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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은 진료실과 연결된 보호자 대기실에 있었다. 널찍한 유리창을 통해 진료실에서 대기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잡다한 장난감 따위가 있는 걸 보아 아이들이 머무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아진은 작은 의자에 앉아 펜을 딸깍딸깍 눌러 댔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볼펜을 요리조리 살피기도 했다. 그런 아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던 선화가 걱정스레 물었다.
“치매…… 같은 건가요? 우리 애 이제 스물일곱인데요? 저 임신할 때 정자를 얼마나 가려서 받았는데. 지병이고 유전병이고, 하물며 알레르기도 없는 정자였는데. 그렇게 아진이 낳은 건데. 좋은 것만 먹이고, 스트레스도 안 주고 그랬는데. 더위를 유난스럽게 타는 것도 걱정돼서 죽겠는데 이게 무슨, 무슨…….”
선화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의사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리고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치매는 아닐 겁니다. 치매면 저렇게 모든 걸 일제히, 갑자기, 단숨에 잊어버리진 않아요. 대개 본인 이름과 가족 이름은 기억합니다.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기 어려워하면 또 모를까.”
“그러면요?”
“치매라기보다는 단발적인 기억 상실로 보이고요, 아마 쓰러지시면서 머리를 부딪치셨을 겁니다. 혹은 이전에 충격이 있었는데 이제 여파가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 말에 선화가 안심이라는 듯 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자신의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애가 성격도 좀 다른 것 같은데. 너무, 너무 차분해. 조용하고. 말도 조곤조곤하고.”
“본인도 지금 상황이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의사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다 고개를 한쪽으로 내리며 선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석주를 쳐다봤다.
“강 비서님. 혹시 최근에 아진 씨 관련해서 해 주실 말씀 있나요?”
“……아니요.”
“별다른 일 없었다고요? 하나도?”
“예. 오늘 아침에도 멀쩡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긴 했습니다만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여름엔 자주 그러셔서. 그거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 쓰러지실 때도 제가 받았고요. 어디 부딪히거나 사고가 있던 것도 아닙니다.”
석주가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대기실 안의 아진을 흘끔거렸다. 아진은 여전히 볼펜을 딸깍거리고 있었다. 힘없이 처진 어깨와 등줄기가 그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과호흡이 와 얼굴이 새빨개져서 색색거리며 숨을 뒤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여태 그런 일이라곤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석주의 검은 눈동자가 걱정에 물들었다.
“일단 두개골이랑 뇌 쪽부터 검사 한번 해 보고요, 결과를 기다려 봅시다.”
의사가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렸다.
“내 새끼 어쩌면 좋아…….”
선화가 책상에 이마를 파묻었다. 의사가 걱정 말라며 그녀를 타일렀다. 석주는 조금 전 아진이 써낸 답안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끝으로 날짜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근데 이건 무슨 뜻일까요?”
[1951. 05. 11]
아진이 오늘이 며칠이냐는 질문에 쓴 답인데, 황당한 숫자였다. 의사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글쎄요. 혹시 회장님 가족 내외분 중에 해당 날짜와 연관 있는 분이 계신가요?”
그 말에 선화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우리 가족 중에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부모님 돌아가신 게 언젠데. 아진이는 갓난쟁일 때 말고는 할머니 할아버지 본 적도 없어요. 더군다나 이건 부모님 생신도 아니고, 기일도 아니에요.”
의사가 음……, 목으로 탁음을 내며 미간을 좁혔다. 선화는 연신 한숨을 흘려 댔다.
“…….”
석주가 먼 과거의 날짜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아진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겼다.
* * *
아진은 이틀간 병원 신세를 졌다. 아파서 그런 건 아니고, 검사를 위해서였다. 이틀 내내 병원에 갇혀 온갖 검사실을 전전했고, 의사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결과는 별것 없었다. 아진은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이었고, 작은 병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뿐.
아진은 퇴원해도 좋다는 명을 받았다. 실은 선화가 병원에 있어 봐야 기억이 나겠냐고, 집에 가서 돌보겠다고 해서 퇴원하게 됐다.
아진은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보들보들한 질감의 환자복도 기가 막히게 좋았는데, 선화가 건네준 옷도 끝내줬다. 품이 넉넉한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청색 바지였는데 평범한데도 뭔가가 묘하게 달랐다.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환자복을 곱게 갠 아진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자 석주가 슬쩍 그 옷을 빼 갔다. 아진은 그를 흘끔 보고는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좀 우리 아들 같네.”
아진의 짐을 정리하던 선화가 다가와 뺨을 감싸 왔다. 지나치게 단정하게 가라앉은 아진의 머리칼을 슥슥 위로 쓸어 올려 주기도 했다. 그러고는 빙긋 보기 좋게 웃었다. 아진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이것도 차고.”
그녀가 아진의 손에 묵직한 손목시계를 들려 주었다. 도금이 된 건지 진짜 금인 건지 반짝이면서도 미끈한 디자인의 손목시계가 낯설었다.
“…….”
아진이 그것을 쥐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환자복을 두고 온 석주가 익숙한 손길로 그것을 아진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체인이 부족하거나 남김없이 착 맞아떨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아진의 것이었다.
석주는 딱 시계만 채워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석주와 선화를 비롯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선화의 비서라는 사람도 왔는데, 선화가 싸 둔 아진의 짐가방을 들어 옮겼다.
“제가, 제가 할게요.”
할 일을 찾던 아진이 짐가방을 쥐려 했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일축한 비서가 문으로 향했다. 아진이 절뚝절뚝 그를 뒤 따라갔다.
“제가 할 수 있는데…….”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비서가 연신 거절을 내놓았다. 아진이 침통하게 아랫입술을 내미는데. 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진아. 발목 삐었어?”
“……네?”
“왜 자꾸 절뚝절뚝 걸어?”
그 말에 아진이 눈을 끔뻑이며 발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금 짧아야 할 왼쪽 다리를 슬쩍 들어 보는데. 시야에 석주의 뒤통수가 들어왔다. 그가 아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접고 꿇어앉은 거였다.
“발목 좀 보겠습니다.”
“어…….”
아진이 싫다며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러나 석주가 빨랐다. 그가 아진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복사뼈를 살살 매만지다가, 발등을 쥐고 좌우로 조심히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아진의 발을 죄 가렸다.
그 언젠가, 발이 시릴 때마다 조물조물 주무르며 온기를 묻혀 주던 그때 같았다.
“아프세요?”
“…….”
아진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선화가 석주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병원에 입원했던 날부터 이러셨습니다.”
“어머, 그래? 이것도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어제 했습니다. 근데 정상이랍니다.”
“그럼 멀쩡한 다리를 왜 절어.”
선화가 아진을 올려다봤다. 석주도 아진을 올려다봤다.
“…….”
아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쩡한 다리’. 그 말이 너무 생경해서 잠시 사고가 마비되었다. 하긴. 손가락도 멀쩡해졌는데 다리라고 멀쩡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진이 발목을 뒤틀어 석주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천천히 바로 섰다. 두 무릎이 일자로 가지런히 정렬했다. 엄지발가락부터 발바닥, 뒤꿈치까지 남김없이 바닥에 닿았다. 아프지 않았다. 허벅지나 종아리가 땅기지도 않았고, 무릎이 지끈거리지도 않았다. 은근히 짧았던 왼쪽 다리가 곡선 하나 없이 쭉 뻗어 있었다.
정말, 온전한 다리였다.
몰랐다. 병원 복도를 걸으면서도 내내 다리를 절었다. 그게 당연했으니까. 의도치 않게 멀쩡한 다리로 절름발이 행세를 하고 다닌 게 됐다.
“하…….”
아진이 짧게 탄식했다.
제가 진짜 다른 세상에 떨어진 건가. 아니면 다른 몸에 들어온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다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꿈 같지도 않았다. 아진은 아주 어렸을 때 다리를 다쳤고, 그 때문에 꿈속에서도 다리를 절었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 아니라는 건데.
얼떨떨함은 잠시였다. 심장이 쿵쿵쿵 거칠게 뛰었다. 벅찼다. 갑자기 앞으로 펼쳐질 삶이 기대가 됐다. 멀쩡한 두 다리로 걷기만 해도, 달리기만 해도 반푼처럼 행복할 것 같았다.
아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만개했다. 그걸 보던 선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머, 얘 봐. 갑자기 왜 웃어?”
그 말에 아진이 눈까지 접으며 웃었다.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
석주가 그런 아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 * *
아진이 자동차 시트를 손바닥으로 슥슥 매만졌다. 분명 가죽인데 보들보들하고 산뜻한 질감이 신기했다.
새로운 세상의 차는 생김새만 특이한 줄 알았더니 내부도 특이했다. 여름이라 푹푹 찌는 바깥과 달리 냉골에 들어온 듯 시원했고, 무엇보다 엔진 소리가 없었다. 고요하고 조용한 게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차를 구경하던 아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뻐끔 벌렸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높았다. 너무너무 높았다. 어찌나 높은지 하늘이 다 가려졌다. 창문에 찰싹 붙어 고개를 뒤틀어도 건물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거리는 또 왜 그리 깨끗한지. 무슨 도로가 이리 매끈한지. 얼마나 부자 도시이기에 차가 이리도 많은지. 사람들은 또 뭐 저렇게 멋지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제가 살던 서울도 매우 크고 번잡한 도시였는데,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진은 넋 놓고 새로운 세상을 구경했다. 이건 확실히, 꿈이 아니다. 제 모자란 상상력으로 이런 세상을 창조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