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5화 (17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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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진의 누나가 대표로 있다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호우주의보, 장마, 강수량 등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덕분에 오전임에도 세상이 온통 어두웠다.

하늘과 가까운 아진의 사장실에서는 꾸물꾸물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여름 장마를 맞이한 도시는 덥고, 눅눅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둑한 사장실에서 소파 쿠션을 껴안고 드라마를 보는 게 묘하게 안락했기 때문이다.

아진은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작년에 제작했다는 드라마였다. 올해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이라고, 석주가 보는 게 좋겠다며 언질 주었다.

그걸 한참 보다, 물을 마시러, 정확히는 얼음을 가지러 바깥에 나왔다. 석주가 알아서 시간마다 얼음이 동동 뜬 물을 주고 가나, 가끔 이렇게 직접 나오기도 했다.

컵을 두 손으로 꽉 쥔 아진이 탕비실로 향하는데. 복도 맞은편의 엘리베이터 앞에 석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뒷모습이었으나 장성한 키하며 큼지막한 등판과 쭉 뻗은 다리하며 어떻게 봐도 그였다.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팅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아진이 알은체를 할까, 말까 고민하며 뒤꿈치를 들썩이는데. 이름 모를 여자 직원이 석주의 옆에 섰다. 그리고 살갑게 석주의 팔뚝을 슬쩍 매만지는 거였다.

“강 비서님. 안녕하세요.”

사실 매만진 건 아니었다. 인사하면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제스처였다. 헌데 아진의 눈살이 꿈틀, 구겨졌다.

석주가 빙긋 웃으며 인사에 화답했다. 그 얼굴이 지나치게 멋졌다. 나른하게 접히는 눈꼬리하며, 보기 좋게 벌어지는 입술하며. 그가 직원을 향해 무어라 말을 했는데, 목소리가 낮아서인지 아진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직원 역시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보기 좋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석주가 손을 살짝 뻗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직원을 안내했다. 직원이 먼저 들어가고, 석주가 그녀를 뒤따랐다.

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 나쁘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저게 왜 익숙할까, 고민을 하기도 전에 어떠한 장면이 눈앞에 덧씌워졌다.

한옥. 마루가 깔린 복도. 원피스를 입은 창녀. 그녀를 방으로 이끄는 석주. 멋진 상박을 고스란히 드러낸 두루마기. 닫히는 방문. 어둑한 복도에 혼자 남은 저.

인상을 찌푸린 아진이 다급하게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석주가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언뜻, 닫히는 사장실 문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아진이 태블릿 화면 가운데에 뜬 재생 버튼을 눌렀다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길 반복했다. 도무지 드라마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석주가 여자 직원과 엘리베이터를 타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특별할 거 없는 장면인데. 뭐가 이렇게 거슬리고 짜증이 나는 건지.

등받이에 푹 기댄 아진이 천장을 노려봤다. 그러다 뒤늦게 짜증의 시발점을 알아차렸다. 어젯밤에 꾼 그 얄궂은 꿈 때문이다. 섹스 운운하며 석주를 놀리던 저와,

‘어른 되면 말해 줄게.’

라며 여유롭게 웃던 석주.

그래서. 그 답이 뭘까. 이제 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인데. 그 질문의 대답을 들었을까. 들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진이 책상 위로 턱을 괬다.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누구를 만나고 다녔으려나…….”

분명 예쁜 여자와 만났을 것이다. 석주는 예나 지금이나 멋진 남성이니까. 그 ‘섹스’라는 것도 많이 해 봤을 것이다. 어쩌면 난봉꾼이던 전생보다 더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제가 한 말을 말미암아, 한국에는 잘생긴 남자가 드무니까. 석주는 생김새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분명 인기가 많을 사내였다.

아진이 석주가 만났던, 아니, 만났을 것 같은 이들을 추론하며 인상을 쓰는데. 별안간 저 멀리서 낮은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사내새끼들은 다 그래. 좆 달린 것들은 원래 다 그래. 떡치고 싶어서 못 하는 짓이 없어.’

‘근데 아진아. 나도 그런 사내새끼가 맞는데.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지금은 사내새끼 이전에 죄인이라서.’

그 목소리에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의 낯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으려는데. 잠깐 끊겼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내 방에 들어왔던 이는 마담이고, 나는 그저 돈을 주었을 뿐이다. 오늘치 값을 치러 주었어.’

“…….”

‘아무것도 안 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니, 애당초 잊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대화를 나누던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또렷이 떠올랐다. 아진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아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먼 과거에서 온 새카만 눈동자가 아진을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너밖에 없어.’

‘널 만나고 다른 이를 품은 적도, 품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어. 찰나도. 단 한 순간도.’

‘이제 네가 아닌 그 누구와도 밤을 보내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거짓말쟁이인 내 말에 무슨 신뢰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약속하마.’

낮게 깔린 저음에 아진의 귓바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넋이 빠진 아진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자 석주의 환영이 점점 또렷해졌다. 이렇게 한나절 있으면 그 환영이 실재가 될 것 같았다. 그가 시야를 가득 메운 환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똑똑. 누군가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결재받으러 왔습니다.”

서류철을 든 석주였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아진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괜히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석주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아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주는 단조로운 몸짓으로 서류철을 하나하나 아진의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서명이 필요한 곳을 가리켰다. 아진이 그곳에다 이름을 날려 썼다.

결재는 금방 끝났다. 서류에 가득한 활자를 읽지 않으니 순식간이었다. 석주가 서류철을 포개며 물었다.

“얼음물 갖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의 눈가에 묘하게 먹구름이 스며 있었다. 석주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설핏 눈살을 구긴 그가 눈짓으로 에어컨 온도를 확인하고, 태블릿 화면도 확인했다. 허나 특별할 게 없었다. 그가 걱정을 말하기 위해 막 입을 떼는데.

돌연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노랫소리였다. 시발지는 책상 한편에 뒤집힌 아진의 핸드폰이었다.

미간을 좁힌 아진이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는 드문 일이었다. 아진은 핸드폰을 오로지 사전으로 썼다. 백과사전.

그도 그럴 게, 석주는 온종일 붙어 있어 연락할 일이 없었고, 선화 역시 통화는 잘 하지 않았다. 일이 생기면 석주에게 전화했다.

이따금 형이나 누나에게서 전화가 오긴 했지만, 받지 않았다. 어색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하고. 그들과 관련한 기억은 거의 떠오르질 않아서 말만 가족이지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화가 끊기면 석주의 도움을 받아 전화를 받지 못해 미안하다, 무엇을 하고 있다, 나중에 연락하겠다 등의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 덕에 이제 이모티콘을 쓸 줄도 알았다. 전에 했던 메시지를 복습한 결과, 아진은 형과 누나에게 애교가 아주 많은 막냇동생이었다.

또 형이려나. 아니면 누나?

아진이 화면을 내려다봤다.

[쭈혁쓰]

두어 번 정도 본 이름이 떠 있었다. 아진이 화면을 석주에게 보여 주었다. 석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어색하게 녹색 아이콘을 스와이프한 아진이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하고 상투적인 말을 하기도 전에.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아진?

“네, 그런데요.”

-뭐가 ‘그런데요.’야 이 새끼가.

“……새끼?”

-내가 전화한 게 언젠데 여태까지 콜백이 없어! 섭섭해. 존나 섭섭해!

콜……백……. 영어다. 아진은 설핏 눈살을 구긴 채 고심했다. 그러고 있으면 머리 한쪽에 단어가 조각조각 떠올랐다. call back. 다시 전화하다. 그렇게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요즘 아진은 활발하게 상식을 찾아 가고 있다. 종일 회사에 틀어박혀 드라마와 영화만 봤더니 자연히 습득하게 됐다. 그렇게 얻은 지식은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과 만나 오롯이 아진의 것이 되었다.

아진이 콜백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는 동안 ‘쭈혁쓰’는 나불나불 본인의 신경질을 쏟아 냈다.

-하여튼 너는 존나 이기적인 새끼야. 지 심심할 땐 맨날 부르면서, 지 바쁘면 뒤진 것처럼 연락이라곤 없어요. 우리 사이가 아무리 막역하대도 예의는 있어야지.

“……뒤진 것처럼?”

-그래, 뒤진 것처럼. 아무튼, 오늘 내 생일인 거 알지? 7시까지 청담동으로 와! 선물 잊지 말고! 선물은 모름지기 값비싼 거. 어? 값비싼 거여야 한다. 예를 들면 파텍필립이나 롤렉스 같은 거. 뭐라고?

“파텍필립이나 롤렉스…….”

-그래, 그래. 파텍필립은 당장 살 수 없으면 네 드레스 룸에 있는 것 중에 아무거라도 괜찮아. 특히 다이얼이 남색인 거 있잖아.

“남색……. 그거 내가 지금 차고 있는 것 같은데…….”

-오, 그럼 그거 그대로 차고 와서 나 주면 되겠다. 기대할게! 이따 봐! 움, 쪽쪽!

경박스러운 뽀뽀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통화였는데 뱅뱅 도는 놀이기구를 타고 내린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만났던 이 중에 가장 격이 떨어지고 경박스러운 인간이었다. 아진의 주위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기품 있었는데. 이 ‘쭈혁쓰’라는 인간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별로였다.

새끼, 존나, 뒤진 것처럼. 단어가 다분히 천박했다. 분명 못생긴 얼굴에 욕심도 많고 방정맞을 것 같았다. 백정 꼴을 하고 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진이 깜빡거리다 홈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노려봤다. 가뜩이나 기분이 더러운데 별게 다…….

“……미친놈인가?”

작게 읊조린 그가 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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