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4화 (17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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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 아진은 익숙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의 문을 닫아 준 석주가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시동이 걸리며 차가 가늘게 진동하고, 곧 창밖이 휙휙 바뀌었다. 빗방울이 덕지덕지 붙은 시야가 어지러웠다. 타닥타닥하며 차를 때리는 빗소리도 시끄러웠다.

잠시 창밖을 보던 아진이 핸드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이제는 차가 무섭지 않았다. 제 무릎을 박살 나게 했던 집채만 한 차와, 이 세상의 차는 많이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라 그냥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인지됐다. 이따금 도로에 서 있는 커다란 차를 보면 어깨를 움찔하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묻은 아진이 핸드폰 화면을 아래에서 위로 슥슥 쓸었다. 회사에서 만든 각종 미디어 목록을 보는 거였다. 최근 일에 흥미가 생겼다. 언젠가 제가 바지사장이 아니라 진짜 사장이 될 수 있진 않을까 섣부른 기대도 했다.

집에 미디어나 영화 관련 서적이 있는 걸 언뜻 본 것 같은데. 그것도 찾아봐야겠다.

아진이 검지로 핸드폰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공부 계획을 세우는데. 곁눈질로 그를 흘끔거리던 석주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러다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사장님.”

“네, 비서님.”

아진은 곧장 핸드폰을 허벅지에 엎어 놓고 석주에게 집중했다. 그 얼굴에 그림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말갛고, 맑았다. 재차 아랫입술을 핥은 석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아진이 눈썹을 한껏 올렸다.

“비서님이요? 잘못을요? 아니요.”

“근데 왜……. 아니, 아닙니다.”

석주가 액셀을 더 깊이 밟으려는 찰나. 신호가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마치 석주가 하다 만 말을 하라는 것처럼. 석주가 옅은 한숨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안에 정적이 차올랐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형.”

아진이 조곤조곤 말했다. 호칭이 형으로 바뀌었다. 아진은 회사에선 석주를 꼬박꼬박 비서님이라고 불렀고, 바깥에서는 형이라고 불렀다. 인지하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석주는 그것을 매우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 호칭의 변화가 썩 달갑진 않았다. 형이라고 부르면서도 존댓말을 놓지 않는 아진이라. 그게 우리의 과거와 너무 달라서.

아진의 기억에 문제가 있음을 안다만, 머리는 따라가도 마음까지 따라가진 못했다.

“…….”

입을 꾹 다문 석주가 아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쁜 얼굴이 시야에 가감 없이 박혀 왔다. 석주의 검은 눈동자가 그 얼굴을 샅샅이 담아냈다.

“최근 저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아서요.”

“어……. 제가 그랬나요…….”

아진이 어색하게 모른 척을 했다. 입꼬리가 겸연쩍은 호선을 그렸다. 석주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거리를 두시면, 제가…….”

“…….”

“…….”

석주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꾸 말을 하다 마는 석주가 이상했다. 그답지 않았다. 전생의 그든, 이곳의 그든 말을 하다 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가?”

아진이 석주의 말끝을 따라 하며 다음 말을 채근했다. 그에 석주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조금 슬픕니다.”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슬퍼요?”

당신이 왜?

아니, 무엇보다 저는 석주에게 거리를 둔 적이 없었다. 자립하려 했을 뿐이고, 이 세상에 적응하려 노력했고, 석주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골몰했을 뿐이다. 근데 그게 어째서 거리를 두는 게 되나.

이해가 안 됐다.

더구나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며? 연인의 사이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라며? 근데 왜 슬픈데.

아진이 도통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석주가 다급히 자신이 뱉은 말을 수거했다.

“아니, 실언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때마침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석주가 액셀을 지르밟으며 매끄럽게 핸들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뺨에 붙은 아진의 시선은 돌아가지 않았다.

* * *

다시금 이어지는 꿈속에서, 아진은 어린 얼굴에 교복 차림이었다. 하얀색 반팔 셔츠에 회색 넥타이를 하고, 아래엔 일자로 뚝 떨어지는 진회색 바지를 입은 채였다. 그리고 그의 앞엔 지금보다 조금 앳되어 보이는 석주가 서 있었다.

석주는 면이 부드러워 보이는 흰색 티셔츠에 세미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아진이 그의 앞에 가 섰다. 쓸데없이 바짝 붙어 서서 석주를 한껏 올려다봤다. 큼지막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얀 피부가 조명을 받아 더 하얘졌다.

‘형이 새로 온 과외 선생님이에요? 와, 존-나 잘생겼다. 키도 개 커. 손도 엄청 크네?’

‘…….’

‘무서워서 못 개기겠다. 내가 계속 선생님들한테 싸가지 없이 구니까 엄마가 이번엔 말대꾸도 못 하게 형 같은 사람을 데리고 왔나 봐요.’

‘…….’

‘개겼다가 한 대 맞으면 바로 넘어가겠는데.’

아진이 거리낌 없이 석주의 팔뚝을 주물거렸다. 팔뚝이 어찌나 크고 두꺼운지 한 손에 다 잡히질 않았다. 와, 하고 감탄하던 아진이 또 종알종알 캐물었다.

‘전공이 뭐예요? 몸 쓰는 거죠? 스포츠, 체육, 뭐 그런 거 관련?’

첫 대면 이후 아진에게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있던 석주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경영학 전공이고, 나는 사람 안 때려.’

묵직한 저음에 아진이 소름이 돋는다는 듯 장난스레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 골 때리는 대답이네.’

킥킥거리며 웃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석주를 올려다봤다. 작고 마른 몸에 장난기와 애교가 조화로이 뒤섞여 있었다. 구김살도 없었고,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저 형 마음에 들어요. 저는 한아진. 한아진이에요. 형은 이름이 뭐예요?’

‘……강석주.’

‘응, 석주 형. 아니, 선생님인가. 석주 선생님. 부단-히 노력해서 제 성적 좀 올려 주세요.’

‘…….’

‘그래야 우리가 오래 보지.’

아진이 석주를 빤히 보며 웃었다. 그 말간 웃음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석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장면이 바뀌었다.

아진과 석주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등 뒤로 익숙한 서재가 보였고, 두 사람의 앞에는 온갖 참고서가 펼쳐진 채였다.

아진이 샤프를 인중에 가로로 올리며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석주가 무어라 무어라 말하고 있는데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아진이 갖고 놀던 샤프가 툭 떨어졌다. 석주가 그 샤프를 주워 아진에게 내밀었다. 배시시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든 아진이 또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쌤 농구 잘해요? 키도 크고 손도 크니까 존나 잘하겠네요.’

‘글쎄.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저랑 같이 농구 해요. 제가 운동 되게 좋아하는데, 농구는 잘 못해. 키가 작아서 그런가 봐. 아니 그래도 나름 평균인데 잘 못해요.’

‘아진아.’

‘이따 해요. 네?’

‘하아……. 그래. 근데 일단 공부부터.’

석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샤프를 고쳐 들었다. 그리고 문제집에 이것저것 끄적인다 싶더니 또 석주를 보며 종알종알 입술을 놀려 댔다.

‘근데 쌤은 봐도 봐도 잘생겼다. 학교에서 인기 많죠?’

‘아니.’

‘개뻥. 한국에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귀한 줄 알아요? 우리 누나가 결혼은 하고 싶은데 잘생긴 남자가 없어서 못 하겠대요. 그래서 유학도 스웨덴으로 갔어. 잘생긴 남자 찾는다고.’

‘…….’

‘이런 현실에, 한국에서, 쌤 얼굴에 인기가 없다? 말이 안 돼. 쌤이 게이면 또 모를까. 아니 게이라도 인기랑은 상관이 없는데.’

아진이 흠, 하고 목으로 탁음을 내며 턱을 괬다. 석주의 얼굴을 보다가, 허공을 보다가 또 얼굴을 보는 것이, 보나 마나 허튼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석주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삐뚜름하게 틀어진 아진의 의자 다리를 커다란 손으로 잡아 자신 쪽으로 바짝 끌고 왔다. 아진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석주의 팔뚝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진아.’

‘응?’

‘책이나 봐.’

‘아이, 뭐야……. 시시해.’

‘자, 여기부터. <위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납부하는 보험료와 지급받는 보험금은 그 위험 공동체의 사고 발생 확률을 근거로……>’

석주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국어 지문을 읽어 가는데. 아진이 석주의 팔뚝에 턱을 괴며 물어 왔다.

‘쌤 그럼 섹스는 해 봤어요? 당연히 해 봤겠지?’

석주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마를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제 몸에 붙은 아진을 밀어 내진 않았다. 그의 눈가에 피곤이 묻어났다.

‘하아……. 너 다른 과외 선생님한테도 그런 거 물어보고 그랬어? 그거 성희롱이야.’

‘내가 그걸 왜 물어봐요. 남의 섹스 사정이 뭐가 궁금하다고.’

‘근데 나한텐 왜 물어.’

‘쌤은 궁금하니까?’

아진이 찡긋 윙크했다. 풍성한 속눈썹이 깜찍하게 팔랑거렸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진이 그에게 더 바짝 붙었다. 고목에 붙은 매미 꼴이었다.

‘아 그래서. 해 봤냐고요. 어? 왜 대답을 안 해 줘?’

석주가 한숨을 내쉬며 샤프 뒤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다 아진의 뺨을 크게 감싸 쥐었다. 아직 어린 살결이 손바닥에 온통 들어찼다. 고개를 슬쩍 숙인 그가 아진과 지그시 시선을 맞추며 읊조렸다.

‘어른 되면 말해 줄게.’

그 낮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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