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뒤늦게 계속 석주를 대문 밖에 세워 두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아진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아, 들어, 들어오세요.”
“응.”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석주의 구두가 대문을 타 넘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아진아.”
“네?”
“약과는 못 사 왔어. 미안해. 아직 문을 안 열었더라.”
석주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눈썹까지 일그러져 있었다. 그에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웬 약과 타령인가, 싶다가 뒤늦게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이사 오던 날. 석주가 물었었다.
‘아진아. 혹시 내가 가끔…… 아주 가끔, 와도 괜찮을까.’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오래 안 있을게.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
그 말에 제가 약과 사 오라는 답을 했었지. 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요.”
아침 양치질을 안 해서 그런가. 이미 입 안이 달았다.
아진은 석주의 앞에 진하게 끓인 보리차를 내려놓았다. 평생 종으로 살았는데 이제 와 차를 즐길 리도 없고,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할 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끓여 먹는 게 보리차였다.
“고마워.”
석주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아진이 찬장에서 둥그런 통 하나를 꺼냈다. 그곳엔 쿠키가 잔뜩 들어 있었다. 엊그제, 순철이 사다 준 것이었다. 서양 과자점에 파는 값비싼 과자인데, 쿠키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진은 그것을 아낌없이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놓았다.
“이거, 순철이 형님이 사다 주신 거예요. 맛있더라고요.”
“……그랬어?”
석주가 씩 웃으며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 얼굴에 묘하게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아진이 몇 번이나 본 얼굴이었다. 약과나 콜라나, 그가 갖다 준 것을 맛있게 먹고 있는 저를 보는 그의 얼굴이 딱 저러했다.
“설마…… 사장님이 사 주신 거예요?”
아진의 물음에 쿠키를 씹던 석주의 턱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대꾸했다.
“아냐. 순철이가 사다 줬다며.”
“그러니까…… 사장님이 시켜서, 사장님 돈으로, 순철이 형님이 사다 주신 거겠네요.”
“…….”
석주는 침묵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그가 저 몰래 한 짓이 또 무어가 있을까, 하고. 그러다 순철이 얼마 전에 튀긴 닭을 사 온 게 떠올랐다.
“혹시 저번에 순철이 형님이 사 온 닭도-”
“순철이 형님이라고 불러?”
석주가 아진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지나치게 중심을 벗어난 질문에 아진이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네? 사장님이요?”
“나는 왜 사장님이야.”
“……사장님이시니까?”
이게 무슨 괴상한 대화지. 아진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석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네 사장님 아니잖아.”
“…….”
아진이 헛숨을 삼켰다. 차갑게 느껴지는 말에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상체는 뒤로 밀렸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새삼스러운지. 그가 엄지손톱으로 다른 손가락 끝을 꾹꾹 짓이기는데. 석주가 자신의 입술을 혼내듯 잘근잘근 깨물었다가 놓으며 사과했다.
“미안. 말이 좀 거칠었다. 그게 막 그렇게, 매몰찬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어…….”
“…….”
“순철이는 나보다 훨씬 늦게 만났는데. 걔는 형님이고 나는 사장님인 게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진 기분이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석주는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한해서는 한없이 떳떳했다. 늘 그랬다. 사랑도, 분노도 감추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아진의 어깨가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질투. 그 단어가 석주의 입에서 나오는 게 꽤나…… 즐거웠다.
“그럼 사장님도 석주 형……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아니.”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그럼 뭐 어쩌라고. 설마 ‘야’나 ‘너’ 같은 걸 바라는 걸까. 그건 아진이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가 아무리 못 배웠더라도 어쨌거나 한국 사람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아진이 가만히 석주를 쳐다보는데. 석주가 슬쩍 바라는 것을 꺼내 놓았다.
“……석주 형은 어때?”
석주 형님은 모든 식구가 부르는 호칭이었다. 명진도 덕재도 순철도 그렇게 불렀다. 그 흔한 호칭을 굳이 아진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이 더 가까워 보이지 않나. 아진이 저 붉고 통통한 입술로 형, 형, 하면서 저를 부르면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석주가 기대 실린 눈으로 아진을 쳐다봤다. 딱히 재촉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재촉이 되어 버렸다. 흉터 난 손목 안쪽을 긁적이던 아진이 넌지시 되물었다.
“……형이요?”
“응. 싫어?”
“아뇨……. 그건 아닌데…… 너무…….”
“너무?”
“……아니에요.”
너무 친해 보이지 않나요.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데. 라는 말이 입천장을 간질였는데, 굳이 꺼내 놓지 않았다. 석주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제가 머리 자른 모습이 보고 싶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온 이에게 소금을 뿌릴 생각은 없었다. 고작, 고작 호칭인데 뭐.
“한번 불러 봐.”
석주가 슬쩍 던지듯 말했다. 나 기다리는 거 아니야, 기대하는 거 아니야, 라는 표정으로. 애써 심드렁한 척하며 먹다 만 쿠키를 입에 집어넣었다.
“…….”
아진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사실 석주와의 나이 터울이 열 살이 훌쩍 넘는지라 형이라는 칭호가 딱히 어울리진 않았다. 뭐,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만. 그런 호칭이 어울리는 얼굴도 아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형이 제일 나은 것 같았다. 물론 편한 건 사장님이지만 듣는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나.
꼴깍 마른침을 삼킨 아진이 느리게 입을 뗐다.
“석주…… 형.”
나직한 목소리에 석주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서 가슴도 두툼하게 부풀었다. 넥타이가 목을 조였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질식해서 죽어 버려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미 혼수상태에 가까운지라.
“……응, 아진아.”
석주가 아진의 이름을 머금듯 대답했다. 그의 낯에 황홀함이 넘실거렸다. 그 감정이 아진의 눈에 고스란히 맺혔다. 입술을 말았다가 놓은 아진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석주 형.”
“응, 아진아.”
석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검지가 톡톡톡 바쁘게 식탁을 두드렸다. 그러다 자신의 튼실한 허벅지를 꽉꽉 주물렀다가, 죄 없는 귀를 쭉쭉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움직거렸다.
아진의 눈썹이 조용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석주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제가 좋다는 티를 내긴 했어도 항상 여유롭고 어른스러웠는데. 지금은 꼭 풋사랑을 하는 순진한 청년 같았다.
석주의 모든 이면을 봐 놓고도 그를 그렇게 볼 수 있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했다.
“……새롭네요.”
아진이 바람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새롭네. 새로워서 좋다.”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가운 보리차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의 만면이 봄볕에 달뜬 것처럼 화창했다.
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석주를 따라 보리차를 들이켰다. 고소한 게 제법 맛이 좋았다.
석주는 난데없이 집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 본인이 꾸민 집이면서, 다녀간 지 몇 주 안 됐으면서, 뭐가 궁금한 건지. 아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순순히 그를 데리고 집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마당으로 향했다. 그나마 구경할 게 가장 많은 곳이었다.
“잠은 잘 주무세요?”
아진이 접힌 운동화 뒤축을 검지로 빼내며 물었다.
“어?”
흔들흔들하는 아진의 팔꿈치를 잡아 주던 석주가 되물었다.
“잠이요. 잘 주무시냐고요.”
신발을 바로 신은 아진이 등을 폈다. 석주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어…….” 하고 말을 끌었다. 그러다 이내 부정을 내놓았다.
“아니.”
“…….”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석주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아진이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해가 쨍쨍한 바깥에서 보니 그의 얼굴이 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언젠가 코피를 쏟을 때만큼은 아니나 피부도 거칠어 보이고, 눈 밑도 거뭇거뭇했다.
아진이 걱정과 잔소리가 섞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텃밭 열심히 가꾼다고 들었어.”
석주가 말을 돌렸다. 다행히 아진의 시선이 빠르게 텃밭 쪽으로 이동했다. 요새 가장 흥미 있는 것이라서.
“네. 뭘 키우는 건 처음인데 시간이 정말 잘 가요.”
아진이 텃밭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석주가 그를 뒤따랐다. 텃밭 앞에 선 아진이 조그마하게 잎이 올라온 작물을 가리키며 종알종알 말했다.
“이거는 시금치고요, 이거는 대파예요.”
“그래?”
“네. 그리고 이거 보세요. 대파는 벌써 싹이 났어요. 파가 원래 빨리 자란다고 하던데, 책에 적힌 것보다 더 빨리 자랐어요. 볕이 잘 들어서 그런가 봐요.”
“응, 그런가 보네.”
“여름에는 오이랑 배추도 심을 거예요. 다른 것도 심어 보고 싶은데, 제가 밭일은 처음이라서 겁나요. 얘들도 생명이라고 죽으면 미안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해 보려고요.”
아진은 벌써 일 년의 계획을 모두 짜 둔 것 같았다. 가을엔 무얼 심을 것이다, 겨울에는 할 일이 딱히 없는데 집 안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도 있다더라. 그땐 화분을 둘 것 같다, 라며 신나 했다. 석주가 방문한 이래로 가장 말이 많았다.
석주는 그 수다를 기껍게 들어 주었다.
“재미있어 보이네. 텃밭을 더 크게 만들 걸 그랬다.”
“아뇨. 딱 좋아요. 저 혼자서 갈무리할 수 있잖아요.”
“……그래.”
석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진의 입에서 나오는 ‘혼자’라는 단어가 왜 이리 아픈지 모르겠다. 혼자 있는 아진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아픈 건지, 아니면 저와 함께할 틈일랑 주지 않는 아진에 실망해서 아픈 건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