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63화 (16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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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가 늦었다는 건지. 석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데. 아진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강 비서님은 제…… 비서……지요?”

“예.”

아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비서. 비서가 무슨 일을 주로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있던 세상에서는 그런 직종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며칠 붙어 있으면서 느낀 바로는, 명진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우두머리로 있는 석주를 보필하던 것처럼 말이다.

혼자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고, 생각을 정리하던 아진이 심문하는 형사처럼 석주를 쏘아보았다. 석주가 특유의 단정한 눈빛으로 의심 가득한 시선을 받아 냈다.

“강 비서님.”

“예, 사장님.”

“혹시 저 아세요?”

“예?”

“저 몰라요?”

“……압니다.”

“알아요? 뭘 아는데요?”

“가족 관계부터 시작해서 좋아하시는 음식이나 취미와 특기처럼 사사로운 건 물론, 주민 등록 번호를 비롯한 신상 일체까지 모두 알고 있죠.”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었는데. 약 70년 전의 저를 아느냐는 물음이었지. 아진이 답답한 마음에 눈두덩을 벅벅 문질렀다. 갑자기 또 속에서 열이 확 치받았다. 에어컨이라는 것을 틀어 둔 탓에 공기가 겨울처럼 차가운데, 그래도 더웠다. 애당초 기온 따위로 해갈될 열기가 아니었다.

뜨끈뜨끈한 정수리에 괴로워하던 아진이 늘어진 어투로 다시 물었다.

“아니, 아니, 어…… 저랑 언제부터…… 알았나요?”

“아, 그거라면-”

석주가 막 입을 뗐을 때였다.

꼬르륵.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찔 어깨를 떤 아진이 이불로 배를 가렸다. 소용없는 짓임을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석주가 놀리거나 비웃으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얄궂게도 석주의 눈가에 걱정이 차올랐다.

“식사 갖다 드릴까요?”

아진이 턱을 더디게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러자 석주가 주춤거림 없이 곧장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에 아진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며 그를 붙잡았다.

“어……. 부엌에 직접, 직접 가시는 거예요?”

“예.”

“…….”

아진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대장부가 그런 곳에 들어가는 거 아닌데, 싶었지만 눈치껏 알았다. 그런 걸 딱히 중요히 여기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제 비서라지 않나. 크게 뭉뚱그리면 종 같은 게 아닌가 싶은데. 절 위해서 밥상 정도야 내올 수 있겠지. 제가 언제 또 석주를 하인으로 부려 보겠나.

아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석주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방 안 가득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옅은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아진은 멀뚱히 앉아서 석주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방 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갖다 둘 거면 넓은 방을 왜 쓰는 거야…….”

방은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침대와 소파, 책상,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찬장이 다였다. 찬장엔 정체 모를 인형들이 가득했다. 은은히 스미는 금빛 아래에 수십 개가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아진이 그곳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27살에 인형 놀이라니…….”

철없는 양반집 도련님인가. 그래도 가까이서 보니 아이들이 흔히 갖고 노는 조악한 인형은 아니었다. 사람 모양의 기계였는데, 윤기도 나고 눈이나 가슴에서 빛도 나오는 게 여간 비싼 장난감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신기한 모양새의 자동차 모형도 엄청나게 많았다. 진짜 차 문이 열릴 것처럼 정교하고 헤드라이트에도 빛이 들어와 있는 것이 귀한 게 분명했다.

“멋지게는 생겼네.”

아진이 유리를 툭 건드렸다. 그 후 재차 방을 둘러보았다. 카펫에, 조명에, 정체 모를 동상에, 바퀴 달린 납작한 판들에, 필요한 것만 있었고 꽤 조화로운 듯했지만 아진의 시선엔 그저 허전하기만 했다.

“자개장이라도 하나 놔야 할 것 같은데. 벽지에 꽃무늬 같은 것 좀 넣고.”

아진은 벽 한쪽에 자개 붙박이장을 꽉 채워 두는 상상을 하며 방을 살폈다.

“근데 어째 방에 사진 하나 없어.”

아진이 몸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어머니에 우애 좋은 형제자매가 있으면 사진이 있어야지. 석주의 방에도 조직원들과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이 있지 않았던가.

미래에는 사진을 잘 안 찍나. 아니면 사진이라는 게 사라졌나.

아진은 여기저기를 탐방하다 문 하나를 발견했다. 슬쩍 문고리를 돌려 보자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욕실이었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곧 쨍한 빛이 욕실을 터뜨릴 듯 채웠다.

“이야…….”

욕실은 넓었다. 만지면 보들보들할 것 같은 대리석과 금색이 적절히 섞여 꾸며져 있었고, 욕조도 침대만큼이나 컸다. 반대쪽엔 서서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고 세면대도 두 개나 있었다. 바닥은 흰색, 벽은 베이지색, 수도꼭지 같은 것들은 금색이었다.

“부잣집은 부잣집이구나…….”

아진은 입을 동그랗게 말고 호오, 하며 욕실을 헤집었다.

“바디……로션……. 로션? 아, 로숀? 근데 바디는 무슨 뜻이야? 이건 또 뭐야? 스크, 럿, 스크럽. 끌렌, 클렌징…… 폼. 에센스…….”

뭔지는 모르겠는데 병이 하나같이 참 예쁘게도 생겼다. 좋은 냄새도 나고. 이런 걸 몸에 바르고 살면 파리가 피부에 앉았다가 미끄러질지도 몰랐다.

“근데 좋은 한국어 놔두고 죄 외국말이야. 쯧쯧…….”

분명 글을 아는데도 문맹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꼬장꼬장한 양반 같은 얼굴을 한 아진은 혀를 차며 욕실을 나가려다, 무심코 거울을 바라보게 됐다. 정확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

아진은 딱히 자신의 얼굴에 흥미가 없었다. 하루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라고는 아침저녁으로 씻을 때뿐이었다. 그래도 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았다. 잘생겼고 말고 판단할 깜냥은 안 되어도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제가 알던 그 얼굴이 맞았다. 분명 똑같았다. 똑같은데…… 은근히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진 자신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가 진짜 ‘남’의 몸에 들어왔다는 걸.

아진이 거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전과 뭐가 다른가 싶어서.

피부가 지나치게 생기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게 평생 햇빛 한 번 보지 않고 산 것 같았다. 병약하다는 게 아니라, 귀하게 컸다는 게 티가 났다.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흘렀다. 입술도 각질 하나 없이 맨들맨들했고, 눈썹도 반듯했다.

귓불에는 구멍도 뚫려 있었다. 여자들이 하는 귀걸이 자국이었다.

아진은 귓불을 아래로 쭉쭉 잡아당기며 바늘구멍 같은 걸 느꼈다.

“진짜 귀걸이를 하고 다닌 건가? 사내놈이?”

아진이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얘는 대체 뭐 하던 애지? 제가 살던 시절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짓인데. 아진은 혀를 차다가, 거울 너머로 훤히 드러난 자신의 손목을 보게 됐다.

“…….”

아진이 양쪽 손목을 휙 뒤집었다. 푸른 핏줄이 어스름히 보이는 피부가 드러났다. 역시나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칼로 깊게 그어 피를 왕창 쏟아 냈던, 의사가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거라던 흉터가 없었다.

아진은 바지를 돌돌 걷어 무릎도 확인하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훌러덩 반팔 티를 벗었다. 총알 자국의 존재가 궁금했다.

그리고 역시나.

“없네.”

몸은 깨끗했다. 가슴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석주를 꿰뚫은 총알이 제 명치에 푹- 하고 박히던 그 느낌이 몹시 선연한데, 멀끔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묘하게…… 건장했다. 태회파의 조직원과 비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가슴도 그렇고 배도 그렇고 은근히 근육이 붙어 있었다. 살집도 없고, 근육도 크지 않아 사내답다, 장군감이다 할 순 없지만 이전 몸에 비하면 훨씬 봐 줄 만했다.

호오……. 아진이 흥미 어린 눈으로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근데. 혼자 덜렁 있던 거울 속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

석주였다. 욕실 문 앞에 석주가 서 있었다. 훔쳐보거나 한 건 아니고, 아진이 보란 듯이 문을 훤히 열어 두어서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 안에서 마주쳤다. 석주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찰나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아진의 도드라진 쇄골과 분홍빛 유두, 그리고 일자로 쭉 뻗은 귀여운 복근과 오목하고 작은 배꼽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아진은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있다가, 몇 박자 늦게 옷을 껴입었다.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석주가 저를 무어라 생각할지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금 이 장면은 볼 것 못 볼 것 구분 없이 다 보여 준 이전의 석주에게 들켰어도 부끄러울 장면이었다.

근데 옷 속으로 아무리 머리를 들이밀어도 머리가 나오지 않았다. 팔 구멍에다가 머리를 욱여넣고 있어서 그랬다.

아씨, 아씨, 아씨, 아진이 속으로 짜증을 짓씹으며 옷 속을 헤엄치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티셔츠 너머로 보이는 인영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머리 위로 손이 텁 얹혔다. 석주는 팽팽하게 늘어난 옷을 잡아 슥슥 원래대로 돌려 주었다. 곧 아진의 머리가 올바른 구멍으로 쏙 나왔다.

머리가 삐죽삐죽 엉망으로 곤두섰다. 석주는 무심코 그것을 만져 주려다, 수 분 전 아진이 제 손길을 불쾌해했던 걸 상기하고는 손을 내렸다.

“샤워는 식사하고 하시죠.”

석주는 그 말을 끝으로 욕실을 나섰다. 아진이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보다, 뒤늦게 헐레벌떡 뒤따랐다.

소파 테이블에 네모난 나무 쟁반이 놓여 있었다. 그곳엔 하얀 쌀밥과 시원한 오이냉국, 장어구이, 갈비찜,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들이 올라간 채였다. 새벽 3시에 먹기는 퍽 대단한 상차림이었다.

“직접 하신 거예요?”

아진이 테이블 앞에 앉으며 물었다. 석주가 옆쪽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요리를 담당하시는 분이 따로 계십니다. 지금은 퇴근하신 시간이라 제가 데워만 온 겁니다.”

“아…….”

그래. 집이 이리 큰데 일하는 종이 없을 리 없지. 부엌일 하는 종도 따로 있을 거고. 석주가 부엌을 드나들며 고추가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아니 뭐, 그게 떨어지든 말든 제가 무슨 상관이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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