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65화 (16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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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은 책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근데 어째…… 제목이 죄다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국부론]

    [마이클 포터의 경쟁론]

    [니체]

    [The GOAL]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ZERO to ONE]

    아진은 제목만으로도 알았다. 이건 제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님을. 얼마 전까지 심청전을 읽던 저로서는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한나절이 걸릴 게 분명했다.

    “좀…… 쉬운 책은 없어요?”

    그 말에 석주가 가장 구석, 가장 끝에 있는 책장으로 아진을 이끌었다.

    “여기는 사장님이 학생 때 보시던 겁니다.”

    정확히는 학생 때 보라고 회장님이 사 두신 거지만. 석주가 뒷말은 꾹 삼켰다. 아진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이번 책장은 전 책장과 색깔부터 달랐다. 훨씬 다채롭고, 글씨체도 동글동글하고 아기자기했다.

    아진은 그것들을 진지하게 살피다, 주홍색 책 하나를 집었다.

    선화는 눈을 뜨자마자 기함할 소식을 들었다. 아진이 쓰러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녀는 서늘한 집 안에 익숙한 듯, 니트를 껴입고는 바쁘게 서재로 달려갔다. 때마침 콜라와 롤케이크를 든 석주가 서재로 들어서고 있었다.

    “회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석주가 까딱 묵례했다. 그에 선화가 부리나케 물었다.

    “진짜니? 진짜야?”

    “예?”

    “아진이가 서재에 있는 게 맞아?”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 시간 전부터요.”

    “하…….”

    선화가 탄성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서재 문을 반 뼘 정도 열었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아 차가워진 공기가 훅 쏟아졌다. 선화가 문틈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그녀보다 머리가 하나하고도 반이 더 큰 석주는 뒤에 서서 안을 살폈다.

    아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장을 등 뒤로 두고, 앞을 보는 방향이었는데 그 덕에 그가 어떤 자세로, 무슨 표정으로 책을 읽는지 염탐하기 쉬웠다.

    아진은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의자 아래로 떨어진 다리가 느리게 흔들렸다. 책장은 더딘 속도로 넘어갔는데, 심각한 부분을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건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언뜻 보면 중요 서류를 검토하는 젊은 CEO였다.

    “쟤 지금 책 읽네. 진짜 읽는 거 맞네.”

    선화가 붕 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예. 맞습니다.”

    석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가 아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의문을 제기했다.

    “……왜? TV 고장 났어? 컴퓨터도? 혹시 우리 집 전기 나갔니?”

    “TV를 잠깐 보셨는데 멀미가…… 나신답니다. 컴퓨터는 다루기 어려워하실 것 같아 추천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고? 우리 진이가?”

    선화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을 꽉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뭐 읽는데? 경영 서적? 철학? 인문학?”

    “모모…….”

    “뭐?”

    “모모 읽으십니다.”

    “중학생 필독서였나. 그거?”

    “네.”

    “……그런 게 우리 집에 있어?”

    “있더라고요.”

    석주가 멋쩍게 웃었다. 경영 서적은 무슨. 지금의 아진은 에어컨도 모르고, 혼자서는 TV를 켤 줄도 몰랐다. 그러나 석주는 그 사실을 함구했다. 괜히 선화의 걱정만 늘릴 것 같아서.

    선화는 한참 동안 아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창백한 낯으로 뒤를 돌았다.

    “일단, 일단 알았어. 읽고 싶은 만큼 읽게 놔둬.”

    “예.”

    석주가 꾸벅 묵례했다. 그러고는 똑똑 노크와 함께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선화는 다시 한번 아진을 살피고는 서재 문을 닫았다.

    “……진짜 굿을 해야 하나.”

    심각한 표정의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본가의 다실은, 아니, 다이닝 룸은 컸다. 근데 식탁은 크지 않았다. 의자가 여섯 개뿐인 6인용 식탁이었다. 아진과 석주, 그리고 선화는 그곳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진은 느리게 숟가락을 움직이며 석주와 선화를 곁눈질했다. 석주는 이 장소에, 이 시간에, 선화까지 있는 식사 자리에 껴 있는 게 매우 익숙해 보였다.

    비서라며. 비서는 종 같은 건데. 양반들이랑 겸상을 하나? 이렇게 익숙하게? 비서가 종 같은 게 아닌가? 하긴, 명진도 석주 옆에 앉아서 식사했었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을 찾던 아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쓸데없이 조심스레 물었다.

    “집에…… 국어사전은 없나요? 책에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요.”

    “폰으로 찾아보면 되잖니.”

    선화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아진의 앞으로 계란말이를 밀어 주었다. 아진이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쿡 찍으며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포-온…….”

    그게 뭘까. 또 영어인가. 그걸 알려면 역시나 사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영어 사전이 있어야 하나. 아진이 심각한 얼굴로 계란말이를 깨무는데. 이르게 식사를 마친 석주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사전은 집에 없을 겁니다. 제가 오늘 중으로 사다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반가운 말에 아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석주가 약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덕분에 ‘포-온’에 가로막혔던 아진의 지식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석주가 물을 들이켰다. 그 후 넥타이를 졸라맸다. 그러고 보니 석주의 옷이 달라졌다. 셔츠에 다리미 자국이 있었고, 의자에 걸쳐 둔 정장 재킷도 전과 다른 것이었다. 이 집 어딘가에 그의 방이 따로 있는 듯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잠깐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응, 다녀와.”

    선화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반면, 아진의 눈가에 두려움과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급한 마음에 석주의 옷자락을 냅다 움켜쥐고 봤다.

    “회사에요? 어, 얼마나요? 오래요? 밤에 퇴근하세요?”

    꼭 아빠의 출근길을 막아서는 철부지 아들 같았다. 석주가 눈을 몇 번 연달아 깜빡였다. 그러다 넌지시 물었다.

    “……일찍 올까요?”

    “…….”

    아진은 자신이 어떠한 방정을 떨었는지 뒤늦게 인지했다. 그가 얼른 석주의 옷을 놓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을 연기했다. 허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석주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찍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석주는 선화에게 한 번, 아진에게 한 번 꾸벅 묵례하더니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이닝 룸을 나섰다. 아진은 그가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풍등 모양의 조명이 일정하게 늘어진 길쭉한 복도를 응시하며 젓가락 끝을 쭙쭙 빨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화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돌아와. 일찍 온다잖아. 그럼 일찍 올 거야. 석주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니.”

    “…….”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놓았다. 약속 많이 어겼는데. 맨날 약속 어기는 사람인데. 차마 하지 못할 말을 꾹 눌러 삼킨 그가 젓가락을 바로 세워 정리했다.

    “점잖게 기다려. 하여튼 너 석주한테 분리 불안 있는 거. 그거 고쳐야 해. 석주가 얼마나 귀찮겠니.”

    선화가 핀잔했다. 그에 아진의 눈썹이 위로 쑥 올라갔다.

    “……귀찮아해요?”

    “응.”

    “…….”

    석주가? 귀찮아한다고? 나를?

    ……감히?

    당신이 어떻게 나를 귀찮아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럴 자격 없잖아.

    그렇게 맥락이 어긋난 분노를 키워 가던 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저 사람은 제가 알던 석주가 아니다. 저를 아프게 한 석주가 아니란 말이다. 깡패도 아니고, 마약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냥 양반집 비서였다. 전혀 다르다.

    허나 이성은 그것을 아는데, 감정은 그걸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눈을 꽉 짓이기듯 감았다가 뜬 아진이 한껏 인상을 쓴 채 밥그릇에 집중했다. 선화가 재차 한숨을 내쉬며 그의 밥 위에 떡갈비를 올려 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아진은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책이나 읽자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고 있으니 선화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과일을 두고 갔다. 아진은 배시시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오후 두 시가 넘었을 때쯤. 아진은 물을 마시러 식당으로 향했다. 분명 에어컨이 쌩쌩하게 돌아가는데도 이상하게 덥고, 답답하고, 갈증이 났다.

    부엌에는 전과 달리 낯선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였는데, 채소를 다듬고 고기를 재우는 게 부엌에서 일하는 종들인 듯했다.

    아진이 쭈뼛쭈뼛 물컵을 찾는데.

    “안녕하세요, 도련님.”

    종 하나가 달갑게 인사를 해 왔다. 아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도련님……. 제가 그런 칭호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괜히 민망하고 남세스러워서 목덜미를 긁자 종이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

    “물 드시러 오신 거죠? 제가 드릴게요.”

    그는 찬장에서 큼지막한 컵을 찾아냈다. 그러더니 네모난 기계에서 얼음을 한 바가지나 퍼서 넣고, 꼬부랑글씨가 쓰인 유리병을 따 물을 콸콸 따라 주었다.

    얼떨결에 물잔을 받아 든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렇게 많이 주셔도 돼요? 얼음 되게 귀한데…….”

    “……예?”

    종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아진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곱게 접어 인사한 그가 쫄래쫄래 부엌을 나섰다. 광대가 화끈거렸다. 자꾸 여기가 미래라는 사실을 잊는다. 기계에서 산바람도 나오고, 그릇도 씻는 세상에 얼음이 귀하겠나. 얼음을 얼리는 기계쯤은 얼마든지 있겠지.

    아진이 차가운 컵에다 뺨을 문지르며 부끄러움을 갈무리했다. 그렇게 서재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무심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 소리가 자신의 방 쪽에서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찬물을 홀짝인 아진이 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하루 있었다고 방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제법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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