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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듣던 아진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일곱 살. 전생에서 납치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던 때였다. 그리고 열 살.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던 때였고.
나구나. 지금 이 몸도 나구나.
그럼 내가 진짜 환생이라도 한 건가. 말로만 듣던 그 환생?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전생이고?
아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선화가 그런 아진의 손등을 슥슥 쓰다듬으며 다시 주제로 돌아갔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사주, 팔자, 뭐 그런 걸 믿게 됐는데 말이야. 네가 도화살이 많대. 근데 그게 좋은 도화살, 그러니까 사람한테 인기 많은 도화살이 아니고, 나쁜 놈이나, 악귀나, 귀신한테 인기가 많은 도화살이라는 거야.”
“…….”
“네가 사주에 사랑도 많고 금도 많아서 악귀가 잘 붙는대. 진짜 그랬어. 너 잠도 잘 못 자고, 공부도 안 되고, 잔병치레도 자주 하고, 학교에서도 웬 잡놈들이랑 그렇게 시비가 붙고, 좀만 방심하면 넘어지고, 다치고, 데고, 베이고……. 어휴…….”
“…….”
“외로움은 또 좀 타? 형이랑 누나는 다 간 유학도 못 보냈잖아. 곁에 사람 없으면 우울해하고 그래서.”
“…….”
“그러다 너 고등학생 때. 석주가 과외 선생으로 왔었거든?”
“과외, 선생님요?”
“응. 국영수 가르쳐 주러 왔었어. 너 석주 아니었으면 대학도 못 갔다. 으이구, 꼴통.”
“…….”
“아무튼. 석주가 왔는데 신기하게 네가 그날부터 너무 잘 자는 거야. 친구들이랑 싸우지도 않고, 다쳐 오지도 않고. 석주가 시키는 대로 공부도 퍽 잘하고.”
“…….”
“그래서 내가 알아봤는데. 석주가 전생에 뭘 많이 잡아먹었대. 고기 같은 걸 많이 먹은 게 아니고 혼이라든가 피라든가, 그런 쪽으로 업보가 많았나 봐. 애가 전생에 장군이었기라도 했나. 아무튼 그게 현생까지 이어져서 배고픈 범, 그러니까 굶주린 호랑이 사주라더라. 그래서 네 도화살을 석주가 다 잡아먹는대.”
“…….”
“석주도 혼자 있으면 결국 주변 사람 다 잡아먹고 나중엔 자기 팔다리까지 씹어 먹을 사준데, 너랑 있으면 너한테 붙는 악귀들 잡아먹느라 배고플 새가 없다더라고.”
“…….”
“둘은 같이 있어야 사는 사주인 거지. 운명이라니까, 운명.”
선화가 아진의 무릎을 탁탁 두드리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첫 만남 때의 석주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중얼중얼 읊조렸다.
“그래서 내가 석주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스카우트해서 우리 회사에 딱 붙여 놨잖아. 연봉도 왕창 줘. 걔 학자금 대출도 내가 장학금이라는 셈 치고 다 갚아 줬어. 네 악귀 잡아먹어 준다는데 못 할 게 뭐니. 아주 의인으로 모시고 있지, 내가.”
“…….”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던 아진이 눈두덩을 꾹 짓눌렀다.
사주, 팔자, 운명, 악귀, 의인. 신기한 기계들과 꼬부랑글씨가 판치는 이 세상에 하등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근데 그걸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저와 석주는 진득하고 치밀하게 얽혀 있었다.
아진이 어금니를 꾹 짓씹었다.
아. 용왕님. 이건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양반집의 어화둥둥 막내 도련님으로 태어나게 해 준 건 고맙다만, 석주와 이렇게까지 얽어 놓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진이 차마 선화 앞에서 욕은 하지 못하고 쓴 침만 삼키는데. 선화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근데 석주 만난 이후로 네가 아픈 건 처음이라 걱정이네. 또 무당을 찾아가 봐야 하나 싶어.”
아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아프다기보다는, 용왕님의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미 예전에 죽은 저를 이곳에 데려다 놓은 이유를, 제게 석주를 꼬아 놓은 이유를 찾아야 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냥 잠깐. 잠깐 머리가 고장 난 거니까. 아픈 곳은 없어요. 기억도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선화가 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 귓바퀴를 만져 주고, 턱을 문질러 주다 아쉽게 손을 뗐다. 그녀가 사진첩을 모아 서랍에 집어넣었다. 아진이 얼른 그녀를 도왔다.
몸을 일으킨 선화가 턱을 가볍게 까딱였다.
“엄마 일하러 가 봐야겠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기다릴게요.”
“……기다리면서 철들진 말고.”
“……네.”
“그…… 존댓말도 안 쓰면 안 될까? 엄마가 마음이 아파. 아들이랑 멀어진 것 같아서.”
조심스레 물어 오는 말에 아진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어스름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