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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은 눈알이 건조해질 정도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까무러치게 놀랍거나 하진 않았다. 제가 아직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그런 건지, 아니면 이곳에 살던 몸뚱이가 익숙해하는 환경이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언니. 기억 상실증이라고. 그래. 기억 상실증. 급성 스트레스 장애로 나타날 수도 있대. 아무래도 진이가 요즘 출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응, 그러게. 내가 좀 심했나 싶기도 해.”
옆자리에 앉은 선화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석주가 내 만지고 주무르는 네모나고 손바닥만 한 판에다 대고. 아진은 어렴풋이, 그것이 이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전화기임을 알아차렸다.
“치매? 아우, 아니야. 실은 나도 좀 걱정했거든? 요즘 젊은 애들도 치매에 걸린대서? 근데 아니래. 몸도 멀쩡하대. 근데 그게 더 겁나는 거 있지.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이야. 또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선화가 쯧 혀를 찼다. 아진은 치매를 운운하는 그녀의 말에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치매 아닌데. 기억 상실증도 아니고. 하긴, 이 몸을 중심으로 따지면 둘 다 틀린 병세는 아니겠다.
그럼 저는 대체 뭔가. 빙의라도 한 건가. 아, 혹시 귀신인가. 죽었다가 다른 세상에 있는 제 몸에 들어온 건가.
아진의 낯이 심각해졌다. 그렇지, 제가 귀신일 수도 있겠구나. 그럼 굿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굿은 귀신 쫓아내려고 하는 거지 않나.
그가 엉뚱한 실마리를 잡아 가는데, 선화의 통화가 끝에 다다랐다.
“왜? 언니 한국 들어오려고? 아니야, 괜찮아. 일단 사지는 멀쩡해. 다친 곳도 없고. 스트레스성은 금방 회복한다니까 며칠 더 두고 보고 그때 오든지. 응, 알았어. 응.”
통화를 끝낸 그녀가 전화기를 반질반질한 핸드백에 넣었다. 그러더니 대뜸 아진을 쳐다봤다. 얼떨결에 시선이 마주친 아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석주의 뒤통수가 보였다.
석주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운전은 선화의 비서가 하고 있었고. 아진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 세상의 석주는 제가 알던 석주보다 머리가 조금 길다. 입고 있는 정장도 생김새가 약간 다르다. 몸에 더 달라붙고, 재킷이 몇 센티 짧다. 근데 그건 석주가 달라졌다기보다는 그냥 이 세상 옷차림이 원래 그런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크게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잘생긴 얼굴도, 거대할 정도로 큰 키와 단단한 덩치도 그대로였다.
아, 다른 게 또 있다. 과하게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것.
제가 알던 석주도 친절하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석주의 친절은 결이 달랐다. 사랑으로부터 말미암은 친절이라기보다는, 윗사람을 대하는 친절이었다. 예의가 바른 것도 신기했다. 아무래도 제가 있던 세상의 석주는 왕처럼 군림하던 자라.
아진이 하얀 운동화를 신은 뒤꿈치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석주의 뒤통수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눈을 꾹 감으며 무릎을 쓰다듬었다.
다 모르겠고, 일단은 두 다리가 멀쩡하다는 게 너무 좋았다.
* * *
차는 대궐 같은 한옥 앞에서 멈춰 섰다. 아진은 조금 실망했다. 집으로 간다기에 창밖으로 숱하게 스쳐 온 그 높다란 빌딩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결국엔, 또, 한옥이다.
그가 실망을 겹쳐 문 입술을 삐죽이는데. 선화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진이 무심코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실망감이 증발했다. 집은 지붕과 천장을 비롯한 뼈대만 한옥일 뿐 내부는 전혀 달랐다.
아진이 경험했던 한옥 중에 가장 크고 멋졌던 건 단연 석주의 집이었다. 근데 눈 앞에 펼쳐진 이 집은 석주의 집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꼭 궁궐 같았다. 왕을 비롯해 귀한 분들이 살던 경복궁 내부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마당을 통과해 현관에 들어서면 마룻바닥 대신 딱딱하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나면 기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엔 아진보다 커다란 그림이나 고아한 도자기, 신비로운 생김새의 조명등 같은 게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 나오면 운동장만 한 거실이 나왔다. 열댓 명이 뒹굴어도 넉넉할 것 같은 소파와 아름답게 늘어진 풍등 모양의 조명 그리고 드넓은 정원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는 통창이 있었다. 그 밖에 정체 모를 물건들이 많았는데, 이 세상 것들이라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진은 멍하니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게…… 우리 집이라고? 내가 사는 곳이라고?
제가 여기서 양반인가? 그냥 양반도 아니고 마을에서 알아주는 지체 높은 양반? 그럼 저는 양반집 아들인 건가?
아진이 기분 좋은 상상을 이어 가는데. 선화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아들. 밥 먹어야지.”
“네.”
“석주도 밥 먹고 가. 자고 가도 되고.”
“예.”
아진의 짐을 들고 어딘가로 향하던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진의 눈꼬리가 새초롬히 올라갔다. 석주는 이 집에 있는 게 몹시 익숙해 보였다. 밥만 먹고 가는 게 아니라 잠까지 자고 가라는 것을 보면, 갑자기 선화의 호칭이 강 비서에서 석주로 바뀐 것을 보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닌 듯싶었다.
“싫어요.”
아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뭐?”
선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싫어요. 가, 강 비서님 여기서 자는 거. 밥 먹는 것도 싫어요.”
입매가 단단히 굳은 아진이 강경하게 종알거렸다. 짜증 난 몰티즈 같은 얼굴이었다.
아진은 석주와 떨어지고 싶었다. 제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석주와 함께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우리는 또 다른 방식의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울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다 끝내는 피를 흘리겠지.
석주와 헤어져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아진이 멀거니 선 석주를 쏘아보는데. 선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철썩. 아진의 등짝을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놀란 아진이 어깨를 움찔 떨며 놀랐다.
“아야…….”
“이게 좀 얌전해졌나 싶었는데 싸가지는 여전해, 아주. 어디 사람 앞에 대고 그딴 말을 해.”
선화가 으이구, 하며 손을 다시 올리는데. 석주가 슬쩍 아진의 앞을 파고들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석주야.”
“사장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조금 예민하신가 봅니다.”
식사는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그가 옅게 웃으며 아진의 편을 들었다. 선화가 가는 눈으로 아진을 흘겼다.
요즘 세상에 석주처럼 착하고 우직한 사내놈이 어디 있다고. 평화로워질 만하면 석주에게 시비를 거는 아진이 영 못마땅했다. 아무래도 자식이 싸가지가 없으면 욕먹는 건 부모인지라.
“…….”
아진이 눈앞을 가로막은 석주의 등을 쳐다봤다. 근데 언뜻, 낯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석주의 냄새였다.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당황함이었다.
달랐다. 제가 아는 석주의 냄새가 아니었다.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고, 종이 냄새와 바람 냄새도 안 났다. 정체 모를 향기로운 냄새만 났다. 아주 비싼 비누가 있다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은 냄새였다.
진짜…… 석주가 아닌 건가? 의문을 이어 가다 보니 자연히 석주가 떠올랐다. 맨 상박에 두루마기를 입고, 담배를 태우던 석주가. 그 옛날의 석주가.
‘아진아.’
‘이리 와.’
‘아진아.’
제 이름을 다정히 불러 주던 석주가. 때로는 무섭게 부르던 석주가. 그가 내뿜던 홧홧한 열기와, 제 몸을 움켜쥐는 뜨거운 손바닥도 떠올랐다. 그 온도가 돌연 아진의 목젖을 콱 움켜쥐었다.
“아…….”
눈앞이 순식간에 가물가물해졌다. 관자놀이가 송곳에 꿰뚫리는 것처럼 아팠다. 가슴 속에 박힌 총알이 경련하며 심장을 헤집었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석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사장님!”
‘아진아!’
묘하게 다른 두 석주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아진이 눈을 뜬 곳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어딘지 모를 공간은 어두웠다. 그래도 구석에 우뚝 선 직선 형태의 조명이 방 안을 은은히 밝히고 있어 주위를 둘러볼 순 있었다.
공간은 매우 넓었다. 이전에 흔히 머물던 석주의 방보다도 컸다. 천장엔 큼지막한 서까래가 박혀 있었고, 벽에는 옅은 회색의 벽지가 발려 있었으며, 바닥엔 거실과는 다른 재질의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와 가까운 1인용 소파에 석주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흔히 쓰는 전화기처럼 생긴, 그러나 크기가 4배쯤 되는 네모난 물건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선 환한 빛이 흘러나왔는데, 석주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 빛이 여러 가지 색으로 변했다.
“…….”
아진이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손이 커다란 석주.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석주. 깨알 같은 숫자가 가득한 서류를 보던 석주.
제가 아는 그 석주와 똑같은데, 다르다. 팔을 동동 걷어붙인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 흉터가 하나도 없는 것도. 입에 담배 대신 펜 끝을 물고 있는 것도. 그리고,
“아, 사장님. 일어나셨어요?”
저 존댓말도. 꼬박꼬박 붙이는 사장님 소리도. 지나친 예의에 절 바라보는 단정한 눈빛까지. 다 달랐다. 이전에는 호랑이 같은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충성심 높은 사냥개 같은 눈빛이었다.
“…….”
아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석주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 한쪽에 있던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아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진이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았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석주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 아프시거나 불편하진 않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다시 병원에 가야 하나, 회장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괜찮아요.”
“지금 새벽 3시인데. 식사하시겠습니까?”
“어……. 그것보다…… 더워요.”
너무 더워. 밥이고 뭐고, 덥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사실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랬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던 더위가 아진을 꽉 움켜쥐었다. 오죽하면 숨도 막혔다. 아직 죽음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심신이 힘들어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꼭 한여름에 온돌을 한껏 데운 작은 방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괴로웠다. 가슴이 갑갑하고, 이마엔 땀이 맺혔다. 분명 방금 잠에서 깼는데 쉬지 않고 달리기를 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