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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79화 (17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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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은 쟁반 위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불행과 오해와 고통의 시작이었던 것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숨을 멈춘 그가 소파 등받이로 도망쳤다.

    억지로 먹이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제가 집어 먹지 않는 이상 저걸 다시 삼킬 일은 없는데도 겁이 났다.

    아진이 버석하니 굳어 있는 사이,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약을 탐했다. 누군가는 술잔에 동그란 알약을 타서 입에 넘겼고, 또 누군가는 가루를 테이블에 길게 뿌린 후에 콧구멍으로 들이켰다. 후자에는 주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진이 숨을 끊어 마시며 그들을 쳐다봤다. 눈에 익어 가던 친구들이 다시 낯설어졌다. 피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애써 덮어 놓은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난 악몽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 하얀 알약이 석주가 제게 먹였던 것과 같은 것인지는 모른다. 아니,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저것이 마약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아진은 그와 비슷한 것과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시종일관 명치를 긁어 대던 열기가 부리나케 도망갔다. 몸이 차가웠다. 뼈가 언 것처럼 뻐득거렸다.

    핸드폰을 꽉 움켜쥔 그가 일어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가루를 양껏 들이켠 주혁이 소파 등받이에 고꾸라지듯 누우며 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속눈썹이 푸르르, 기형적으로 경련했다.

    “하아…….”

    주혁이 짙게 탄식했다. 아진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생일잔치에 와서 본 주혁은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짓궂고 장난기도 많지만 다정했다. 그러니 긴장할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 아진을 알았을까. 먼 허공을 응시하던 주혁의 눈동자가 스르륵 구르더니 아진을 담았다.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겁먹은 강아지 같은 꼴에 픽 웃은 주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순간, 그의 콧구멍 안에 있던 하얀 가루가 연기처럼 뿌옇게 흩날렸다. 작은 입자들이 아진의 망막과 코,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로 들어왔다.

    매캐하고 텁텁한 냄새에 아진이 뒤늦게 숨을 참는데. 주혁이 키득거리며 아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넌 하지 마. 석주 형이 네가 뭔 짓을 해도 참는데. 약하는 건 절대 안 참아. 그 형이 워낙 이런 거, 엉? 불법 유흥 같은 거 안 좋아해서 오늘도 같이 오면 너 보내고 우리끼리 따로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뭐…… 그 형이 없으니까…….”

    “…….”

    “너 스물세 살 땐가. 클럽에서 웬 변태 놈이 주는 약 먹고 쓰러졌었잖아. 그때, 씨발, 석주 형이 진짜, 와, 진짜…….”

    “…….”

    “네가 약하면 여기 불 지를지도 몰라. 그러니 아진 베이비는 그냥 술이나 드세요.”

    주혁의 발음이 뭉그러졌다. 말끝이 은근히 늘어지는 게 그가 무언가에 단단히 취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주혁이 굴러다니는 잔에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조금 전, 아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친구가 먹고 내려 둔 술잔이었다. 술잔 바닥에 희끄무레한 가루가 은근히 남아 있었는데, 쏟아지는 노르스름한 빛의 술이 그것을 숨겨 버렸다.

    덜덜 경련하는 주혁의 손은 술이 넘칠 때까지 따르고서야 멈췄다. 그가 아진에게 잔을 내밀었다.

    “…….”

    아진은 그것을 받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주혁이 잔을 들썩거렸다.

    “마셔. 너 이 술 좋아하잖아. 너 때문에 일부러 시킨 거야. 근데 한 잔도 안 마셔 주고, 씨발. 섭섭하게…….”

    주혁이 입술을 부루퉁히 내밀었다. 아진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마시지 않으면 주혁이 저를 끈질기게 괴롭힐 것 같았다.

    아진이 꿀꺽꿀꺽 술을 삼켰다. 주혁이 잘한다며 손뼉을 쳐 주었다. 힘겹게 술을 비운 아진이 빈 잔을 탁.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소파에 비스듬히 늘어진 아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몸이 무거웠다. 어찌나 무거운지 제대로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쳐서 사지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귓가가 먹먹하고, 들이마시는 호흡이 질었다. 손목과 발목은 누가 잘라 간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빛이 물에 젖은 것처럼 번졌다. 그게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웠다.

    아진은 지금 이 느낌이, 이 기분이 옳지 않은 것임을,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아…….”

    숨을 길게 뱉어 낸 그가 힘겹게 고개를 뒤척였다.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혁이 먼 구석, 동떨어진 소파에서 다현과 진득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또 다른 친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바닥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홀짝이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뒤늦게 배라도 고픈 건지 안주로 마련된 음식을 허겁지겁 퍼먹고 있었다.

    아주 이상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또 평화로운 모습도 아니었다.

    아진은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 뒤늦게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 손목시계의 짧은 바늘이 열한 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나, 가야, 가야겠어…….”

    아진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진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물며 직원들도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진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공에다 “안녕.”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문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 와중에도 두 다리가 멀쩡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쪽 다리를 절었으면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넘어졌을 테니까.

    아진은 쇳덩이 같은 문을 어깨로 밀어 열고 나왔다. 룸과 달리 어둑한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복도는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는 건지 조금 더웠다.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비 때문에 약간 꿉꿉했고, 또 적막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진이 눈매에 힘을 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던 그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엘리베이터 표시를 발견했다. 회사에 붙어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이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시름 놓은 아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타박타박, 기우뚱기우뚱 몸을 흔들면서 열심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진의 입가에 떠 있던 미소가 사그라졌다. 그저 걷는 것일 뿐인데 몹시 힘겨웠다. 눈앞이 어떻게 된 건지, 멀다고 생각한 벽이 코앞에 있고, 모퉁이를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모퉁이가 있었다. 어둑한 색으로 칠해진 사위에 뭐가 천장이고 뭐가 땅인지 구분도 잘 안 됐다.

    점점 빛이 사라졌다. 불규칙하게 울리던 저의 구둣발 소리도 멀어졌다. 약과 맞닥트리고 차게 식었던 몸이 다시금 홧홧해졌다. 후우, 하고 술기운을 흩트려 보려 내뱉은 숨이 더웠다.

    아진은 복도를 돌고 또 돌았다.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도 엘리베이터는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이 복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멀미가 났다. 속도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벽에 어깨를 문지르며 걷던 아진이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덥고, 졸리고, 아득하고, 무섭고, 피곤했다. 그 모든 감정에 짓눌린 아진이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렸다.

    돌연 석주가 보고 싶었다. 석주가 있으면 덜 불안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다. 제가 등신처럼 널브러져 있어도 잘 추슬러 집에 데려다주겠지. 잘 씻겨서 그 넓은 품에 안고 재워 줄 것이다. 그 커다랗고 뜨거운, 아니 차가운, 뜨거운, 차가운…… 아무튼 그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주겠지.

    “보고…… 싶어…….”

    그가 보고 싶었다. 마루를 지르밟는 발소리와, 부드럽게 마찰하는 두루마기 소리, 담배 연기를 내뿜는 자욱한 숨소리 같은 게 머릿속에 꽉 찼다.

    이렇게까지 석주가 떠오르는 일이 없었는데. 술에 취해서 그런가. 그 하얀 알약과 맞닥트려서 그런가. 아니면 오늘 낮에 그의 환영과 마주해서 그런가. 자꾸 석주가, 그때의 석주가 아른거렸다.

    아진이 벽에 쿵, 머리를 박았다.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날 내버려 두고 먼저 죽어 버린 당신은 끝내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그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혹여, 혹여……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날 찾고 있진 않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의 이름을 가지고, 그와 같은 얼굴을 한 석주가 이미 제 곁에 있는데.

    하지만 그 사람은 제가 알던 그 석주가 아닌데. 그럼 진짜 석주는, 아니, 그렇다고 지금 곁에 있는 석주가 가짜 석주라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아…….”

    그냥 아무나 보고 싶다.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이 외로움을, 이 괴로움을 거둬 가 줬으면 좋겠다.

    아진이 훅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별안간 눈썹을 올렸다. 그러고는 몸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냈다. 다행히 핸드폰은 주머니에 곱게 수납되어 있었다.

    홈 버튼을 누른 아진이 전화기 모양 아이콘을 툭툭 터치했다. 제가 먼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이라 손가락이 헛돌았다. 그래도 용케 다이얼 화면까지 넘어갔다. 턱을 안으로 말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아진이 숫자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5번. 5번…….”

    어렵게 5번을 찾아낸 아진이 그것을 꾸욱 길게 눌렀다. ‘짧게 누르시면 안 되고, 화면이 바뀔 때까지 길게 누르셔야 합니다.’라고 당부하던 석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화면이 검게 바뀌었다. 아진이 얼른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불안하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곧 신호음이 끊겼다. 그리고 기다리던 음성이 나타났다.

    -예, 사장님.

    “…….”

    아진이 헛숨을 삼켰다. 기계를 통해 듣는 석주의 목소리가 생경했다. 그래서 잠시 잠깐 멍하니 넋을 놓는데. 건너편에서 다시금 석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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