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괜히 조급해진 석주가 주제넘게 아진의 곁에 붙어서는데. 한 뼘쯤 벌어져 있던 대문이 끼이익, 하며 열렸다. 석주와 아진이 동시에 그곳을 쳐다봤다. 명진이 얼굴을 쑥 들이밀고 있었다.
“형님. 출근하셔야죠.”
“……어, 벌써?”
“벌써라뇨.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 세 시간 지난 것 가지고 왜 벌써. 오늘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짜증이 먼저 치밀었다. 그러나 티를 낼 순 없었다.
석주가 부탁한 일이어서.
오늘 아진의 집으로 오면서 명진에게 언질을 줬었다. 점심쯤, 저를 불러내라고. 누군가가 저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아진의 집에서 못 나올까 봐. 눈치 없는 척 그의 옆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아 움직이지 않을까 봐. 나름대로 대비를 해 둔 거였다.
“그래.”
석주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리고 아진을 내려다봤다.
“가 봐야겠다.”
“아…….”
아진의 눈가에 여러 감정이 스몄다. 그중 가장 큰 감정은 단연 실망이었다.
간다고? 벌써? 곧 점심때인데, 밥 같이 안 먹고? 까지 생각하다가 제가 너무 바보 같고 미련해서 그만두었다. 아진이 얼마나 서 있었다고 지끈거리는 무릎에 체중을 좌우로 옮기길 반복하는데. 석주가 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곧 순철이 올 거야.”
“……네.”
아진이 느린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다리가 저려서 좁은 보폭으로 걸었는데, 희한하게 석주가 멀어지지 않았다. 그도 천천히 걷고 있어서 그랬다.
그러나 마당이 작아서 대문까지 당도하는 건 금방이었다. 명진이 쓸데없이 친절하게 대문을 훤히 열어 주었다. 그를 슬쩍 노려본 석주가 아진을 뒤돌아봤다. 그리고 빙긋 웃어 보였다. 어른의 미소였다. 웃고 싶지 않아도 내보일 수 있는 허황한 미소.
“갈게. 잘 지내.”
“……안녕히 가세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아진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석주가 팔랑거리며 흔들리는 아진의 검은 머리칼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망막에 새겨 넣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그리고 아쉬움이 가득한 등으로 뒤를 돌았다. 그가 차에 타고, 명진이 문을 닫아 주었다.
“아진아. 우리 간데이.”
명진이 아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진이 옅게 웃으며 까딱 묵례했다. 명진이 조수석에 올라타고, 차가 출발했다.
아진이 멀어지는 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분이 묘하게 울적했다. 석주가 절 두고 떠나는 장면은 몇 번 접한 적이 없는지라 면역이 없었다.
우울함에 잠식된 아진의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거친 엔진음이 들린다 싶더니 곧 다른 차가 대문 앞에 와 섰다.
순철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붕붕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진아. 내 왔데이. 밥 뭇나?”
반가움 가득한 인사에 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려앉던 눈썹도 아치를 그리며 올라갔다.
“오셨어요? 아직이요. 형님은 드셨어요?”
외로울 틈이 없다.
* * *
아진이 자려고 침대에 막 누웠을 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집 전화가 울리는 것이라고 인지를 못 했다. 밤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라 생각했다. 전화벨이 세 번쯤 더 울리고 나서야 거실에 있는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임을 인지했다.
아진이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침실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전화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그게 몹시 시끄럽게 느껴졌다. 전화가 울린 건 처음이라 그랬다.
이내 거실에 도착한 아진이 전화기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 천천히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꽃님이 병원에 있을 때, 그녀와 통화한 이후로 처음 뱉어 보는 문장이었다. 그 생경함에 입술을 쭈뼛거리는데. 건너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아.
“…….”
-나야. 석주 형.
“아, 네…….”
아진이 속에 쌓아 두던 숨을 길게 뱉어 냈다. 낯선 이가 아니라 석주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긴장해서 어깨를 슬쩍 안으로 말았다. 생각해 보면 딱히 석주여서 다행인 건 아니었다.
-아직 안 자네.
“막 자려고 누웠던 참이었어요.”
-그래? 어…… 많이 졸려?
“아뇨, 그건 아닌데…….”
아진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집에 혼자 있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몸 둘 바를 몰랐다. 전화기 뒤에 있는 커튼을 괜히 만지작거리던 아진이 물었다.
“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근데 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
아진의 손에서 커튼이 떨어져 나갔다. 그 작은 충격에 커튼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아진이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서 있는 게 불편해서 서랍 아래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전화로 목소리 듣는 건 처음이네.
“그렇네요…….”
-듣기 좋다.
“…….”
아진이 턱을 안으로 움츠렸다. 석주에게 듣는 칭찬이 왜 이리 낯간지러운지 모르겠다. 좋다, 예쁘다, 잘생겼다, 보고 싶어서,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가 신기했다. 조금…… 부럽기도 하고.
아진이 이런 말에는 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석주가 또 말을 걸어왔다.
-……보고 싶어, 아진아.
“우리 아까 봤잖아요.”
-응. 보고 나니까 더 보고 싶더라고. 근데 또 찾아가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전화해 봤어. 늦었는데, 받아 줘서 고마워.
“…….”
옅게 지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참 좋았다.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덥다는 이유로 상체를 훤히 드러낸 채 서재 책상에 앉아 있을 석주의 모습이 상상됐다.
아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 침묵을 불편으로 알았을까. 석주가 통화를 끝내려 했다.
-이만 끊을게. 잘 자.
“아니, 어, 형은, 형은 안 자요?”
아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놓고 눈을 질끈 감으며 후회했다. 뭐에 쫓기는 것처럼 물은 게 영 본새가 안 났다. 그렇게 물은 게 고작 잠 안 자는 거냐니. 아까 낮에도 물어봤으면서.
수화기 아래를 손으로 틀어막은 아진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건너편에서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잘 시간 되려면 멀었지.
“그 시간이 몇 시인데요?”
-음……. 새벽 한두 시쯤. 아니면 서너 시쯤.
“그게 뭐야.”
아진이 핀잔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넘어가 주라. 나는 여전해.
“…….”
여전해. 그 말이 듣기가 좋았다. 그 말 뒤로 따라붙는 의미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네가 없어서 못 자. 여전히 네가 없어서 행복하지 않아. 여전히 너를 그리워해. 여전히 네가 좋아.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런 거.
아진이 솟구치는 입꼬리를 막기 위해 입술을 겹쳐 무는데. 석주가 특유의 저음으로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네.”
-주말에, 그러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아니면 이틀 다도 좋고.
“네.”
-저녁…… 같이 먹을까.
아진의 호흡이 뚝 끊겼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
-같이. 우리 둘이서만.
“…….”
-물론 싫으면 안 만나도 돼. 어렵게 생각하지 마. 싫으면 싫다고 해. 그래도 괜찮아.
석주는 낭만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권유했다. 호흡을 참던 아진이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제 숨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찬 바람에 서 있는 것처럼 뺨이 얼얼해지고, 발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심장이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배꼽 언저리가 찌릿찌릿했다.
아진이 쉽게 입을 떼지 못하자, 석주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아진아?
그 부름에 긴장한 심정이, 애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아진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토요일에…… 봬요.”
-…….
이번엔 석주가 침묵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수화기를 쥔 채 굳어 있었다. 아진이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꾹꾹 짓누르며 석주의 답을 기다렸다. 수 초 후, 석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
-고마워, 아진아.
그 말에 아진이 어깨를 아래로 탁 풀어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상하지. 석주와 떨어지기 위해 집에서 나온 것인데,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음으로써 가시가 조금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설거지를 하던 아진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쭉 편 후, 하나하나 접으며 중얼거렸다.
“목금토. 사흘…….”
토요일까지 사흘 남았다. 석주와 통화한 게 월요일이었으니까 고작 이틀 지났다는 뜻이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아진은 ‘약속’이라는 걸 평생 처음 잡아 봤다. 어떠한 날짜를 목표로 두고 하루하루 세어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떨리고,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건가.
아진이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제가 지금 약간 미친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니다. 밥 먹자는 약속이 뭐라고 이렇게 기다리는 건지. 석주와 밥 먹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별의별 짓을 다 겪었으면서 고작 이런 거로…….
하물며 어제는 순철과 장을 보러 갔다가 옷까지 새로 샀다. 토요일에 입어야지, 하면서. 석주는 분명 정장을 입고 나올 테니 저도 좀 반듯한 옷가지가 필요하지 않겠나. 후줄근한 차림새로 그의 앞에 앉아 있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산 옷은 혹 주름이라도 질까, 옷걸이에 곱게 걸어 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 사실을 저만 아는데, 누가 놀린 것도 아닌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제가 대체 뭘 하는 건지, 무슨 생각인 건지 저도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나도…….”
입을 앙다문 아진이 뽀득뽀득 그릇을 힘주어 닦았다.
안 올 것 같던 금요일이 왔다. 목요일까지만 해도 시간이 그렇게 안 가더니, 금요일이 되자마자 시간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아침에 눈을 뜬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금세 점심때였고, 어느새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식탁까지 꼼꼼히 닦은 아진이 행주를 대충 빨고,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미숫가루를 걸쭉하게 탔다. 흑설탕도 한 숟갈씩 넣었다. 하나에는 반 숟갈 더 넣었다. 순철은 단걸 좋아하니까.
양손에 미숫가루를 하나씩 든 아진이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마당으로 나왔다. 순철은 단상에서 자고 있었다. 미숫가루를 단상 끄트머리에 올려 둔 아진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순철이 형님.”
“…….”
“순철이 형님. 미숫가루 좀 드세요.”
순철은 쉽게 깨지 않았다. 아진이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순철이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더니 털썩 정면으로 돌아누웠다.
근데, 그의 가슴에 굵직한 칼이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