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아진이 집이요?”
“그래. 으……. 이상하다. 아진이 집이라 카니까. 아무튼 아진이 집에 가자.”
“아진이 만나실라고요?”
“아니. 그럼 아진이가 싫어해.”
“…….”
“그냥 집만 보고 올 거야. 집만. 조용히. 아진이 모르게…….”
아진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석주가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국밥집을 나섰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조직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모두가 명진을 흘끔거렸다. 명령을 기다리는 거였다.
명진이 석주의 널찍한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그의 뒤에 따라붙으며 모나게 접힌 두루마기 깃을 펴 주었다.
“집 앞에 가신다면서 넥타이는 왜 하고 두루마기는 왜 입으십니까.”
그 말에 석주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몇 번 눈을 끔뻑이던 그가 이마를 긁었다.
“혹시…… 모르잖아. 혹시 우연히. 아진이를 만날지도.”
석주는 본인이 그렇게 말해 놓고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진짜 꼴값하네.” 하고 읊조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진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진이 이사한 이래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길이 익숙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으로 그린 길이라 그랬다.
“형님. 걸어가시면 아침은 돼야 도착합니다.”
명진이 석주를 잡아 차로 이끌었다. “아, 그래, 그렇지…….”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쓰러지듯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석주는 아진의 집 앞에 멈춰 선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자는 잠이었다.
* * *
아진은 순철을 아예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어차피 서로의 사정을 빤히 다 아는데. 굳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흘끔거릴 필요가 없었다. 순철이 종일 바깥에 서 있는 게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순철은 처음엔 영 께름칙해했다.
“이라면 안 되는데…….”
“원래 감시라는 게 이런 게 아니거덩?”
“아, 우짜다 들켜 가지고……. 석주 형님도 별말 안 하긴 하시던데…… 이게 이래도 되나 싶네…….”
아진은 침통해하는 순철을 마당 단상에 앉혀 두고 때마다 미숫가루도 타 주고, 과일도 깎아 주고, 간식을 사 와 나눠 먹고 그랬다. 그러면서 자연히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때부터 아진은 순철이 묻지도 않은 것을 종알종알 말하기 시작했다.
“저 이제 텃밭에 씨앗 심을 거예요.”
“오늘은 물 줄 거예요. 봄이라서 새싹도 빨리 나온대요. 책에서 봤어요.”
“빨랫줄이 느슨해져서 빨래가 자꾸 한쪽으로 몰려요. 이거 묶는 것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제가 다리가 이래서…….”
“점심 드실래요? 밥만 한 공기 더 푸면 되는데.”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땐, 아진은 순철의 가족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어머니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시는지,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사는지, 하나 있는 여동생이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 따위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친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는 사이 명진도 한 번 집에 들렀다 갔다. 덕재도 함께 왔었다. 이사 축하한다며 떡을 잔뜩 사 와서는 동네를 다 돌아다니며 나눠 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한잔하고는 떠났다.
그런 이들 덕분에 아진은 외롭지 않았다. 이제 이웃들과 인사도 하고 지낸다. 어제는 옆집에서 파전을 나누어 줘서 순철과 함께 먹었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인데, 묘하게 가슴이 허전했다.
잠들기 전 양치질을 하던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안 오는 건가, 아니면 못 오는 건가…….”
무심코 그 말을 읊조리다 되려 본인이 놀랐다. 칫솔을 꽉 깨물고는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설마 석주인가. 제가 저도 모르게 석주를 생각하고 있었나.
“미쳤지, 미쳤어…….”
그를 만나지 않기 위해 그의 집에서 나온 것인데.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니.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를 잊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와 관련한 과거도 옅어질 텐데.
석주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따지고 보면 순철도, 명진도, 덕재도 그의 흔적이지 않나.
하지만…… 그들과 멀어지고 싶진 않은데……. 그럼 너무…… 적막하고 외로울 것 같은데…….
아진이 입에서 칫솔을 빼내고, 퉤- 거품을 뱉었다. 그 후 반쯤 넋을 놓은 채 양치질을 마무리하고 세수를 했다. 그런데 물에 젖은 머리칼이 앞으로 축 늘어졌다. 물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칼에 짜증이 났다.
아진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대충 걷으며 거울을 쳐다봤다.
“많이 길었네…….”
석주의 집에 있을 땐 도통 앞머리가 길지 않아서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잔뜩 길어서 시야를 반쯤 가린다. 이게 원래 제 머리 모양이긴 하나 없다가 생겨서 그런가. 불편하고 거슬리고 그랬다.
“……자를까.”
이제 머리가 짧다고 뭐라고 하는 꽃님도 없고. 저를 위험하게 할 진걸도 죽었고. 새로운 마음으로 머리나 한번 잘라 볼까. 우중충하게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것도 남이 보기엔 영 별로일 것 같은데. 음침한 사내새끼 같겠지.
아진이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자신의 머리칼을 보려 애를 썼다.
다음 날 오후.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던 아진이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돈을 조금 챙겨 현관을 나왔다. 순철은 단상 위에서 중절모로 눈을 가리고 드르렁, 드르렁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 덕재의 생일로 다 같이 잔치를 했다더니.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절뚝절뚝 걸어간 아진이 단상에 앉았다. 그리고 순철을 조심히 흔들어 깨웠다.
“순철이 형님. 순철이 형님.”
“…….”
“순철이- 형님-.”
연신 불러 대는 이름에 순철이 컥컥하고 숨을 거꾸로 먹더니 눈을 떴다. 중절모가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쨍한 햇볕에 공격당한 순철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진이 떨어진 중절모를 주워 그에게 건넸다.
“저 머리 자르러 이발소 갈 거예요.”
“어, 어어…….”
“저 혼자 다녀올까요?”
“아니, 아니. 같이 가야지. 가자.”
순철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으어어,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진이 먼저 대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순철은 두 다리가 멀쩡하고 보폭도 빨라서 금세 따라잡을 터였다.
찌뿌듯한 몸을 뒤틀던 순철이 주머니를 더듬어 권총을 꺼냈다. 그 후 탄창을 열어 총알도 확인하고는 성큼성큼 아진의 뒤로 따라붙었다.
* * *
월요일의 이른 아침, 초인종이 울렸다. 늘 비슷한 시간에 올리는 초인종이었다. 주인공은 늘 그렇듯 순철일 것이고. 아진은 바쁜 걸음으로 대문까지 나갔다. 문을 열어 주기 위해서였다.
매번 이러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대문 열쇠를 하나 복사해다가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는 꾸벅 묵례했다.
“순철이 형님, 오셨어……요…….”
고개를 든 아진이 벙긋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진이, 안녕.”
인사를 전해 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순철은 걸걸한 음성인데, 제 이름을 부르는 음성은 낮으면서도 감미로웠다.
아진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놀란 속눈썹이 팔랑팔랑 크게 움직였다.
“……사장님?”
초인종을 누른 이는 다름 아닌 석주였다. 여전히 멋진 얼굴을 하고,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석주. 커다란 덩치가 햇빛을 온통 가려서 그의 그림자 안에 잡아먹힌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석주. 오랜만에 보는 석주.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아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석주가 빙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머리, 잘랐다고 그래서.”
“……네? 아, 네. 어제…… 잘랐어요.”
아진이 정수리부터 앞머리까지 손바닥으로 꾹 눌러 내렸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쭈뼛쭈뼛 섰을 텐데. 민망했다. 눈앞에 있는 석주는 참 단정하고 반짝였으니까. 낡은 옷을 잠옷으로 입고 있는 제가 몹시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진이 당황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쓸어 넘겼다. 가뜩이나 헝클어져 있던 머리가 산발이 됐다. 그에 석주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진은 흠칫 놀랐으나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이내 그의 손이 머리칼에 닿았다.
석주는 보드라운 손짓으로 아진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머리칼 사이사이를 넘나드는 손가락이 기묘할 정도로 선연히 느껴졌다.
“머리 자른 게 보고 싶어서 왔어.”
“아…….”
“너무 궁금해서. 그건 말로 들어도 상상이 안 되더라고.”
손을 거둔 석주가 아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머리가 많이 짧아졌다. 속눈썹 근처에서 찰랑거리던 앞머리는 눈썹 위까지 올라갔고, 목덜미를 덥수룩하게 덮고 있던 뒷머리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귀도, 얼굴도 훤히 드러난 게 참…… 잘생겼다.
순철이 ‘이렇게 이렇게 가지런-하게 잘랐습니다. 여도 짧아지고, 여도 짧아지고, 귀도 잘 보입니다.’라고 표현한 걸 바탕으로 상상하는 게 힘들어서 온 것인데. 역시 오길 잘했다.
아진은 제가 상상했던 모습보다 곱절에 곱절은 더 아름다웠다.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소년 같았다. 청량하고, 순진하고 해맑은 소년.
“조금 자른 건데……. 이발소에서 자른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해요…….”
아진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석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잘 어울려. 멋있어.”
“……감사합니다.”
아진이 멋쩍게 웃으며 묵례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이른 아침의 참새 소리와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대문 앞에 주차된 석주의 차에서 뿜어지는 엔진 소리가 평화롭게 그 정적 위를 부유했다.
먼저 입을 뗀 건 석주였다.
“전화…… 하고 올 걸 그랬나.”
사실 잠깐 고민하긴 했는데, 아진이 오지 말라고 할까 봐 전화할 수가 없었다. 그가 뭐 하러 오시는데요, 라고 물었을 때. 머리 자른 게 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여태까지 그를 참고 참다가, 고작 머리 잘랐다는 소식에 참지 못하고 달려온 제 꼴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