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6화 (17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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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라고 오라는데. 잔치라도 하나 봐요.”

“잔……치가 아니라 파티입니다.”

“아. 파티……. 근데 누구예요?”

아진은 당연하다는 듯, 석주에게 ‘쭈혁쓰’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석주 역시 당연하다는 듯 답을 알려 주었다.

“사장님 친구분이십니다.”

“……저 친구도 있어요?”

“예.”

“그 친구가 이 쭈혁이라는 사람이고?”

“예. 중학생 때부터 친구셨습니다.”

“절교하고 싶어요.”

아진이 의자에 축 늘어졌다. 이래저래 복잡해진 머릿속에 두통이 일었다. 홀딱 벗고 찬물 아래에 서거나, 어디 가서 신나게 뜀박질이나 하고 싶었다.

저런 백정 같은 놈을 친구로 뒀다니. 사내놈이 귀를 뚫고 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걸 알았지만 이렇게 막살았을 줄이야. 모름지기 인연은 신중히 맺어야 하는데.

절교라는 단어에 석주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말리진 않았다. 아진이 진심으로 절교하겠다고 하면 은근히 부추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내 친구는 쭈혁이라는 사람 한 명뿐이에요?”

아진이 고개를 옆으로 흘리며 물었다.

“아뇨. 자주 만나는 분이 몇 분 더 계십니다.”

석주가 서류철을 세로로 세워 책상을 짚었다. 길쭉하면서도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것을 흘끔 본 아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더 있다니 쭈혁이라는 백정 하나 정도는 절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친구 같은 거 아예 없어도 상관없고. 가족이 셋이나 있는데, 뭐.

입술을 씰룩거리던 아진이 아, 하며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근데 쭈혁이가 생일 선물로 이거 달래요. 이게 그 파, 파텍, 어쩌구 맞아요?”

재킷이 올라가며 반짝반짝한 시계가 드러났다. 아침마다 석주가 손수 시계를 골라 주는데, 줄줄이 나열된 수십 개의 시계 중에 그의 선택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이었다. 깔끔하고 세련되었으면서도 크기가 크지 않고 가벼워서 아진도 좋아했다.

석주가 단칼에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형님이 재작년에 사장님 생일 선물로 주신 겁니다.”

“정……진이 형이요?”

“예. 한정판으로 나온 거라 다시 구하기도 힘듭니다.”

“한정판이 뭔데요?”

“세상에 몇 개 없는 물건이란 뜻입니다.”

“근데 쭈혁이라는 놈이 이걸 달라고 한 거예요? 진짜 미친놈 아니야…….”

역시 절교해야겠다. 아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는데. 석주가 느슨히 웃으며 그를 달랬다.

“걱정 마세요. 제가 이따 점심시간에 적당한 것을 사 놓겠습니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서류철을 든 석주가 꾸벅 묵례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사장실을 나섰다. 아진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석주가 사라진 후. 허공을 크게 둘러보았다. 에어컨 냉기만 넘실거리는 공기가 허탈했다. 석주의 방문으로, 아른거리던 또 다른 석주의 환상이 사라져 버렸다.

“하아…….”

아진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데. 핸드폰에 반짝하며 불이 들어왔다.

[쭈혁쓰

7시. 청담동. 파텍필립 지참.]

곁눈질로 메시지를 확인한 아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백정 같은 놈…….”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얼떨결에, 친구라곤 하지만 얼굴도 모르고, 곧 절교할 이의 생일잔치에, 아니 생일 파티에 참석하게 됐다.

* * *

차가 낯선 주차장에 들어섰다. 집 주차장처럼 깔끔하지도, 회사 주차장처럼 넓지도 않은 주차장은 보랏빛과 분홍빛, 그리고 하얀 네온사인 빛이 규칙 없이 뒤섞여 신기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늦은 오후, 석주가 가져다준 검은 셔츠에 슬랙스로 옷을 갈아입고 앞머리까지 시원하게 올린 아진이 신기하다는 듯 주차장을 둘러봤다.

석주는 몇 번 와 본 듯 익숙하게 주차했다. 그러곤 차 뒷좌석에 놓여 있던 손바닥만 한 선물 상자를 꺼냈다. 점심시간, 그가 주혁의 선물로 사 온 거였다.

아진이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석주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

“네? 같이 가시게요?”

아진이 눈썹을 올렸다. 석주도 덩달아 눈썹을 올렸다.

“그럼 혼자 가시려고요?”

“네. 친구라면서요. 근데 비서님이 같이 가요?”

아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제가 사전에서 본 비서는 업무를 도와주는 이다. 물론, 석주는 제 식사도 책임지고 잠자리도 봐 주고 옷까지 골라 주지만 그 업무의 연장선이 여기까지 뻗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뭐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오늘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영 불편하단 말이다. 자꾸 다른 석주가 떠올라서.

자꾸 심술이 치솟는 것도 문제였다. 대놓고 ‘혹시 낮에 엘리베이터 같이 탔던 여자랑 섹스라는 거 했어요?’ ‘아니면 왜 그렇게 살갑게 웃어 줘요?’ ‘그 여자 말고 또 누구랑 했어요?’ ‘많이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좋을 텐데. 그게 입 밖으로 나와야 말이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배신감이 드는데, 눈앞의 석주에게 그것을 토로하면 저만 미친놈이 되는지라 그저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진이 석주의 손에서 상자를 빼내려는데. 석주가 꽉 아귀에 힘을 줬다. 그의 눈매가 은근히 오르막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항상, 함께 갔었습니다.”

“오늘은 혼자 갈게요.”

“하지만 저는 늘 사장님 곁에-”

“괜찮다니까요.”

아진이 살짝 짜증이 담긴 손짓으로 선물 상자를 빼앗았다.

“…….”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 하루를 돌이켜 봐도 걸리는 게 없었다. 또 뭐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가늠이 안 됐다.

석주가 어쩔 줄 모르고 주먹을 말아쥐는데. 아진이 달칵, 안전띠를 풀며 물었다.

“아, 혹시 비서님 제 친구들이랑도 친해요?”

“……아니요. 안면이 있는 정도입니다.”

“그럼 나 혼자 다녀오는 게 맞네.”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식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그게 맞다. 비서가 윗사람의 사적인 자리에 뭣 하러 참석하겠나. 허나 ‘우리’ 사이에서는 맞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석주는 약속 장소로 찾아가는 법을 상세히 일러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아진이 돌연 짧게 탄식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근데 집에는 어떻게 가지.”

“……제가 여기 있을 겁니다.”

석주가 운전석 등받이에 등을 묻으며 대답했다. 아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여기 있을 거라고요? 저 기다리겠단 말이에요?”

“네.”

“계속? 혼자? 차 안에서?”

“예.”

“심심…… 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할 일도 있고.”

석주가 뒷좌석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곳엔 석주의 태블릿과 서류가 놓여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가 그러겠다는데 제가 말릴 이유는 없었다. 또, 그가 지척에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세요, 그럼.”

아진은 선물을 챙기고 문고리를 쥐었다. 근데 어째 석주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왔다. 아진이 그 집요한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을 때였다. 석주가 자신의 안전띠를 풀었다.

“엘리베이터까지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쯤 되니 유난이었다. 차 문밖으로 몸을 빼던 아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석주를 뒤돌아봤다.

“들어가 보면 있겠죠. 혼자 다녀올게요.”

“…….”

줄줄이 이어지는 거부와 거절에 석주의 뺨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의 손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가,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다가, 튼실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훅 체념의 한숨을 내뱉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네.”

“혹 매운 음식이 있으면 피하시고.”

“음……. 네.”

“핸드폰은 가까이 두시고.”

“알겠어요.”

아진이 심드렁한 낯으로 대답했다. 이제 그만 가고 싶었다. 아진이 다녀올게요, 하며 완전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데. 석주가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술 취하면 웃음이 헤퍼지시니까 너무 많이…… 웃지도 마시고.”

“뭐라고요?”

아진이 잘 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석주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

아진이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주차장을 가로지르는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실쭉거리고야 말았다.

웃지 말라고? 자기는 회사 직원들한테 방긋방긋 잘도 웃으면서. 왜 나한텐 웃지 말래? 개새끼.

“짜증 나, 정말…….”

아진이 구둣발로 바닥을 툭 찼다.

아진은 석주가 일러 준 대로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꼭대기 층에서 내린 후, 직원이 다가오면 그를 따라갈 것. 이미 아진을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겠지만, 혹여 일행이 있냐 묻거나 예약을 했냐 물으면 ‘정주혁’이라는 이름을 댈 것.

그가 당부해 준 대로 했더니 아진은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은 복도를 앞장서 걷던 직원은 두툼하고 무거워 보이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널찍하면서도 화려한 공간이 나타났다.

룸은 세련됐고, 값비싸 보였다. 사면을 두른 통창은 서울 야경을 고스란히 담아냈고, 천장엔 커다랗고 반짝이는 샹들리에도 걸려 있었다. 금빛과 주홍빛이 적당히 섞인 조명이 여기저기서 넘실거렸으며, 내부 온도는 조금 싸늘할 정도로 낮게 유지되고 있었다.

수십 명이 들어가서 놀아도 될 만큼 큰 공간이었는데, 안에 있는 이는 고작 여덟뿐이었다.

친구로 추정되는 남자 넷에 여자 둘, 그리고 바텐더와 직원이 각각 한 명씩이었다.

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에는 여섯 명이서는 절대로 다 먹지 못할 양의 이름 모를 와인과 위스키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또 다른 테이블에는 5단 케이크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아래에는 선물로 추정되는 상자와 종이 가방이 잔뜩 쌓인 채였다.

파티를 주최한 게 누구인진 모르겠으나 사치를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았다.

“…….”

아진이 작은 선물 상자를 매만지며 어색함에 눈알을 굴리는데. 그들 중 하나가 아진을 발견했다.

“한-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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