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0화 (170/261)

170

아진은 서명 몇 개를 하고는 지쳐서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러다 발끝을 바닥에 쿡 찍어 의자를 뱅그르르 반 바퀴 돌렸다. 널찍한 통창을 통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서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은 빌딩들과 눈이 마주쳤다. 네모난 형태로 반듯하게 선 도시들과 조화롭게 솟은 산과 파란 하늘이 기가 막혔다. 이게 진정한 미래구나,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멋진 풍경을 보며 넋을 놓고 있다, 다시 의자를 돌려 석주를 바라봤다. 더위에 재킷과 베스트를 모두 벗어 던진 아진과 달리 석주는 재킷까지 꼭꼭 입고 있었다. 태블릿과 서류를 번갈아 보며 일하는 게 멋졌다. 미래 사회에서 추구하는 어른의 형상 그 자체가 아닐까 싶었다.

아진은 한참 동안 석주를 바라보다, 나중에는 책상에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그를 구경했다. 우뚝 솟아 있으나 매끈한 콧등이나, 사내답게 선이 굵은 턱이나, 깊은 눈매 같은 것들을.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가장 처음, 석주의 집에 들어갔던 때. 그를 보고 싶어서 부러 복도를 닦고 또 닦고, 그의 방 맞은편에서 서성거리고, 그와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던 그때가.

그렇게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석주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아진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석주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책상을 간단히 정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

“네?”

아진이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주가 툭툭 자신의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점심시간입니다.”

아진은 석주와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냉면집이었는데, 석주가 미리 예약을 해 둔 건지 따로 마련된 방에서 먹을 수 있었다. 식사는 조용하게 흘러갔다.

아진은 이따금 회사 일에 관해 묻거나, 귀지 맛 젤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물었다. 칼국수를 먹던 석주는 애매하게 웃으며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도 친절히 답해 주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지겨우면 퇴근하셔도 됩니다.”

석주가 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아진이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막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퇴근요? 이제 점심시간 지났는데.”

“원래 이쯤 퇴근하셨습니다.”

“어……. 그럼 비서님은요?”

“저는 사장님 모셔다드리고 다시 들어올 겁니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회사 갈래요. 어, 엄마가 치료한다는 셈 치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예.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회사로 다시 돌아왔다. 아진은 푹푹 찌는 더위에 와이셔츠에다 넥타이만 덜렁 매고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반나절 회사에 있었다고 편해진 모양이었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이나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해맑았다.

석주는 한숨을 쉬면서도 딱히 막진 않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사장실로 향하는 길. 화장실을 본 아진이 석주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저 화장실 갔다 갈래요.”

“예.”

석주가 기다리겠다는 듯 벽에 붙어섰다. 아진은 느리게 걸음을 끌며 그의 행방을 확인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른 볼일을 보고 손을 뽀득뽀득 씻었다. 차가운 물에 더위가 한결 가시는 듯도 했다. 세수도 하고 싶었는데 석주가 만져 준 머리가 헝클어질까 뺨만 북북 문댔다.

그리고 손을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앞 복도 귀퉁이, 석주가 이름 모를 사람 셋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원인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덜 덥지 않아요?”

“나는 추워. 내 자리는 에어컨 직빵이라 여태 담요 두르고 있었어요.”

“황 비서님 더위 많이 타시잖아요. 자리 바꿔 달라고 해 봐요.”

“그럴까 봐요. 근데 언제 복귀하시지. 다음 주에 오시던가?”

“그럴걸요? 강 비서님은 더위 안 타시죠? 참 신기해. 땀 흘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비서 팀 중에 제일 바쁘신 분인데.”

“하하, 그런가요?”

석주가 재킷의 가슴 부분을 문지르며 웃었다.

“지금도 봐. 재킷에 베스트까지 다 입고 있잖아요. 혼자 가을이야, 가을.”

“제가 나이가 있어서 바람만 불어도 뼈가 시립니다.”

“푸하, 바깥에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33이면 아직 아기지!”

“와, 강 비서님한테 아기라고 하신 거예요? 강 비서님 우리 회사에서 제일 크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사람들은 잠깐 대화를 사그라트렸다가,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같이’엔 석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진이 입을 살짝 벌리며 웃는 석주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웃어?

타인과 함께 있는 석주도 처음 봤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웃는 것도 처음 봤다.

기분이 묘해졌다. 아니. 나빠졌다. 짜증이 확 솟구쳤다.

웃는다고? 저렇게 쉽게?

물론 전생의 석주도 웃음이 각박하진 않았다. 조직원들과 시답잖은 장난을 하며 으레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저와 함께 있을 때도 자주 웃었고.

근데 그건…… 과거이지 않나. 그러니까 ‘그’ 일들이. 그가 저를 오해하고, 아프게 하고, 다치고, 끝내는 둘 다 죽음을 맞이한 ‘그’ 일이 있기 전의 과거.

물론 웃고 있는 석주는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함을 안다.

근데 그게 너무 분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가시와 총알이 경련하며 심장을 헤집었다.

억울해.

나는 다 기억하는데. 다 기억해서 괴로운데.

당신은 다 잊었다니.

불공평해.

잊으려면 내가 잊었어야지. 기억은 당신이 했어야지. 어떻게든 기억해서 내게 속죄했어야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과 시시덕거리면 안 되지. 더욱이 내 앞에선 그러지 말아야지.

아진의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먹을 옴팡지게 말아쥔 그가 성큼성큼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석주의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섰다.

그에 비서진들이 누구랄 것 없이 인사했다.

“어머,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점심은 맛있게 드셨-”

“강 비서님. 나. 목말라요.”

그들의 인사를 단번에 무시한 아진이 석주에게 쏘듯 말했다. 그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내린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 커피 가져다드릴까요?”

“알아서 들고 와요, 알아서.”

그렇게 말한 아진이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사장실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은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다른 말을, 그러니까 시비를 걸고 싶은데. 그런 쪽으로는 창의력이 부족한 머리통이라 도무지 괜찮은 게 떠오르질 않았다. 짧게 꾼 꿈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저는 석주에게 욕도 퍽 잘하고 능글거리며 그를 난감하게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아진이 으……, 하며 분노 어린 신음을 토해 냈다.

석주는 금세 나타났다. 그가 든 유리컵에는 커피가 출렁이고 있었고, 얼음이 넘치게 들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진은 석주가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그것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에 목이 마르다고 했을 땐 거짓말이었는데, 속에서 울분이 차오르니 실로 목이 바짝바짝 탔다. 차가운 기운만 느끼며 두 모금쯤 넘기던 아진은 뒤늦게 커피 맛을 인지했다.

쓰고, 시고, 쿰쿰한 게 커피가 상한 것 같았다. 짜증이 더 났다. 석주가 지금 저를 놀리는 건가, 복수하는 건가, 싶었다.

“이게 뭐야.”

아진이 커피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험상궂게 구겨진 그의 낯과 달리 평온한 얼굴을 한 석주가 커피에 대해 설명했다.

“즐겨 드시는 원두로 내린 겁니다.”

아진이 손잡이 없는 유리컵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근데 아귀힘이 유리를 깨트릴 정도는 세지 않은지라, 힘을 받은 컵이 미끄덩하며 위로 솟아오른다 싶더니 그대로 손에서 빠져나갔다.

쨍그랑!

매끈하고 단단한 대리석 바닥과 출동한 컵이 산산이 조각났다. 커피가 온통 엎질러졌다. 동글동글하게 녹은 얼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유리가 난자했다.

아진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흘끔 석주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짜증이나 내려고, 석주를 괴롭히려고 한 거지. 이거는 좀…….

“…….”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아진이 허리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하얀 손끝이 가장 큰 유리 파편으로 향했다. 그에 석주가 얼른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만히 계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래도-”

“다치시면 안 됩니다.”

석주가 아진이 앉아 있던 의자 머리를 쥐고 뒤로 쭉 빼냈다. 아진이 돌돌돌 뒤로 밀려났다. 난장판이 된 바닥과 아진을 충분히 떨어트린 석주가 바쁜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갔다.

아진은 입술 끝에 꾹꾹 힘을 줬다가 풀며 석주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내리지 않은 벌을 받았다. 마음이 불편하고, 민망하고, 미안해하는 벌이었다.

곧 다시 나타난 석주는 청소 도구로 유리와 얼음을 한데 모아 치우고, 바닥을 닦고, 신기한 생김새의 청소기로 온 사장실을 청소했다.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이 바쁘게 달랑거렸다.

사장실을 뒤엎듯 청소한 석주는 아진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아진의 구두에 튄 커피를 닦기 위함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깨끗한 천을 보던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서님이 여기서 제일 종이에요?”

“예?”

뜬금없는 말에 석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짜증은 아니었다. 의문의 표시였지.

“제일 밑이냐고요. 이 회사에서.”

“아닙니다.”

“근데 왜 이런 걸 직접 해요. 다른 사람 시키면 되지.”

괜히 미안한 아진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석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른 종이 했으면 이렇게 미안하지 않았을 텐데. 제가 벌인 일을 석주가 치우는 내내, 그것을 보고 있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서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허나 석주가 무형의 밧줄로 저를 의자에 꽁꽁 묶어 두는 바람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석주가 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장님과 관련한 건 웬만하면 제가 직접 합니다.”

“왜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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