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멀어지는 핸드폰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창두가 검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진을 볼링공처럼 미끄러트렸다. 복도와 같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아진이 공간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창두는 문을 닫기 전, 바깥을 한 번 확인하고 닫았다. 그러면서도 문을 잠그진 않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이가 없다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아진이 눈만 굴려 공간을 살폈다.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에어컨이 아예 없는 모양인지 더웠고, 꿉꿉했으며 먼지 냄새도 났다. 좌우로 정체 모를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몇 개 열려 있는 것을 보아 휴지, 술, 식기류 같은 것이었다.

    벽 한쪽에는 작은 프로젝트 창이 달려 있었으며, 구석에는 낡은 의자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종이컵이 있었는데 담배꽁초가 그득했다. 어림잡아 창두가 남몰래 쉬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대충 공간 탐색을 마친 아진이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저 가야 해요. 여기 있으면 석주 형이 찾기 어려울 것 같아.”

    그때. 창두가 성큼성큼 아진에게 다가와서는 코앞에 딱 붙어 섰다. 그러더니 아진의 손목을 함부로 잡아챘다. 억대를 훌쩍 넘기는 가격의 손목시계가 드러났다. 그것을 본 창두가 걸걸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와, 씨발. 개쩌는 시계 차고 있다, 손님.”

    “……씨발?”

    갑작스러운 비속어에 아진이 고개를 꺾었다. 주혁까지는 이해한다만, 이렇게 낯선 이가 욕하는 것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저는 사장님이고, 양반집 아들인데. 모두 제게 친절하고 함부로 굴지 않았는데. 이 괴상하게 친절한 직원이 아까부터 영 짜증 나게 군다.

    그러든 말든 창두는 아진의 손목을 좌우로 휘저으며 시계를 구경했다.

    “이게 얼마짜리야. 나는 1년 내내 피똥 싸게 일해도 이런 거 못 사. 근데 손님은 하루에도 몇 개씩 살 수 있겠지? 진짜 존나 부럽다. 대체 전생에 뭐였길래 그런 팔자를 타고났냐.”

    “…….”

    “이런 데서 하룻밤에 수천만 원씩 쓰면서 술 먹고. 약 빨고. 내일 아침엔 사장님, 이사님, 소리 들으면서 출근하고. 씨발, 인생 존나…….”

    아진의 손목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쥔 그가 가까이에 있던 휴지 상자를 발로 퍽 찼다. 아진은 그것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전생? 나 전생에 절름발이였는데, 따위의 생각이나 하면서.

    근데 창두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 왔다.

    “손님. 이거 나 주라.”

    “……안 되는데.”

    “왜. 손님은 집에 이런 거 많잖아. 하나쯤 줘. 안 그럼 팬다? 고 예쁘장한 얼굴 다 뭉개 줄까?”

    “…….”

    창두가 살찐 주먹을 흔들었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뇌가 흔들리는 기분에 눈매에 힘을 줬다.

    “진짜 안 돼. 이거 우리 형이 준 거야.”

    “형한테 또 사 달라고 해.”

    “안 돼. 한정판이라고 했어.”

    “그럼 처맞고 주든가. 너 입은 거, 가지고 있는 거 다 갖고 가면 몇 달 일 안 해도 되겠다, 씨발. 로또네, 로또. 지갑은 어디 있어? 차는? 끌고 왔냐? 차 키도 있어?”

    아진의 손목을 던지듯 내려놓은 창두가 몸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고,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목이나 발목을 확인하는 게 딱 파렴치한 좀도둑이었다.

    아진은 부산스레 움직이는 창두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그때, 넙데데한 얼굴 하나가 눈앞을 휙 스쳐 갔다. 아주 먼 기억에서부터 끄집어낸 얼굴이었다.

    “어…….”

    살이 뒤룩뒤룩 찐 볼. 납작한 광대. 험상궂게 생긴 눈썹. 살에 가려 작아진 눈. 보랏빛 입술. 욕심을 한가득 물어 툭 튀어나온 턱. 그리고 도둑질하다 걸려 잘린 한쪽 팔.

    그였다. 아진과 함께 석주의 집에서 일하던 돼지. 어느 날 밤. 앙심을 품고 서슬 퍼런 낫을 든 채 저를 찾아왔던 그.

    아진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과거의 공격에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를 피해 도망치던 제 꼴이 어떠했는지. 어둑한 숲을 헤칠 때의 공포감이 얼마나 드셌는지. 그 춥고 건조한 겨울 숲에서 밤을 보내며 어떤 두려움을 느꼈는지 또렷이 기억나 버렸다.

    왜 네가 여기에. 어째서 여기에. 왜 또 우리가. 대체 어떻게. 어째서.

    아진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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