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7화 (17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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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알은체를 시작으로 그들의 시선이 휙휙 아진에게 박혀 왔다.

    “어, 아진이 왔냐!”

    “뭐야. 오빠 웬일로 시간 맞춰 왔어? 열 시는 되어야 올 줄 알았더니.”

    “강 비서는? 안 보이네. 혼자 왔어?”

    “야이씨, 석주 형 없으면 땡큐지. 이리 와, 이리 와.”

    모두 아진을 반가워했다. 눈을 맞추며 웃었고, 환영했으며, 이리저리 비켜서서 당연하게 아진의 자리를 만들었다. 짧은 순간이었는데 아진은 본인이 이들과 친구라는 걸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긴장이 설렘으로 바뀌었다. 아진은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바쁘게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점심시간. 석주가 단체 사진을 보여 주며 친구들의 이름을 알려 주었었다. 오늘 생일잔치의 주인공인 ‘쭈혁쓰’는 눈썹이 짙고, 아랫입술이 통통한, 욕설이 넘치는 언행과 달리 잘생긴 얼굴의 남성이었다.

    아진은 어렵지 않게 그를 찾아냈다. 주혁이 눈썹을 올리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진을 답삭 끌어안았다. 주혁은 덩치가 컸다. 석주보다는 못하지만, 아진보다 한 뼘은 더 컸다. 손등에 핏줄이 불룩불룩 올라와 있는 걸 보아 힘도 좋을 것 같았다.

    “왔냐. 오랜만에 보네.”

    주혁이 아진을 벌떡 들었다가 놓았다. 통화에서와 달리 퍽 차분한 음성에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혹시 주혁이 아닌가, 제가 얼굴을 잘못 알아봤나, 걱정하는 차. 아진의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본 주혁이 꺄-, 하고 웬 새소리를 냈다.

    “뭐야, 뭐야. 롤렉스야? 오, 씨. 진짜 사 올 줄은 몰랐는데.”

    주혁의 엉덩이가 좌우로 씰룩거렸다. 아진의 표정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방정 떠는 꼴을 보아 통화했던 이가 맞는 듯했다. 주혁이 아진의 손에 들린 선물을 채 갔다. 아진이 왼쪽 손을 뒤로 은근히 숨기며 경계했다. 형이 선물해 준 시계가 채워진 손목이었다.

    “파텍필립은-”

    “농담이지, 새끼야. 그거 정진이 행님이 주신 거잖냐.”

    “…….”

    아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농담이었나. 어쩌면 주혁은 걱정했던 것만큼 그렇게 경박한 친구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빠, 여기 앉아.”

    아진이 멀뚱히 서 있자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그의 손목을 당겨 소파에 앉혔다. 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낯선 여자의 옆에 앉았다. 반대쪽 옆에는 주혁이 앉았다. 그리고 급하게 선물을 뜯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도 상체를 쭉 내밀고 구경했다.

    “이거 진짜 롤렉스 맞아?”

    “뜯어보기 전까진 모르지. 이 새끼가 또 뭔 장난을 쳤을 줄 알고.”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난? 내가?”

    그에 주혁이 주먹으로 아진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너 작년에 내 생일 선물로 가디언 변신 로봇 시계 줬잖아. 까르띠에 상자에 담아서. 어우, 내가 집에 가서 그거 뜯어 보고 존나…… 아, 하여튼 시방새…….”

    “…….”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가디언, 변신, 로봇, 시계. 이름만 들어서는 아주 멋질 것 같은데, 똥이라도 밟은 듯한 주혁의 얼굴을 보아 선물로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아진이 멋쩍게 웃는데. 시계 상자가 드러났다. 주혁은 제사라도 지내는 것처럼 상자를 아래위로 잡고 휘휘 돌렸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상자를 열었다.

    친구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그에 주혁이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상자 안에는 짙은 남색과 은색이 보기 좋게 섞인 시계가 단아하게 앉아 있었다. 주혁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오, 뭐야. 진짜 롤렉스네! 씨바, 돈 좀 들였겠는데? 하긴 너희 회사 요즘 주가 좋더라? 석주 형이 일을 존나 잘하긴 잘하나 봐. 아무튼 친구야, 고맙다. 응? 고마워. 쭈혁이 감동했어. 이게 얼마 만에 선물다운 선물이야.”

    주혁이 아진을 껴안았다. 그리고 아진의 어깨에다 볼을 마구 비볐다. 께름칙하게 그의 스킨십을 받아 내던 아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석주 형을 알아?”

    “엉?”

    “아니야.”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주혁은 중학생 때부터 친구라고 했고, 석주 역시 10년을 함께한 이니까. 두 사람은 접점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주혁은 실실 웃으며 곧장 시계를 바꾸어 꼈다. 아진이 기분 좋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제가 직접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받은 이가 좋다니 어깨가 으쓱했다. 석주가 안목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 후 본격적인 생일잔치가 시작됐다. 직원이 케이크에 불을 붙여 주었고, 친구들은 축하 노래를 불렀으며, 샴페인이 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진은 분주하게 친구들을 관찰하며 케이크를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케이크가 참 맛있었다. 달고, 보드랍고. 한 조각 더 먹고 싶다, 생각하는데.

    “한아진 네가 웬일로 케이크를 다 먹냐. 단건 질색하는 놈이.”

    주혁이 새로이 케이크를 퍼 주었다. 접시에 케이크가 무려 세 조각이나 올라가 있었다. 아진이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주혁은 백정 놈이 아닌 것 같다.

    “귀여운 새끼.”

    주혁이 키득거리며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파티는 왁자지껄하게 이어졌다. 샴페인 한 병, 와인 두 병, 위스키 한 병이 비었을 때쯤. 주혁이 손뼉을 짝짝 치며 시선을 끌었다.

    “야, 야. 들어 봐.”

    달짝지근한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아진이 주혁을 쳐다봤다. 주혁이 맞은편을 향해, 정확히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단발 머리의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자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아 왔다.

    “우리 다시 사귄다.”

    “또?”

    “미친.”

    “다현이 여기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친구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사귀어?”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아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시간이 지나서인지, 주혁이 그새 편해졌다.

    “연애한다고.”

    “……연애.”

    그러니까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아진이 주혁과 다현을 번갈아 봤다. 친구들이 우우, 하며 야유했다.

    “대체 몇 번째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게.”

    “여섯 번? 아니, 일곱 번이던가?”

    “당사자인 쟤들도 모를걸?”

    적나라한 비아냥에 주혁이 턱을 추켜올리며 짜증스레 말했다.

    “변태냐. 그런 걸 왜 세. 다시 만난다는 게 중요하지. 그치, 자기야.”

    “그럼, 자기야. 근데 나는 셌어. 아홉 번째야. 이번이.”

    다현이 사르르 눈을 휘며 말했다. 그에 주혁이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작위적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으응, 그랬구나. 우리 자기. 기억력도 좋지.”

    시트콤 같은 두 사람에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함께 웃던 아진이 주혁에게 다시 물었다.

    “헤어졌다가 또 만나는 거야?”

    “어. 그래도 이번엔 좀 길지 않았냐. 우리 한 달이나 연락 안 했어. 이번에는 진짜 헤어지는 줄 알고 좀 쫄았다니까. 이번에야말로 무릎을 꿇어야 하나, 마음먹고 있었다.”

    아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게 돼?”

    “뭐가? 무릎 꿇는 거? 씨바, 우리 다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아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거.”

    “안 될 건 또 뭐야.”

    주혁이 아진의 빈 잔에 샴페인을 따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너 왜 위스키 안 마시고 이거 마시냐. 단 술 싫어하면서. 오늘 묘하게 낯설다, 너.”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물음을 가볍게 무시한 아진이 대화를 이어 갔다.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이별해 놓고 다시 만나는 거.”

    주혁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아진의 양쪽 뺨을 짓눌렀다.

    “……이거 시비? 시비 맞지? 뭔데 또. 왜 기분이 안 좋은데.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개 같더라니. 석주 형이랑 싸웠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보나 마나 네가 이상한 데에 꽂혀서 석주 형 괴롭히는 중이겠지.”

    “아닌데. 안 싸웠는데.”

    볼이 눌린 아진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근데 왜 이래.”

    “신기하잖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건데 되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뭐, 어떻게 아무래야 하는데?”

    “어……, 그러니까…… 좋아 보인다고.”

    “그럼 좋지. 다시 만났는데. 안 좋을 건 또 뭐야.”

    주혁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아진의 뺨을 놓았다. 그리고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켜는 다현의 손을 잡아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찡긋, 하고 익살맞게 윙크를 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허공에 토하는 흉내를 냈다.

    “헤어진 건 안 중요해. 우리 자기가 날 사랑하고,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

    “그리고 이렇게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뭔가, 어, 뭔가 존나, 좋아. 이 관계가 애달프고 사랑스럽고, 어? 우리가 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사랑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3주년 기념일 까먹어서 차인 새끼가 고난과 역경 이 지랄. 다현이가 보살이지, 븅신아.”

    다른 친구가 비아냥거렸다. 주혁이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들었다.

    “여물어.”

    “여물어.”

    친구가 턱을 으스대며 주혁의 말을 따라 했다. 주혁이 술잔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까먹은 거 아니거든. 착각한 거거든. 5월인데 4월인 줄 알았다고.”

    “그게 까먹은 거지.”

    “아니, 저저번 달이 4월인 줄 알았다고. 5월을 4월로 살고 있었다고, 나는. 진짜 안 까먹었어. 달력에 표시도 해 두고 호텔 예약도 해 두고 선물도 미리 사 놨단 말이야.”

    그 말에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진도 한심하다는 듯 주혁을 쳐다봤다. 참 새롭게 모자란 친구였다. 아진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 친구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저 오빠 새끼는 다현이 언니한테 지극정성인데, 그냥 대가리가 모자라서 맨날 차이는 거야.”

    “대가리 좀 모자라도 괜찮아. 귀엽잖아.”

    다현이 입술을 휘며 웃었다. 그에 주혁이 수줍다는 듯 어깨를 뒤틀었다. 친구 한 명이 주혁의 얼굴에 셀러리를 집어 던졌다.

    “진짜, 씨발, 둘 다 꺼지세요, 그냥.”

    우스운 상황에 아진이 나직이 웃었다. 친구들이 참 다채롭게 질이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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