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68화 (168/261)
  • 168

    꿈속의 아진은 평온을 맞이했으나, 실제 아진은 그렇지 못했다. 더웠다. 끔찍하리만큼 더워서 곧 잠이 깰 것 같았다. 정신의 반은 이미 일어난 상태였다.

    더워서 잠에서 깨야 한다니. 전생의 아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아진이 끙, 하고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어둑한 눈꺼풀 너머로 그림자가 스친다 싶더니 누군가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손이 크고, 차가웠다. 손바닥에서 은은한 냉기가 뿜어졌다. 방금까지 얼음이라도 쥐고 있었나 싶어지는 온도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뜨끈거리던 머리가 미적지근하게 식었다. 아진의 숨결이 한층 편안해졌다.

    그런데도 손은 떨어지지 않고 아진의 열기 위를 배회했다. 열에 달뜬 뺨을 만져 주고,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흐른다 싶더니 잠깐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러다 엄지가 툭, 마치 실수처럼 입술에 닿았다.

    “…….”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이번엔 엄지가 아랫입술을 눌렀다. 손끝이 입술선을 따라 그리고, 그러다 대범하게 입술을 꾹 뭉갰다.

    아랫입술이 살짝 뒤집혔다. 아진의 뜨거운 숨결이 잇새로 언뜻 흘러 나갔다. 그 숨결은 입술을 짓누른 엄지를 뭉근하게 할퀴었다.

    손의 주인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게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가 어떠한 눈빛을 하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었다.

    그쯤, 아진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러나 눈은 뜨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간 입술을 쓰다듬던 손은 아쉬움을 잔뜩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그 후로는 소리만 들렸다. 삑삑삑, 하고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소리. 아진이 발로 차서 바닥으로 떨어진 이불을 끌어 올려 개는 소리. 조용하나 묵직한 발소리 같은 것들.

    아진은 그 고요한 소리와 자신이 방금까지 꾸던 꿈을, 아니 기억을 뒤섞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떴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니트를 걸친 석주가 침대 협탁의 조명을 낮추고 있었다. 아진이 자신이 깼음을 알리듯, 몸을 살짝 뒤척였다. 석주의 시선이 대번에 아진 쪽으로 흘러왔다.

    “일어나셨어요?”

    크게 부드럽거나 상냥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는 아진을 쓰다듬고 입술을 매만진 적 없다는 듯 단정하고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우세요? 물 드릴까요?”

    석주가 물었다. 아진이 누운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주가 덩달아 턱을 주억였다.

    “사 온 국어사전은 테이블에 뒀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비서.”

    “네?”

    “비서라는

    단어 좀 찾아 주세요.”

    “…….”

    난데없는 요구에 석주가 아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별다른 말 없이 사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비읍 단락에서 몇 번 뒤적거리더니 곧 아진이 말한 단어를 찾아냈다.

    그가 사전을 깊게 펼쳐 아진에게 건네주었다. 상체를 일으킨 아진이 그것을 받았다. 석주는 친절하게도 어둡게 낮춰 놓았던 조명을 다시 밝게 높여 주었다.

    5

    [비서

    일부 중요한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직속되어 있으면서 기밀문서나 사무를 맡아보는 직위. 또는 그 직위에 있는 사람

    *

    예. 사장 비서]

    아진이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사무를 맡아 보는 직위. 특히 그 부분을 유심히 읽었다.

    그 어디도 뺨을 만져서 열기를 식혀 준다거나, 야릇하게 입술을 매만진다거나, 잠을 못 잔다고 품에 안고 재워 준다는 말이 없었다.

    이 관계는 절대 사장님과 비서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전생의 저와 석주의 그 묘한 관계와 훨씬 닮아 있었다.

    아진이 사전을 덮으며 석주를 올려다봤다.

    “석주 형.”

    “…….”

    석주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침대에 바짝 붙어 섰다.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다행스러움 같은 게 그의 표정에 묻어났다.

    “기억이…….”

    허나 아진이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써 단번에 그 기대를 참수시켰다.

    “안 나요. 여전히. 아무것도.”

    “…….”

    “근데 이상한 꿈을 꿔서요.”

    “꿈이요?”

    석주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아진이 묵직한 사전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물었다.

    “혹시 우리 연인인가요?”

    “쿨럭…….”

    석주가 기침했다. 들이마시던 숨이 제대로 꼬인 건지 폐가 다 지끈거렸다. 그가 두어 번 더 기침해서 엉킨 숨을 풀어냈다. 그리고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예?”

    “우리 연인이에요?”

    “…….”

    “사랑하냐고요, 서로.”

    석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진을 직시했다. 질문의 의도를 찾는 듯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질문인데. 아진은 정말 1차원적으로, 연인이냐 아니냐, 그것이 궁금해서 물은 건데. 늘어지는 석주의 침묵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대답하세요, 빨리.”

    아진의 채근에 석주가 조심히, 허나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사이.”

    아진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니라고. 원하던 답을 들었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도 아니고 실망도 아닌 모호한 감정이었다.

    그럼 그건 뭔데. 내 얼굴은 왜 그렇게 만졌는데. 내 입술을 한참 동안 바라본 이유가 뭔데. 꼭…… 꼭 전생의 석주처럼 그렇게 절 바라본 이유가 뭐냔 말이다.

    아진은 석주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사랑하는 법, 받는 법, 함께하는 법부터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 매만지는 손길 같은 것까지. 전부 석주에게만 배운 것이라 그의 감정을 판가름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얼굴을 만지던 석주의 손길은 분명 전생의 석주와 똑같았다. 그 손이 가진 체온만 다를 뿐.

    “그럼 강 비서님 혹시 저랑 연인 하고 싶으세요?”

    “예?”

    계속해서 이어지는 곤혹스러운 질문에 석주의 눈가가 난감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사장님이랑…….”

    어렴풋하긴 하나 부정이었다.

    “……됐어요. 그럼.”

    아진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굴러다니는 베개를 집어 안았다.

    “잘래요.”

    “예.”

    석주가 얼른 조명 밝기를 낮췄다. 그리고 묵례를 하려는데. 아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비서님은 여기 말고 비서님 집 가서 자세요. 비서님 여기 있는 거 싫어.”

    “…….”

    석주가 머리를 비스듬히 옆으로 흘렸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진의 이런 변덕과 무례에 익숙한 듯했다. 그가 바르게 서서 두 손을 가볍게 뒷짐 졌다. 그리고 아진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저한테는 사장님의 밤을 돌볼 의무가 있어서요.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엔 더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장님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소리입니다.”

    “하…….”

    “그만 주무세요.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제 방은 나오셔서 보이는 복도의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석주가 꾸벅 예의 바르게 묵례했다. 그러더니 아진이 받아칠 틈도 주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아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석주가 꼼꼼히 닫아 주고 간 문을 대차게 노려보았다.

    와, 되바라진 것 봐.

    어제는 가란다고 갈 것처럼 굴더니 오늘은 왜 저래?

    아니, 근데 내가 윗사람 아니야? 세상에 어떤 종이 도련님한테 저따위 말본새를 써? 왜 저렇게 버릇이 없냐고! 멍석말이를 당하고 싶은 거야? 저 덩치를 말려면 멍석도 큰 거로 새로 사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성질하고는…….”

    어금니를 깨문 아진이 주먹으로 베개를 콱 찔렀다.

    * * *

    아진은 정원에 있는 동그란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여름이라 햇살이 뜨겁지만, 커다란 나무가 곁에 있어 그늘이 제법 시원했다. 바람도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었다. 아진의 앞머리가 가볍게 춤을 췄다.

    책을 읽던 아진이 적당히 말랑한 복숭아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과육에 광대가 절로 솟아올랐다. 맛있다. 그 언젠가 석주가 여름을 맞아 한 아름 사 왔던 복숭아만큼이나 맛있었다.

    복숭아로 볼이 퉁퉁하게 부푼 아진의 포크가 다시 복숭아로 향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석주가 그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근 며칠 제가 혼자만 출근하니 그런 소문이 나는 듯합니다.”

    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아진이가 퇴근을 지나치게 일찍 해서 그렇지 그래도 꼬박꼬박 회사에는 나갔었으니까.”

    “예. 그 때문에 그러잖아도 임원진들 불만이 많았는데, 아예 출근을 하지 않으시니 불안함이 큰가 봅니다. 현성이 미디어 사업에서 손을 떼려는 게 아니냐, 다시 현성 일보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 어디에 헐값으로 매각하려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고 있고요.”

    “요즘 회사에 무슨 일 있었니?”

    “아니요. 딱히 없었습니다. 주가는 더디지만 계속 상향 중이고, 최근에 글로벌 OTT와 시즌제 장편 드라마를 계약해서 분위기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오롯이, 아진이가 출근하지 않아서 일어난 소문들이다?”

    “예. 그런 듯싶습니다.”

    두 사람이 심각하게 아진과 회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정작 아진은 천진한 얼굴로 책장만 넘겨 댔다. 처음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해 보려 노력했었으나 이제는 포기했다.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글로벌이고 오티티고 주가고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선화가 팔짱 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눈매에 힘을 줬다.

    “내가 그쪽으로 며칠 대신 출근하는 건 과하니?”

    “평상시와 다른 상황은 또 다른 소문을 만들 겁니다. 더군다나 회장님은…… 회장님이시니까요.”

    “그래…….”

    선화가 쯧, 혀를 찼다. 그러다 턱을 괴며 아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진이 너 아프니?”

    갑작스레 제게 향한 질문에 아진이 복숭아를 꼭꼭 빠르게 씹어 넘겼다. 그리고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네? 아니요. 아니, 안 아파. 아무 데도.”

    “그럼 너 출근 좀 해야겠다.”

    그 말에 아진이 들고 있던 포크가 크게 휘청거렸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