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석주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진은 대체 어디 있나. 그의 눈동자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나부끼는데. 덕재가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형님. 이거, 초인종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안경 통이었다. 뜬금없는 물건이었다. 아진은 물론 순철도 안경을 쓰지 않았으니까. 불안한 마음에 호흡을 몰아쉰 석주가 안경 통을 열었다.
그곳엔,
“…….”
또 하나의 손가락이 있었다. 아진의 새끼손가락이었다. 석주가 차마 그것을 집지 못하고 바라만 봤다. 이미 아진의 몸뚱이에서 잘려 나온 것인데, 너무 아파 보여서. 아플 것 같아서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석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덕재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의 눈치를 슬쩍 보다, 안경 통 뚜껑에 붙어 있던 종이를 떼 주었다. 명함이었다.
[중호 물산
사장 박기헌
전화: (02) 712-0048]
기헌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빤히 보던 석주가 그것을 콰드득 구겼다. 근데 명함 뒤에 볼펜으로 휘갈겨진 글씨가 보였다. 석주가 그것을 다시 펼쳤다. 삐뚤삐뚤하게 쓴 글씨체가 드러났다.
[오붓하게 셋이서만 보지. 늦게 오면 우리 둘이 보게 될 수도 있고.]
짧은 문장을 두 번 연달아 읽은 석주가 명함을 버렸다. 오붓하게, 셋, 우리, 둘. 기헌이 언급한 그 모든 단어가 혐오스러웠다.
그가 떨어진 명함을 콱 지르밟았다. 안경 통은 어쩔까, 하다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조심히 닫아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석주가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덕재가 얼른 명진에게 달려가 명함에 적혀 있던 문장을 전했다. 그에 명진이 허겁지겁 석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형님, 안 됩니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혼자 가시는 건 안 됩니다. 금마가 진짜 혼자 있겠습니까. 거 몇 명이나 있을 줄 알고예. 절-대로 안 됩니다.”
“비켜.”
“거기 아진이가 있다는 확신은 또 우예 합니까. 그 새끼들이 이미 뭔, 뭔 짓을 했을 수도 있는 기고. 아니, 아니, 아진이를 그렇게 쉽게 죽이겠습니까. 이 지랄 떨어 놓은 거 보면 아진이 미끼로 뭐 할라는 것 같은데, 살려 둘 겁니다.”
“…….”
“경찰에 연락했으니까 가들 보고 가 보라고 하시죠. 그다음에, 그다음에 우리가 가도 됩니다.”
“…….”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는 건 딱 죽으러 가는 거라고요!”
석주는 답 없이 명진을 지나쳤다. 얼른 가야 했다. 주머니에 넣어 둔 안경 통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 같았다. 피부를 녹이고 가슴 저 안쪽까지 파고드는 게 말도 못 하게 아팠다.
근데 실로 손가락이 잘린 아진은 어떻겠나. 지금 기분이 어떻겠나. 얼마나 무섭고 외롭겠나.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무해하지 않은 적이 없던 존재인데. 제가 여태껏 보아 온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고 무고한 존재인데. 그 예쁜 아이의 손가락을, 손가락을…….
대문을 타 넘은 석주가 차 앞에 섰다. 그리고 운전석 문을 여는데. 명진이 넙데데한 손으로 문을 쾅 닫았다.
“형님! 이래 가시면 우짭니까. 저희 생각도 좀-”
“명진아.”
석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진을 불렀다. 심상치 않은 음성에 명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가 그를 보며 읊조렸다.
“나, 지금 죽고 싶다.”
“…….”
“죽고 싶어, 명진아.”
석주의 검은 눈동자 위로 눈물이 차올랐다.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뜨끈뜨끈했다. 너무 무서워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성은 진즉 침몰했다. 지금 석주를 움직이는 건 온전히 공포였다.
석주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명진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내가 죽는대도 상관없다.”
“…….”
“그래서 아진이를 구할 수 있다면, 아진이가 산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을 거다.”
“……형님.”
“미안하다, 명진아.”
“…….”
“식구들 잘 부탁한다.”
석주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콱 액셀을 짓밟았다. 차가 거친 엔진음을 우짖으며 앞으로 훅 튕겨 나갔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허망하게 선 명진의 모습이 비쳤다. 석주가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목적지는 중호 물산. 명함에 적혀 있던 곳이었다. 언젠가 석주가 기관총을 들고 쳐들어갔던, 그리고 기헌의 오른쪽 팔뚝을 손가락부터 차근차근 잘라 냈던 곳이기도 했다.
“하아…….”
석주가 짙은 한숨을 내쉬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머릿속이 난잡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다 기헌 때문인가. 그때 기헌을 제대로 죽이지 못해서 이 꼴이 된 건가. 혹 아니면, 신이 정해 둔 운명이 원래 이러한 것인가. 우리는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근데 주제도 모르고 설렜나. 주제도 모르고 함께하려 했나. 신이 정해 둔 운명을 거스르려 했나. 그 운명을 부득부득 무시해서 이런 상황이 도래한 건가.
그렇다면 역시, 제 탓이다.
아진에게 찾아가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제 잘못이다.
다 제 잘못이니, 벌은 제가 받겠다. 온전히 저만 받아야 했다. 아진이 제 죄를 뒤집어쓰는 건 잘못됐다. 신이 설마 그런 오판을 하겠나. 신이 설마 그런 실수를 저지르겠나.
신이 설마, 설마.
“씨발…….”
석주가 핸들을 부술 듯 움켜쥐었다. 그러나 분노는 짧았다. 곧 더 큰 공포의 파도가 그를 집어삼켰다. 석주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읊조렸다.
“아진아, 제발…….”
제발 살아 있어. 내가 대신 아플게. 대신 죽을게. 다시는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게. 너에게 찾아가지 않을게. 너를 그리워하지 않을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뭐든, 뭐든 할게. 너와 연결된 모든 걸 끊어 낼게.
그러기 위해 제 눈과 사지를 잃어야 한대도 괜찮다. 다른 것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었다. 피를 바치고, 심장을 바치고, 목도 잘라 줄 것이다.
그러니……
살아만 줘. 제발.
[중호 물산]이라 적힌 간판은 녹이 슬어 있었다. 일이 있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거늘, 건물은 폐허의 느낌을 물씬 풍겨 댔다.
차에서 내린 석주는 곧장 총을 빼내 들었다. 그리고 망설일 것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부는 어둑했고, 피가 썩어 가는 특유의 쿰쿰하고 독한 냄새가 났으며, 총구멍이 난 가구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진도 기헌도 보이지 않았다. 석주가 직선으로 쳐들었던 총구를 내렸다.
어디 있는지는 뻔했다. 사장실이겠지. 기헌은 깡패답지 않게 극적인 걸 좋아했으니까.
석주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번에 세 개씩 올라갔다. 그러면서 총을 든 손 뒤꿈치로 쾅쾅 옆통수를 때렸다.
제발 생각해. 생각을 해. 이성적으로 굴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아진이를 구해야 해. 아진이 대신 네가 죽어야 해. 아진이를 위해서, 아진이를 위해서, 아진이를 위해서…….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온 석주가 복도 끝에 있는 사장실을 쳐다봤다. 문틈에서 전등 특유의 노르스름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엄지로 권총의 탄창을 밀어 총알을 확인한 석주가 성큼성큼 그곳으로 향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를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1초라도 빨리 아진을 보고 싶었다. 살아 있는 아진을 봐야 했다.
아니, 차라리 없었으면. 이곳에 없었으면. 다 기헌이 창조한 허튼수작이었으면. 내가 여기서 의미 없이 죽는대도 상관없으니 너는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석주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아진을 보는 순간. 여기까지 오며 다잡은 이성과 암시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 진아…….”
석주가 비통한 목소리로 아진을 불렀다. 그러나 고개를 옆으로 늘어트린 아진은 대답이 없었다.
“…….”
아진은 책상 아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말이 앉아 있었다지 널브러져 있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손에는 정체 모를 천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피에 잔뜩 절어 있었다. 지혈하라고 들려 준 것 같은데, 천도 더럽고 비틀어 짜면 피가 주르륵 쏟아질 정도로 젖은 상태였다.
넋 놓고 있는 얼굴은 창백하고, 허망했다. 험하게 다뤄진 건지 얼굴 여기저기에 먼지가 묻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볼을 가로지른 눈물길이 지나치게 또렷하게 드러났다. 속눈썹은 눈물이 주렁주렁 걸려서 맥없이 축 가라앉아 있었다.
손찌검까지 당한 건지 코 아래가 피범벅이었고, 입술과 턱도 피가 엉겨 있었다. 광대는 푸르딩딩했다.
“아…….”
석주가 숨을 거꾸로 집어삼켰다.
그렇게 잔인한 장면은 아니었다. 석주는 시체가 나뒹구는 전장 같은 싸움판을 전전하며 살아왔고, 아진의 저런 모습도 몇 번 봤다. 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제가 그를 때리고, 그를 울리고, 그를 짓밟았었으니까.
근데 왜 이리도 충격적인지. 왜 이리도 아프고, 아픈지.
석주는 나약하게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성을 다잡아야 하는데, 골로 가 버린 머리통이 도무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비통했다.
“아진아…….”
그가 터덜터덜 아진에게 다가가는데.
탕!
묵직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를 가르며 직선으로 쭉 뻗어온 총알이 석주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푹, 하고 살이 파이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어깨가 통렬하게 뜨거워졌다.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녹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석주가 아진에게 박혀 있던 시선을 좌우로 옮겼다. 뒤늦게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악역일 뿐인, 하등 쓸모없는 조연들 말이다.
사장실 안에는 아진을 제외하고 총 다섯이 있었다. 기헌과, 여전히 살집이 많은 창두, 그리고 이름 모를 셋이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석주가 죽이지 못한 중호파의 조직원이거나, 그 조직원의 가족이거나가 아닐까 싶었다.
석주가 기헌을 직시했다. 기헌은 얼굴이 많이 상했다. 안색이 까무잡잡해졌고, 수염이 비죽비죽 불규칙하게 나 있었으며, 입술은 하얗게 떴고, 팔 한쪽이 없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속없는 셔츠 팔뚝이 축 늘어져 있었다. 곁에 서 있는 창두 역시 그랬다. 둘 다 석주를 대차게 노려보는 게 팔을 잃은 복수심이 정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