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8화 (17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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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웃던 아진이 주혁이 한 말을 되뇌었다. ‘다시 만났는데 안 좋을 건 또 뭐야.’ 그 말이 머릿속에 또렷이 박혔다. 두 사람이 얼마나 대판 싸우고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장 아홉 번이나 헤어졌는데 그래도 좋다고 또 만나고 또 만난다는 게 정말이지 신기했다.

아진이 무언갈 고민하며 입술 끝에 꾹 힘을 주는데.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댄 주혁이 아진을 빤히 응시했다.

“너 좀 이상하다.”

“어?”

“분위기도 평소랑 희한하게 다르고. 어디 아프냐? 적응 안 되게 존나 가라앉아 있네. 석주 형이랑 같이 안 와서 그래? 내가 전화해 볼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었다.

“또? 하긴 요즘 날이 덥긴 덥지.”

쯧, 혀를 찬 주혁은 잠시간 아진을 관찰하듯 쳐다보다, 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일잔치는 시간이 갈수록 무르익어 갔다. 광대가 조금 발긋해진 아진은 낯선 친구들을 방관하며 생 초콜릿이 올라간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친구들의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바보 같은 장난과 비속어가 오가기도 하고, 알아듣기 힘든 경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주식이나 회사 경영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다 아진은 모르나 아진이 속해 있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의 학창 시절, 대학 시절. 술 먹고 취해서 난동을 부렸던 때, 누군가의 첫 연애, 누군가의 가출, 누군가의 여행 그런 거.

반은 알아먹지 못했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아진이 이번엔 타르트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짧은 바늘이 1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진이 이곳에 입장한 지 벌써 세 시간이 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석주는 여전히 주차장에 있으려나. 그렇겠지. 심심하진 않나. 다리가 저리진 않으려나. 그 긴 다리를 구기고 있으면 불편할 텐데.

시답잖은 걱정을 하던 아진이 슬쩍 주혁을 불렀다. 궁금한 게 있었다.

“그, 주혁아.”

“엉.”

“석주 형이.”

“엉.”

“우리 이렇게 놀 때 항상 같이 왔었……어?”

주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너 스무 살 되고 우리가 대놓고 술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매번 왔지.”

아진이 으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혼자 가겠다는 말에 사기라도 당한 표정을 지을 만도 했구나. 그냥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가서 데리고 올까. 그가 뺨을 긁으며 고민하는데.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잘근거리던 주혁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얹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없어서 하는 말인데. 개 불편했다, 진짜.”

“뭐가? 석주 형이?”

“엉. 욕을 존나 하잖아.”

“……욕을 해? 형이?”

상상치도 못한 말에 아진의 눈이 커졌다. 그에 주혁이 눈을 부릅뜬 채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엉. 눈으로.”

“…….”

“눈으로 욕을 존나 해. 진짜 존나.”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대뜸 흥분한 주혁이 그간 있었던 일을 한탄하듯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네 잔에 술 따를 때마다 나를 태워 죽일 듯 노려봐.”

“…….”

“내가 너한테 담배 피우러 가자고 말해도 노려보고, 어디 놀러 가자, 여행 가자, 클럽 가자, 할 때도 노려보고. 중고딩 때 있었던 일로 시시덕거리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고.”

“…….”

“너랑 내가 만나는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해. 아니, 아니. 그냥 내가 숨 쉬는 게 싫을 수도 있어.”

주혁이 자신의 목을 조르듯 쓰다듬었다. 분노한 짐승 같은 석주의 눈을 떠올린 듯 으, 하고 턱을 안으로 당겼다.

“내가 널 좀 자주 주무르잖냐. 볼이나 어깨나, 가끔은 엉덩이도 만지고. 그럼 무슨 더러운 벌레가 너한테 엉겨 붙어 있다는 것처럼 쳐다봐.”

“…….”

“얼른 집에 데리고 가야지. 이 더러운 소굴에서 널 구해 내야지. 집에 가서 뽀득뽀득 씻기고 재워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라니까.”

“…….”

“약간 뭐라고 해야 하냐, 어, 졸라게 엄한 양반집 대감님이 막내딸 간수하는 느낌? 뭔지 알지?”

잠자코 듣던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주혁은 분기탱천해서 말하는데 큰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욕을 입 밖으로 내놓은 것도 아니고 눈으로만 했으면 뭐. 눈매가 썩 유순하게 생긴 사람이 아니니 주혁이 오해했을지도 몰랐다.

심상찮은 주혁의 표정에 저는 석주가 테이블을 엎었거나, 술병으로 누구 머리를 깼거나, 손도끼로 누구의 팔을 잘랐거나, 뭐 그런 수준의 일을 친 줄 알았단 말이다.

그래. 이 세상의 석주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아진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데. 주혁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그리고 매우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읊조렸다.

“나 저번에 술 취해서 너한테 업히고 싶다고 장난치다가 석주 형한테 잡혀서 어깨 빠져 가지고 응급실 갔잖아, 씨발.”

“…….”

“술 처마시면서 ‘내 어깨를 봐, 탈골됐잖아.’ 노래를 뒤지게 부르긴 했다만 진짜 탈골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 형 조용하게 있으면서 뒤로는 무술을 갈고닦는 게 틀림없어. 무슨 힘이, 존나, 아우…….”

“…….”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그건 좀, 음, 그건 좀 그렇네.

아니, 석주 딴에는 비서로서 할 일을 한 게 아닌가. 주혁은 척 보기에도 저보다 십수 킬로그램은 더 나가는 덩치를 갖고 있으니까. 혹 제가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업무에 지장이 갈까 봐-까지 생각하는데.

주혁이 검지로 아진의 말랑한 뺨을 쿡쿡 찔렀다.

“근데 네가 제일 문제야.”

“……내가?”

아진이 말간 얼굴로 되물었다. 주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너 그럴 때마다 졸라 처웃잖아.”

“……웃어?”

“엉. 일부러 그러는 거 티 난다고.”

“뭘?”

“일부러 석주 형 빡치는 짓만 골라서 하는 거 알겠다고. 존나 사디스트처럼.”

“……사디, 스트…….”

아진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사디스트. 영어 같은데. 머리를 굴려 봐도 뜻이 떠오르질 않았다. 원래의 아진이 잘 쓰지 않았던 영어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집 가는 길에 검색해 봐야겠다.

아진이 새로운 단어의 뜻을 유추하는 동안, 주혁은 아진이 석주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아진 본인을 위험하게 하여 석주를 괴롭히는 방법을 즐겨 쓴다며 독한 놈이라고 혀를 찼다.

아진은 어렵지 않게 그 예시를 떠올렸다. 석주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싸웠던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때 제가 석주를 협박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개새끼야. 나 집 나간다! 클럽 가서 밤새 술 처마실 거야! 누군지도 모르는 새끼랑 막 놀 거라고! 저번처럼 이상한 약 얻어먹고 병원에 실려 간다. 이번에도 응급실 전화 받고 뛰어오고 싶은가 보지!’

맞을래? 죽여 버린다. 가만 안 둔다. 뭐 그런 협박이 아니고 자신을 걸고넘어졌었다. 그리고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단숨에 다가온 석주가 곧장 사과했었으니까.

아진이 샴페인 잔을 매만지며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묘한 관계다. 석주는 본인보다 저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 맹목적이고 순종적이다. 근데 또 연인은 아니다.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이게 대체 뭘까.

아진이 고민하는데. 주혁이 아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새로운 정보를 흘렸다.

“아니, 아니지. 너보다 석주 형이 더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그 형이 제일 이상하지.”

“이상하다고? 뭐가?”

“그 형은 그렇게 안 생겨서 마조 끼가 있어.”

“……마조?”

사디스트에 이어 또 다른 알아듣지 못할 단어의 등장에 아진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당장 검색해 보고 싶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주혁은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쓸데없이 열과 성을 다해서.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면 되잖아. 사장님이 술 드시는 거 싫습니다. 친구분이랑 만나는 거 싫습니다. 뭐 그렇게. 물론, 네가 그런다고 들어 처먹을 새끼냐마는 말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냐?”

“…….”

“근데 절대로 말 안 해. 네가 뭘 하든,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지켜보면서 괴로워해. 뭔 벌 받는 사람처럼 꾹 참고 있어. 힘들면 거리를 좀 두든가. 붙어 다니긴 또 뒤지게 붙어 다녀요.”

“…….”

“그 형은 마조야. 마조. 너는 사디스트고. 으, 씨발 둘 다 변태냐?”

부르르 몸을 떤 주혁이 아진을 떠밀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아진이 휘청거리자, 주혁이 그의 팔꿈치를 잡아 다시 원래대로 앉혀 놓았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 턱을 안으로 말며 어깨를 올리는 것이다. 마치 아진에게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

아진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그에 주혁이 슬쩍 눈을 떴다. 그러더니 이 새끼 봐라. 오늘 진짜 이상하네. 하는 표정으로 아진을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그때. 얼큰하게 취한 남자 친구 하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야, 야. 내 생일 선물 가져오라고 한다?”

친구들이 느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친구가 직원에게 눈짓했다. 직원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직원이 널찍한 금색 쟁반을 테이블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며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았다. 주문한 친구는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쟁반 위로 얼굴을 갖다 댔다.

포털 검색창에 [사디]까지 적어 놓았던 아진이 쟁반을 구경했다.

그곳엔 핸드폰 반만 한 크기의 투명한 비닐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비닐봉지 안엔 정체 모를 하얀 가루가 조금씩 소분되어 있었고. 또 한편에는 손톱만 한 크기의 동그랗고 하얀 알약 열댓 개가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아진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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