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1화 (17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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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이 헛숨을 크게 삼켰다. 짧은 과거의 기억들이 산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저 일하러 가야 해요. 설거지도 해야 하고 복도도 닦아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해요.’

    ‘뭐?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한다고-’

    ‘괜찮아요. 원래 아플 때도 일했어요. 제 일이니까요. 제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해야 해요.’

    항상 그랬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설거지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사장님이 하시냐고요.’

    ‘뭐 어때. 내 거 내가 닦는 건데.’

    ‘이건 제 거예요!’

    ‘네 거야? 네가 샀어?’

    ‘아니, 아니, 제 일이에요!’

    석주가 저를 도와주려 하면, 저는 제 일을 운운하며 그를 거부했었다.

    ‘가자.’

    ‘……어디를요?’

    ‘방에. 춥잖아.’

    ‘이것만 하고 갈게요. 다 해 가요. 먼저 가 계세요.’

    ‘싫어. 지금 가.’

    ‘제 할 일이에요. 제가 저번에 말했죠. 제가 일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제 일을 해야 한다고. 가서 기다려요. 귀찮게 하지 말고.’

    그때를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진이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석주가 얼른 아진을 살폈다.

    “어디 아프십니까? 두통? 병원에 갈까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유난에 아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상하지. 그의 걱정에 치밀던 짜증이 가라앉았다. 저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아진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내젓자 석주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커피는 어떤 거로 다시 가져다드릴까요.”

    “……나도 몰라요.”

    “단거로 갖다 드릴까요?”

    아진이 끄덕끄덕 턱을 주억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그에 석주의 손이 무심코 그의 머리칼로 향했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석주는 청소 도구를 챙겨 사장실을 나섰다. 속박이 풀린 아진은 다리로 의자를 밀어 책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갈피가 끼워진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주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 그의 손에 들린 건 유리잔이 아니라 꼬부랑글씨가 쓰인 플라스틱 컵이었다. 만든 게 아니라 사 온 모양이었다.

    커피는 맛있었다. 차갑고, 달짝지근하고 약간 고소하기도 했다. 만족스럽게 커피를 빨던 아진이 돌연 그것을 석주에게 불쑥 내밀었다.

    “비서님도 드실래요?”

    “…….”

    석주가 머뭇거렸다. 아진이 살랑살랑 커피를 흔들었다. 얼음이 저들끼리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에 보일 듯 말 듯 하게 인상을 쓴 석주가 고개를 뒤로 뺐다.

    “괜찮습니다. 제가 찬 걸 잘 못 마셔서.”

    “……뭐라고요?”

    “감기에 걸리면 업무에 방해가 됩니다. 물론 사장님을 모시는 데도요.”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찬 걸 못 마셔?

    석주가?

    감기에 걸려?

    석주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놀라운 소리도 아니었다. 근데 어쩐지 심장이 철렁했다. 아주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것처럼.

    커피를 내려놓은 아진이 붉게 언 입술을 달싹였다.

    “술.”

    “예?”

    “술은요? 술은 잘 마셔요?”

    “잘, 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이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아서.”

    아진이 숨을 들이켜며 또 다른 것을 물었다. 누군가의 흔적을 찾는 그의 낯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그럼 담배는요? 피워요?”

    “아니요. 비흡연자입니다.”

    아진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더위를 많이 타지 않고, 차가운 것도 못 마시고, 술은 물론 흡연도 안 한다.

    진짜…… 그 석주가 아니다. 제가 알던 석주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이었다.

    갑자기 석주가 매우 멀게 느껴졌다. 그릴 수도 있을 만큼 눈에 익은 얼굴인데,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실망했다.

    저도 모르는 새 눈앞의 석주가 제가 알던 그이기를. 정장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몸에 흉터가 많고, 밤마다 더위에 괴로워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달고 살며, 저를 사랑해 주던 그이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선화가 그의 전생에 혼과 피가 많았다고 해서 혹시나 그가 아닐까, 제가 알던 석주가 그대로 환생한 게 아닐까, 혹여 나처럼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기대했는데.

    이곳은 1950년의 서울과 다르니까. 나에겐 가족이 생겼고, 저를 괴롭히던 기헌은 사라졌으니까. 새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가슴에 박힌 가시와 총알을 천천히 공들여 빼내고, 당신을 충분히 미워하고, 그러다 모든 게 해갈되었을 때. 당신과 함께할 수 있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전생에서는 깨지고 부서진 나였지만, 이 세상에서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온전해서, 우리가 다시 그때의 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석주가 석주가 아님으로써 그 구질구질한 기대가 단번에 부서졌다.

    정체 모를 감정이 북받쳤다. 아진이 고개를 푹 고꾸라트렸다. 슬펐다. 외로웠고, 겁도 났다.

    “……사장님?”

    석주가 저를 부르는 게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아진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코가 시큰거렸다.

    나는 이곳에서도 혼자야.

    또. 당신이 없어.

    * * *

    아진은 이틀간 말도 잘 하지 않고, 표정도 없이 온갖 우울을 껴안고 살았다. 낯선 세상과 낯선 가족과 낯선 석주에 대한 혼란을 뒤늦게 아파했다. 선화가 걱정을 내비쳤으나 아진은 그녀를 배려해 줄 만큼의 여유가 있지 않았다.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말수도 줄어 갔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하고,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게 어려워졌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는 선화의 성화에 꾸역꾸역 저녁을 먹었다. 허나 그렇게 먹은 밥이 소화가 될 리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밥이 명치에 턱 걸린 것 같았다.

    한껏 인상을 쓴 채 침대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별안간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정말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근데 확신이 있었다. 두 다리로 힘껏 달음박질을 치면 갑갑한 가슴이 뻥- 하고 뚫릴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그래서 늦은 밤. 초등학교 운동장에 왔다. 화단 턱에 앉은 아진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운동화 끈을 고쳐 묶었다. 그리고 학교를 둘러보았다.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학생도, 선생님도 없는 학교는 고요하고 넓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아늑했다. 건물 색깔이 보드라운 노란색으로 칠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드문드문 선 가로등 빛이 뭉근한 백색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무튼 좋았다. 설레기도 했다.

    선화에게 혹시 주변에 달리기할 곳이 없냐 물었더니 이곳을 알려 주었다.

    ‘너 예전에도 뛰는 거 되게 좋아했어. 좀 답답한 일만 생기면 한참 뛰다 왔다니까. 근데 그렇게 달리면 기분이 좋아진대. 전생에 강아지였나…….’

    라는 말도 했다. 전생에 강아지가 아니라 절름발이였는데. 아진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후우…….”

    몸을 일으킨 아진이 신발 앞코로 툭툭 땅을 차며 숨을 골랐다.

    열 살 이후로 뛰어 본 적이 없어서 꼴사납게 넘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긴 한다만.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몇 번 더 심호흡하던 아진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뿐히 뛰어 보았다. 운동화 밑창으로 단단한 흙이 느껴졌다. 그것을 밟고 선 제 발도 느껴졌고 힘이 실린 허벅지와 부드럽게 움직이는 무릎도 느껴졌다.

    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그는 조금 더 빠르게 달렸다. 머리칼이 뒤로 넘어갔다. 밤공기가 이마에 화하게 부딪쳤다. 달빛 그림자가 앞길에 차분한 장애물을 만들었다. 아진은 그 그림자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았을 때. 달리기에 푹 빠지고야 말았다.

    “하아, 하아……. 흡, 하아…….”

    그저 더워서 흘리는 땀은 짜증이 났는데, 지금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은 기분이 좋았다. 쿵쾅쿵쾅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도 좋았다. 너무 좋아서 실실 웃음이 다 나왔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이렇게 힘껏 달리는데도 전혀 아프지도, 힘겹지도 않은 건강한 다리였다.

    아진은 한동안 달리기에만 집중하다가,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고민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놓았다.

    제가 이 미래에서 해야 할 일이 뭘까. 돌아온 이유가 뭘까. 석주도 없는데. 제 전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를 뽑으라면 당연 석주와 꽃님인데, 두 사람 다 이곳에 없다. 그럼 저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전생에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라고 용왕님이 사정을 봐주는 건가. 가족이 생겼고, 돈이 많아졌고, 사장님이라는 대단한 위치에 있으니 어디 한번 행복하게 살아 보라는 건가.

    그냥 그렇게 운이 좋다고만, 팔자가 폈다고만 생각해도 되는 건가.

    “하아, 하아…….”

    아진이 잠깐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널찍한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저 혼자 있는 건 처음이다. 전생에도 없었다.

    근데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사장실에 있을 땐, 석주가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가슴이 울렁울렁했는데. 지금은 왜 괜찮을까.

    잠시 고민하던 아진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지금은 석주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랬다.

    저는 그 없이 혼자서도 잘 달릴 수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알기 때문에. 애당초 이곳에도 제 의지로, 제 두 발로 온 것이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시야가 또렷해지고, 희뿌옇던 색감의 대비가 강해졌다.

    그래. 제 인생에 꼭 석주가 있어야 하나. 저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 전생에서도 완벽히 이루진 못했지만, 몇 주나마 혼자 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이곳엔 가족까지 있는데. 엄마에, 형과 누나까지 있는데.

    지금이야 새로운 세상이 낯설어 그렇다지만 점차 적응할 것이다. 할 수 있었다.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 이곳에 살던 몸이니까. 핸드폰을 만지는 손이 익숙했던 것처럼, 아마 다른 것도 몸이 알아서 해 줄지도 모른다.

    저에겐 이제 상처가 없다. 손목의 상처도, 명치의 상처도, 다리의 상처도 없다. 가슴에 박힌 총알은 또렷하게 느껴지지만, 그건 허상이다. 이 몸은 겪지 않은 고통과 울분이다. 그러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아, 하아……. 후우…….”

    아진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 정도로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뛰면 뛸수록 상념이 사그라들었다. 고민이 하찮은 것이 되고, 우울함과 혼란함이 증발했다. 남은 건 뜨거운 땀과,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과, 발씬거리는 뺨과, 팽팽해진 근육과, 건강한 두 다리뿐이었다.

    그렇게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칼이 젖었고, 하얀 반팔 너머의 목덜미가 번들번들했다. 목도 말랐다.

    이만 돌아갈까. 가서 찬물로 씻고 침대에 누우면 잘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운동장 끝에 서 있던 아진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벼운 표정으로 정문을 향해 뛰어가는데. 정문의 가로등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정체를 가늠하는 건 쉬웠다. 워낙 독보적인 키와 체격을 가진 이라서.

    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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