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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이 잔뜩 벼려진 눈으로 석주를 노려봤다. 쉽게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요량인 듯했다. 심술로 퉁퉁해진 아진의 뺨을 보던 석주가 나직이 말했다.
‘이리 와. 재워 줄 테니까.’
그는 이리 오라고 해 놓고 본인이 아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걸음 남았을 때. 아진이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널찍한 가슴을 쿡 정수리로 찍었다.
‘너 미워.’
‘알아.’
‘너 싫어.’
‘알아.’
석주가 아진의 뾰족한 팔꿈치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아진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안아 줘. 화냈더니 더워. 토할 것 같아.’
‘……그래.’
석주가 아진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겼다. 반대 손으로는 뒤통수부터 등줄기까지 쓸어내렸다. 정말 열이 난 모양인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석주가 정성껏 그를 도닥였다. 제 몸으로 옮아오는 열이 반가웠다.
‘사장님이라고 하지 마. 아진아, 하고 이름 불러.’
그의 품에 안긴 아진이 웅얼웅얼 말했다. 그러더니 석주의 허리를 슬쩍 감싸 안았다. 그 손길을 느낀 석주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럴게.’
담백하게 대답한 석주가 애정을 가득 담아 아진을 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진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있던 그가 다시금 잘못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아진아.’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 짧은 사과의 말이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웅웅 울리며 퍼져 나가던 목소리가 두껍고 짙게 쌓였다. 마치 목소리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운 듯한 기분이었다. 아진은 그곳에서 한참 동안 뒹굴다,
“하아…….”
잠에서 깨어났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들린 건 빗소리였다. 소리가 크고 두꺼운 게 장대비 같았다. 묵직하게 쳐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 왔는데, 거기에 빗방울 그림자가 아롱아롱 맺혀 있었다.
그 소리를 멍하니 듣던 아진이 헐겁게 덮고 있던 이불을 마구 걷어찼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눈이 뜨끈뜨끈했다. 손을 휘저어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냈다. 이제 익숙해져서 리모컨을 보지도 않고 온도를 마구 내리는데, 이미 최하를 찍고 있는 온도는 더 내려가지 않았다.
등줄기가 축축했다. 딱히 무섭거나 괴로운 꿈을 꾼 것도 아니거늘 땀이 났다. 몸 자체에 열이 많다 보니 자면서 땀을 흘리는 게 익숙했다.
뒤척거리던 아진이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벗으며 욕실로 들어가, 찬물 아래에 섰다.
“으…….”
아진이 물을 맞으며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뇌가 덜그럭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요즘 꿈을 꾸는 빈도가 높다. 가뜩이나 치미는 열기 때문에 잠을 잘 못 자는데, 짧은 꿈을 계속해서 꾸니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 꿈은 여태 꾸었던 꿈보다 길었는데도 잠든 지 고작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나날이 벌써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밤이 지나치게 길고, 더웠다. 달이 해처럼 느껴졌다.
꿈을 꿀수록 꿈속의 ‘아진’과 제가 뒤섞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제가 원래의 그 ‘아진’인가. 제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이 덮였을 뿐인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가끔 참지 못할 정도로 더우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다 깜짝 놀라곤 한다. 목이 마를 때마다 뭘 자꾸 찾는데, 자면서도 옆을 더듬거리는데, 뭘 찾는 건지 모르겠다.
아진이 고개를 쳐들고 차가운 물을 온 얼굴로 맞았다.
석주의 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의 차갑고 단단한 품과, 등을 쓰다듬어 주던 청량한 온도가 그리웠다.
밤벌레 소리가 요란하던 전생의 여름밤. 갈급하게 저를 찾던 석주가 이러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사람을 떠올리면 안 돼. 아진이 혼잣말을 읊조리며 차가운 욕실 벽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가슴팍을 슥슥 문질렀다. 제 가슴에 박혀 있는 총알과 가시의 존재감을 되새기면서.
* * *
비가 콸콸 쏟아지는 흐린 아침. 아진은 출근 준비로 바빴다. 회사에 가서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그냥 책이나 읽고, 밥이나 먹고, 태블릿 화면으로 영화를 보는 게 단데. 그래도 일단 씻고, 차려입고 나간다는 것 자체가 크게 다가왔다. 전생에선 이렇게 매일 나갔던 적이 없어서. 도박장에서든, 석주의 집에서든 내내 한 공간에 머물렀던 터라.
정장을 입은 아진이 제법 익숙한 손길로 손목시계를 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전으로 쓰는 핸드폰을 챙겨 방문으로 향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석주였다.
“사장님. 넥타이-”
석주의 말이 끝을 보지 못하고 끊겼다. 그의 시선이 아진의 목으로 향했다. 이미 넥타이를 하고 있는 아진의 목 말이다. 석주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진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제가 혼자 했어요. 핸드폰으로 찾아보고. 저 이제 검색도 잘해요.”
“…….”
“좀 삐뚤삐뚤하긴 한데 괜찮죠?”
아진이 넥타이 매듭을 쥐고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석주는 그 손가락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넥타이는…… 원래도 할 줄 모르셨는데요.”
“어, 정말요? 그럼 매번 형이 해 줬어요?”
“예.”
“아침마다?”
“예.”
“하루도 빠짐없이?”
석주가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입을 뗐다.
“가끔 제가 못 챙겨 드리는 날이 있긴 했죠.”
“그런 날에는요?”
“넥타이를 가지고 회사로 나오셨습니다.”
“와……. 나 형 진짜 귀찮게 했구나.”
아진이 민망하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형 일 하나 덜어 줬네요. 앞으로는 안 해 주셔도 돼요.”
“…….”
반가워할 소식이었다. 모시는 상사가 넥타이를 할 줄 몰라 매일 아침 그의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그게 사라졌으니 아진의 말마따나 일이 하나 줄어든 게 맞았다.
그러나 석주는 어째서인지,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 * *
출근 후, 아진을 사장실까지 안전히 데려다 놓은 석주가 곧장 등을 돌렸다. 업무 관련 서류를 챙겨 오기 위함이었다. 이제 몸에 익어 버린 루틴이었다. 아진이 출근한 이후로 내내 그의 사장실에서 업무를 본 터라.
“금방 짐 챙겨서 오겠습니다.”
근데.
“아니요. 괜찮아요. 비서님 자리에서 일 보세요.”
아진이 태블릿을 켜며 거절을 내놓았다.
“…….”
석주가 휙 아진을 뒤돌아봤다. 익숙하게 태블릿을 두드리던 아진이 옅게 웃었다.
“이제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며칠 나왔다고 적응했나 봐요. 비서님도 원래 자리가 편하실 텐데, 거기서 일 보세요.”
그리 말한 아진이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에 회사에서 제작했다는 영화가 재생됐다. 시한부 소년이 버스를 타고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 농촌에 사는 수더분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는 이야기였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이 주된 배경이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파 쿠션을 껴안은 아진이 화면에 집중했다.
“…….”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보던 석주가 까딱 묵례하고는 느린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점심은 두 사람이 함께 먹었다. 아진은 영화에 대해 조잘조잘 물어보다가 나중엔 그런 영화를 만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요즘 회사에서 만드는 영화는 어떠한 것인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제법 심도 있게 물어보았다.
석주는 잘 키운 아들을 보는 부모의 눈빛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아진은 잠자코 듣다가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석주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다. 사전과 지식 백과를 넘나드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뭐더라, 어, 시나리오는 형이 보고 선택하는 거예요?”
“아니요. 담당 부서가 따로 있습니다. 전 그쪽으로 크게 재능이 없어서요.”
“그럼 형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경영 쪽 일을 맡아 합니다. 각 부서에서 결정되어 올라오는 마케팅, 인사, 투자 관련한 것들을 최종적으로 검토합니다. 보통 사장님이 하시는 일인데, 제가 대신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회사가 만든 미디어 목록에 말랑하고 따뜻한 것도 많더라니. 제가 석주의 취향을 뭐 얼마나 알겠느냐마는, 오전에 보던 영화의 줄거리는 석주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칼로 사람 배를 쑤시고, 피가 난무하는 그런 게 어울……, 까지 생각하던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석주는 깡패가 아니다. 그저 예의 바르고 일을 열심히 하는 똑똑한 사람일 뿐이란 말이다.
헷갈리지 말자.
아진이 숟가락을 고쳐 쥐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 석주가 물었다.
“컴퓨터 하는 법, 알려 드릴까요?”
“컴퓨터요? 저거, 제 책상에 있는 저거요?”
“네.”
“좋아요.”
아진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석주는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아진이 이미 핸드폰을 다룰 줄 아는지라 설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맞는 자리에 올려 줬더니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면서 신기해했다.
짧은 가르침이 끝나고, 아진이 생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비서님.”
“네.”
까닥 묵례한 석주는 당연하게 아진의 옆에 서 있었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는 내내. 아진이 이것저것 건드려 보고 눌러 보고 딸깍거리는 걸 보고 있었다. 아진이 폭탄을 만지는 것도 아닌데 심각하게 걱정하는 낯빛이었다.
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던 아진이 넌지시 말했다.
“저 혼자 더 해 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또 물어볼게요. 비서님 일 보세요.”
“…….”
석주의 눈매가 매가리 없이 풀어졌다가 느리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아진의 말은, 친절하긴 했으나 결국엔 그 뜻이었다. 옆에 있는 게 불편하니, 혹은 거슬리니 나가 달라는.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은 석주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