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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저절로 켜졌나,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TV는 그저 검기만 했다. 방을 둘러보던 아진은 어렵지 않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침대 옆 협탁에 전화기가,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흔히 쓰는 선 없는 전화기가 반짝반짝 불을 밝히고 있었다.
“…….”
괜히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아진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그 순간, 음악 소리가 뚝 끊기고 화면이 바뀌었다.
가장 상단에는 오늘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가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어마마마(✿◖◡◗)❤ -부재중 전화(2)]
[형아✧⁺⸜(・ ᗜ ・ )⸝⁺✧ -부재중 전화(3)]
[이모ᕕ(✿°᷄д°᷅)ᕗ -부재중 전화(2)]
[쭈혁쓰 -부재중 전화]
[눈누난나٩(。•‿•。)۶ -부재중 전화(3)]
뭔 글씨가 이렇게 난잡한지. 분명 한글임에도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멀뚱히 서 있던 아진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나중에 석주가 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덥다. 더워…….”
아진은 연신 물을 홀짝이며 방을 나왔다. 방에서 서재로 가려면 널찍한 거실을 가로질러야 했다. 먼 거리였으나 두 다리가 멀쩡하니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진이 두 발바닥이 온전히 땅에 닿는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데. 무언가가 시선을 끌었다. 유리 찬장에 가득한 액자들이었다.
아진은 홀린 듯 멈춰 섰다. 액자 사진 속에 제 얼굴이 가득했다. 물론 낯선 얼굴도 많았다. 근데 눈매가 묘하게 익숙한 게, 그들이 석주가 말해 준 저의 형과 누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 사진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진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있고, 그 옆엔 형으로 보이는 이가 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학사모를 쓴 아진이 큼지막한 꽃다발을 들고 서 있고, 그 주위로 선화를 비롯한 가족들이 서 있었다.
콧잔등에 크림을 묻힌 어린 아진이 헤벌쭉 웃고 있고,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놀리는 누나의 사진도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누나와 아진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도 있었으며, 머리에 고글을 쓴 아진이 파란 물을 배경으로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 밖에 아진과 형이 붉게 익은 가재의 집게를 한쪽씩 들고 있는 사진이나 선글라스를 쓴 아진이 선베드에 누워 있는 사진, 누나와 형의 독사진, 친근하게 선화와 뺨을 붙이고 있는 사진, 멋진 자동차 보닛에 앉아 있는 아진의 사진,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가족들의 사진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모두 낯선 사진인데 어째서인지 아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종국엔 물잔까지 내려놓고 사진을 구경했다.
그렇게 한참 사진에 혼이 팔려 있는데.
“사진 보고 싶니?”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탁한 보랏빛의 여성 정장을 입은 선화가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그녀의 비서라는 사내도 보였다.
“……어머니.”
아진이 꾸벅 묵례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봤는데, 평생 부모가, 그것도 지체 높은 양반 부모가 있던 적이 없어서 어떻게 예의를 차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게. 기억 찾는 데는 사진 같은 걸 보여 주는 게 딱인데. 내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선화가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비서를 향해 “먼저 나가 있어요.” 하고 말했다. 예, 하고 대답한 비서가 서류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를 보던 아진이 물었다.
“어디 가세요?”
“응. 일이 밀려서. 그래도 일찍 올 거야. 아진이 네가 가지 말라면 안 가고.”
“아뇨, 일인데.”
“……그래. 일인데. 근데 잠깐 시간 있어. 이리 와 봐.”
선화가 별안간 찬장 아래에 퍼질러 앉았다. 곱게 차려입은 옷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몸짓이었다. 아진은 쭈뼛쭈뼛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화는 찬장 서랍을 뒤적여 사진첩을 잔뜩 꺼냈다. 작은 책만 한 크기부터 아진의 상체만큼 커다란 것까지 종류가 매우 많았다.
선화는 능숙하게 사진첩을 순서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낡아 보이는 것을 펼쳤다.
“이것 봐.”
“누구예요?”
“누구긴. 아진이 너지. 너 막 태어났을 때.”
“…….”
아진이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사진을 빤히 쳐다봤다. 작고, 빨갛고, 누가 얼굴을 아래위로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일그러진 생명체가 영 예쁘지 않았다. 아진이 께름칙하게 입맛을 다시자 선화가 킥킥 아이처럼 웃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건 100일 때, 이건 돌 때. 이때부터 네 얼굴이 좀 나오지? 아유, 정말 예뻤어. 정진이랑 미진이도 어렸을 때 엄청 예뻤거든? 근데 너는 진-짜 예뻤어. 진짜.”
“…….”
“우리 아버지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엄청 무뚝뚝하셨거든? 정진이랑 미진이한테도 몇 번 안 웃어 주셨는데. 너는 아주 옆구리에 끼고 키우셨다니까.”
“…….”
“너는 어렸을 때부터 너 사랑해 주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서 할아버지한테도 천사처럼 웃어 주고 그랬어. 걸음마 떼고도 할아버지한테 가서 안기고. 하부지, 하부지, 하면서 따라다니면 우리 아빠 좋아서 뒤로 넘어가셨지.”
“…….”
“이건 유치원 다닐 때. 이건 장기자랑 때. 이건 너 처음으로 비행기 탔던 때. 여기, 너 안고 있는 건 정진이야. 네 신발 들고 있는 건 미진이고. 내가 일이 바쁠 땐 얘들이 너 키웠어. 글도 가르쳐 주고, 밥도 먹이고. 너도 형 누나를 잘 따랐어. 말도 잘 듣고. 기특하지.”
선화는 막힘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사진첩에는 아진이 성장하는 게 한순간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오죽하면 성장을 마친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교복을 벗고, 대학생이 되고, 최근으로 보이는 사진까지.
선화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하는 내내 웃음을 감출 줄 몰랐다.
아진은 그녀를 따라 사진을 보다, 나중에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추억하며 웃는 엄마의 얼굴이 참…… 좋았다.
“저는 사랑을 많이 받았나 봐요.”
“아유, 그럼. 사랑도 사람도 돈도 부족함 하나 없이 키웠지, 내가.”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진이 빙긋 눈을 휘며 웃었다. 전생에서는 사랑도 사람도 돈도 가지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모두 넘쳐흐를 만큼 쥐고 있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
선화가 그런 아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 스며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철들지 마.”
“네?”
“철들지 마라, 아진아.”
“…….”
“죽을 때까지 엄마 등골 빨아먹어도 좋으니까, 그냥 철부지로 있어 줘.”
선화가 탁 사진첩을 덮었다. 그리고 아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철들지 말라니. 어른이면 응당 철이 들어야지. 더군다나 27살이라며. 그럼 철들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선화가 왜 서글픈 표정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이것 역시 석주에게 물어봐야겠다.
아진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끔뻑이는데. 선화가 아진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된 거 다시 집으로 들어올래?”
“저 지금 집에 있잖아요.”
“지금은 아파서 잠깐 있는 거고. 너 독립했잖아. 석주랑.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독립하겠다고 아득바득 우기더니 결국 3학년 때 나가 놓고는.”
아진의 눈꺼풀이 깜빡, 깜빡, 깜빡 정박자로 움직였다. 독립. 석주와. 나갔다. 그 말을 되씹고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아진이 파드득 어깨를 떨며 토끼 눈을 떴다.
“제가 강 사장, 아니, 강 비서님이랑 같이 살아요?”
“응.”
“그런,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너네 같이 산 게 벌써 5년인데 굳이 이야기를? 이제 와서?”
“…….”
아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으로는 꽉 막힌 목구멍을 뚫지 못해 거의 다 녹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닦은 아진이 따지듯 물었다.
“그럼 저는 강 비서님이랑 같이 살고, 일도 같이 하고, 그런 거예요?”
“응.”
“하루 종일 같이 있겠네요?”
“그렇지.”
선화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그녀 쪽으로 상체를 돌린 아진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으세요?”
“뭐가? 아진이 네가 석주랑 붙어 있는 거?”
“네.”
“나야 좋지. 석주가 일도 잘하고, 네 성질머리도 받아 주고, 착하잖아. 무엇보다 너랑 석주가 딱이기도 하고.”
“딱이라니요? 뭐가요?”
끝없이 질문하는 아진에 선화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주가 이 집에 드나든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꼬박 10년인데 그간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 주나, 엄두가 안 났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아진이 네 사주에 도화살이 득실득실해. 아주 득실득실.”
“……네? 사주요? 그런, 그런 걸 믿으세요? 회장님이시라면서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아진이 되물었다. 선화가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황하게 들릴 수 있어. 미신이고, 과학적 사실도 없고. 나도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거에 휩쓸리면 안 되는 게 맞거든?”
“…….”
“근데, 자식이 아플 때. 병원에서는 아픈 곳이 없다고 말할 때. 의료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자식은 아파 죽겠다고 울 때.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어.”
“아파요? ……제가요?”
“응. 네가 일곱 살에 심하게 아팠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열은 엄청나고, 몸이 저리다고 그러는데 병원에서는 이유를 찾지 못했어. 그러다 뭐라도 해 보자 싶어 이모랑 무당을 찾아갔었지.”
“…….”
“근데 그 무당이 그러더라고. 네가 일곱 살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악재가 있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그 악재가 밖으로 못 나왔다는 거야. 그래서 네가 그 악재를 몸으로 겪느라 아픈 거래.”
“…….”
“굿을 하라더라. 뭐 어쩌겠니. 네가 죽으니 사니 하고 있는데. 했지. 그랬더니 신기하게 싹 나았어.”
“…….”
“그리고 열 살. 그때도 한 번 아파했었어. 무릎이 아프다, 다리가 저리다, 못 일어나겠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또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때도 굿을 했지. 그랬더니 또 나았어. 야, 그쯤 되니까 무당이 신 같더라.”
선화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