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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59화 (15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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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파도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석주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순간.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피부가 찢어지고, 뼈와 근육을 가른 총알이 심장 언저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잠시, 아니, 오랫동안인가. 아무튼 잊고 있던 죽음의 통각이 갑작스레 아진을 집어삼켰다.

“컥…….”

가슴을 움켜쥔 아진이 둔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앞으로 확 접었다.

“사장님? 사장님.”

놀란 석주가 아진을 부축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아진의 어깨와 팔뚝을 감싸 쥐었다. 아진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가 발작하듯 석주의 손을 쳐 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총을 맞았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날 두고 죽어 버린 게 누군데. 날 혼자 내버려 둔 게 누군데.

근데 왜 또 내 눈앞에 있어. 왜 멀쩡하게 내 앞에 있냔 말이야.

그는 붉어진 눈으로 석주를 대차게 쏘아보았다. 석주가 입을 꾹 다문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 당신이 왜…….”

아진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원망을 쏟아 내려는데. 지나간 죽음이 끊임없이 아진을 짓눌렀다.

낭자한 피, 서늘하게 식은 체온, 차가운 몸, 숨결 없는 건조함, 어긋난 시선, 대답 없는 석주, 죽어 버린 석주, 제 손을 떠나던 석주의 몸뚱어리.

그렇게 혼자 남은 저. 세상에서 사라진 저.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저. 까맣게 물든 죽음.

죽음.

암흑.

죽음.

암흑.

죽음의 여파가 아진을 집어삼켰다. 죽는 그 순간에는 평온하고 후련했는데. 이제 와 이렇게 몸이 떨리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큭, 허억…….”

숨이 뒤틀렸다. 폐부가 이미 공기로 가득 차 있는데, 그래도 숨이 모자랐다. 아진이 색색 거칠게 호흡했다. 목구멍이 꽉 막혀 있는 게 어찌나 답답한지. 손을 집어넣어 뚫고 싶었다.

가슴 속에 총알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이전엔 가시 하나뿐이었는데. 총알까지 더해지니 몹시 버거웠다.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속이 무겁고 메슥거렸다. 아진이 버티기엔 버거운 무게였다.

중심을 잃은 아진의 상체가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심상치 않은 상태를 인지한 석주가 다시 다가왔다.

“……사장님?”

“큽, 허억, 허어억…….”

“아진아.”

석주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아진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하얀 손등 위로 힘줄이 불룩 올라왔다. 아진이 억척스레 석주를 잡아당겼다.

“나 좀……, 하윽, 나 좀…….”

살려 줘.

제발.

다시 죽고 싶지 않아.

아진의 마른 등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석주가 침대맡에 달린 비상벨을 꾹꾹꾹 다급히 눌렀다. 그때, 아진의 눈꺼풀이 위태로이 흔들린다 싶더니 앞으로 푹 맥없이 고꾸라졌다. 석주가 그를 품으로 받아 냈다.

널찍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아진은 어렴풋이, 석주의 품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 * *

아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실에 사람이 많았다. 멀찌감치 선 석주와 중년 여성,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여럿이었다. 아진이 흐린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아직도 병실인가. 그럼 손가락이 잘리고 총에 맞았던 건 다 뭔가, 진짜 꿈인 건가, 아닌데, 라는 고뇌를 시작하기도 전에 높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확 꿰뚫었다.

“아진아! 내 아들! 일어났어? 응? 엄마 보여?”

보드랍고 뭉근한 냄새가 아진을 덮쳤다. 심각한 얼굴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가 다정한 손길로 아진의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세상에, 아가.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쓰러지긴 왜 쓰러져, 어? 엄마 진짜 놀라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미팅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왔잖니. 어디가 아퍼, 어디가. 응? 엄마가 자꾸 회사 출근하라 그래서 짜증 났어? 그랬어? 스트레스받았다고 시위하는 거야? 응?”

와다다 쏘는 목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말 중 제대로 들은 게 반뿐이었다. 아진이 흐린 시야를 헤치고 그녀를 바라봤다.

멋들어진 여성 정장을 입은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냥 똑 단발은 아니고 우아하게 웨이브가 진 단발머리였다. 피부는 맑고 희었으며 생기가 넘쳤다. 중년이라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눈화장은 필요한 만큼만 되어 있었고 입술은 짙은 연지색이었는데 그녀와 몹시 잘 어울렸다. 쌍꺼풀이 깊게 진 눈은 크고 또렷했으나, 연륜 때문인지 그윽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뻑뻑한 눈을 애써 깜빡이던 아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어?”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야, 네 엄마지.”

“……어머니요?”

아진의 눈가가 팽팽하게 펴졌다. 엄마라고? 나한테 엄마가 있어? 그것도 이렇게 멋진 엄마가?

……왜? 평생 어디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건데. 어디서 뭐 하다가. 나를 잃어버려 놓고 이제 와 그렇게 사랑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보는 건데?

당황함, 놀라움, 기쁨, 황당함, 미움, 원망, 반가움, 안도 등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아진은 그 많은 감정 중 어떠한 걸 선택해서,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여자의 표정도 괴상하게 뒤틀렸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너 지금 나를 어머니라고 부른 거야?”

“…….”

“……아진이 너 엄마 놀리는 거지? 엄마 이런 거 딱 질색이야. 알면서? 엄마 지금 무서워지려고 해.”

“…….”

아진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여자가 휙 고개를 돌려 석주를 쳐다봤다.

“강 비서. 우리 아진이 왜 이래?”

아진이 여자를 따라 석주를 바라봤다.

……강 비서?

“환자분 이름 써 보세요.”

아진은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진료실로 들어왔다. 머리를 바짝 당겨 묶은 의사가 넓고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는 정체 모를 것들이 많았다. 깨알 같은 크기로 한글이 쓰인 네모난 주판이나, 검은색의 커다란 판자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걸 대체 왜 얼굴 앞에 두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진이 쭈뼛쭈뼛 그녀의 앞에 앉았다. 의사는 친근하게 안부를 묻다가, 아진의 앞에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신기한 생김새의 펜도 주었다.

의사가 딸깍, 펜 뒤축을 눌러 펜촉을 빼내 주었다. 아진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그녀가 했던 대로 딸깍딸깍 볼펜 촉을 넣었다가 뺐다. 신기했다.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진료실에 딸깍딸깍 펜 소리가 울렸다.

그 기이한 정적이 수 초간 흘렀을 때. 의사가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름이요. 본인 이름.”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아진이 딸깍 볼펜 촉을 빼냈다. 그리고 종이의 왼쪽 귀퉁이에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써 갔다.

[아진]

그것을 본 의사가 물었다.

“환자분 성은요?”

“…….”

“성-이요. 이름 앞에 붙는 거.”

“성씨가 뭔진 알아요.”

“네. 그거요. 그건 왜 안 적으세요?”

“…….”

아진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성. 그거 없는데. 하지만 눈치껏 알았다. 여기서 ‘저는 성이 없는데요’라고 해 버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라는 걸.

아진이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다급하게 입을 뗐다.

“한. 한. 한아진.”

“……한이요?”

“그래. 한.”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아진] 앞에 [한]이라는 글자를 느리게 써 넣었다. 제 이름 앞에 뭐가 붙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한아진. 한아진. 한아진. 그 이름을 속으로 세 번쯤 읊조려 보았다. 어감이 퍽 나쁘지 않았다. 내내 미완성이던 것이 비로소 완성된 것 같기도 했다.

아진이 펜을 내려놓으려는데. 의사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좋아요, 아진 씨. 이제 나이도 써 볼까요?”

그건 어렵지 않았다. 아진은 이번엔 가볍게 자신의 나이를 적었다.

[21살]

근데 병실 가득 정적이 차올랐다.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아진이 고개를 슬쩍 움츠리며 사람들을 살폈다. 틀렸나. 하지만 제 나이는 21살이 맞는데. 하긴, 아닐 수도 있겠다. 몇 살에 납치를 당했었는지 모르니까.

시험 문제를 틀린 듯한 기분에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무는데 의사가 의자에서 상체를 떼고 눈을 지그시 맞춰 왔다.

“아진 씨 생일이나, 키, 몸무게 같은 것도 써 볼래요?”

“어……. 모르……겠는데…….”

“그럼 가족이요. 가족에 대해 써 보세요. 구성원의 이름이나 있었던 일이나, 놀러 갔던 곳이나, 뭐든 좋아요. 말로 해도 좋고요.”

“…….”

아진의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가 쥔 펜은 도통 움직일 줄 몰랐다. 의사가 재차 책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아진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를 가리켰다.

“혹시 옆에 계신 분은 누군지 아시겠나요?”

“어, 어머……니……라고…….”

“네, 좋아요. 그럼 어머님 성함은요?”

아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보는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고민한대도 모르는 걸 갑자기 깨우치겠나.

그에 여자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기도 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선화. 선화야. 아진아, 네 엄마 이름. 선화.”

“……선화.”

“그래.”

아진이 자신의 이름 옆에 [한선화]라는 글씨를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꼭 어린아이가 글을 쓰는 것처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의사는 그 후로도 이것저것을 물었다. 아진이 대답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원래도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던지라. 아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의도 모를 질의가 그만 끝났으면 했다.

그때, 의사가 고개를 슬쩍 앞으로 내밀며 물어 왔다.

“그럼 마지막으로요. 저기 아진 씨 뒤에 있는 분은 누구인지 기억하시나요? 아진 씨 정기 검진 때마다 같이 오셨었는데.”

아진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석주가 서 있었다. 머뭇거리던 아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젠가, 제 이름만큼이나 많이 썼던 이름을 꼭꼭 눌러 적었다.

[강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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