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51화 (151/261)
  • 151화

    큰길을 나와 걷는 세상은 새롭다 못해 신기했다. 아진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뀐 세상을 공부했다. 간판들도 하나하나 읽었다. 석주에게 글을 배우기 잘했지. 아니면 무엇을 하는 가게인지 하나도 몰랐을 것이다.

    [김형준 의원 내과]

    [기원 바둑]

    [에덴 양장-양복⋅와이샤쓰 일체]

    [함석 상사]

    [玄星일보]

    [연마 사진관]

    [현성 극장]

    [대중식당]

    [미장원]

    끝없이 펼쳐진 가게들을 쳐다보던 아진의 걸음이 여러 곳에서 멈춰 섰다. [선우 달걀], [신선 채소], [광일 정육점], [서울 문고] 이렇게 네 곳 앞이었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원하는 가게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향하는 가게이니만큼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아진은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사고 값을 치렀다. 제가 필요한 것을 제가 직접 고르고, 돈을 주는 기분이 묘했다. 좋은 쪽으로 묘했다.

    가방을 무겁게 채운 아진이 히죽히죽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도넛츠 가게를 발견했다. 꽈배기, 팥도넛츠 같은 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진이 무언가에 홀린 듯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온 이후로 달짝지근한 간식거리를 먹지 못했다. 그전엔 항상 석주가 사다 줬으니까.

    아진은 고민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꽈배기를 한 봉지 잔뜩 사서 나왔다. 저도 먹고 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싶어서.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꽈배기를 입에 문 아진이 절뚝절뚝 집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길에서 좁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별안간 휙 뒤를 돌았다.

    몰래 아진을 뒤따라오던 조직원이 억- 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는 운동 신경이 좋은지 거칠게 휘청거리다 금세 중심을 잡고 섰다. 숨는 재능은 영 없더니 깡패 아니랄까 봐 몸 쓰는 건 잘하는 모양이었다.

    작게 웃은 아진이 그에게 꽈배기 하나를 내밀었다.

    “드실래요?”

    “어…….”

    “드세요. 많이 샀어요.”

    “…….”

    조직원이 설탕이 잔뜩 묻은 꽈배기와 아진을 번갈아 봤다. 아진이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손을 흔들었다. 조직원이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진이 꾸벅 묵례하고는 가던 길을 이어 갔다.

    바보 같은 얼굴로 서 있던 조직원이 헐레벌떡 아진의 곁에 붙어섰다.

    “니, 내 있는 거 알고 있었나?”

    “어떻게 몰라요. 두루마기가 그렇게 크게 흔들리는데.”

    “언제부터?”

    “음……. 이사 오고 이틀 지나선가?”

    “……아씨. 클났네.”

    조직원이 벅벅 머리를 긁었다. 그러면서도 꽈배기를 콱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아진이 그를 보며 나직이 웃었다.

    “형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얼굴은 낯이 익는데. 이름은 모르네요.”

    “……순철이. 이순철.”

    “아, 순철이 형님이시구나.”

    아진이 순철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다 별안간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아진이에요. 성은 없어요.”

    “안다, 니 이름. 아지이.”

    사투리가 한껏 섞인 이름에 아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명진도 ‘명지이’라고 부르더니. 제 이름은 ‘아지이’가 됐다.

    순철이 웃는 아진을 불안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잠복이 들킨 게 못내 신경 쓰이는 듯했다.

    “오지 말라는 말 안 해요. 사장님한테 전화하지도 않을 거고요. 근데 앞으로는 오시면 바깥에 서 계시지 말고 초인종 누르세요. 바깥에 서 있는 거 힘들잖아요. 곧 여름이라 날도 더운데.”

    아진은 석주가 사랑하는 방법을 막을 생각도, 비난할 생각도 없었다. 방관.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는지라.

    덕분에 혼자 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는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덜 외롭기도 하고. 나쁘지 않았다.

    아진이 순철을 따라 크게 꽈배기를 물었다. 입가에 설탕이 까끌까끌하게 묻어나는 게 참 즐거웠다.

    * * *

    석주가 막걸리 잔을 탁 세게 내려놓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고, 술에 취한 몸이 힘 조절을 잘 못 했기 때문이었다. 석주가 푸, 하고 술 냄새가 자욱한 한숨을 내쉬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명진이 그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더 드십쇼, 더. 그래야 좀 자지.”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그가 채워 준 술을 다시 들이켰다. 그리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긴 다리가 식탁을 걷어찼다. 식탁 위에 있던 식기들이 파르르 경련했다.

    “어이구.”

    명진이 쏟길 뻔한 국밥을 얼른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다 뚝배기가 뜨거워 “앗뜨뜨-”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진이 집을 떠난 지 일주일. 석주는 매일같이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퇴근했다. 아진이 그의 방에서 묵을 땐 점심이 지나자마자 집에 가겠다며 일어나더니. 요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발악을 했다.

    오늘은 퇴근하다 말고 간만에 식구들끼리 회식이나 하자고 해서 다 같이 돼지국밥집에 들어앉은 참이었다.

    석주는 기껏 국밥을 시켜 놓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직 소주만 줄줄이 비워 냈다. 그것도 소주잔이 작다며 병나발을 불기에, 명진이 채신머리 좀 챙기라며 막걸리 사발을 갖다 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석주와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명진과 덕재는 이렇다 할 말 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고, 그가 담배를 물면 불을 붙여 주었다.

    일주일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한 석주가 오늘은 술에 얼큰히 취해서라도 자길 바라면서.

    축 늘어진 석주가 담배를 물었다. 덕재가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려 하는데, 석주가 손을 대충 흔들어 거절했다. 그리고 담배를 문 채 중얼거렸다.

    “아진이가 보고 싶다.”

    “그럼 보러 가시죠. 와도 된다 캤다면서요.”

    명진이 새로이 소주를 따며 대꾸했다. 그 목소리에 귀찮음이 묻어 있었다. 저 소리를 근 며칠 내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고 있어서 그랬다.

    석주가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폈다.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잖냐. 벌써 가믄 아진이가 졸라 싫어할걸. 징그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사투리가 묻어났다. 술에 취했다는 뜻이었다. 명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휴……. 아진이가 그런 생각 할 정도로 무정한 놈은 아이지 않습니까?”

    “그이까. 무른 애라서 싫어도 내색 못 할까 봐, 그럼 내가 그걸 빌미로 자꾸 아진이한테 치댈까 봐 무섭다이까…….”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덥다는 듯 넥타이를 힘으로 당겨 풀었다. “더워 뒤지겠네, 씨팔…….” 하고 욕설도 읊조렸다. 명진이 쯧쯧 혀를 차며 덕재와 잔을 부딪쳤다.

    “그럼 첨부터 가지 말라고 붙잡으시지. 만다꼬 보내 줍니까, 보내 주기를.”

    “잡아? 내가? 아진이를?”

    석주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아이를 잡아. 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 낯을 본 명진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석주는 기다란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여기저기 시선을 낭비했다. 별것 없는 국밥집의 차림표를 읽고 또 읽던 그가 별안간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푸, 하며 담배를 뱉어 내곤, 멀찌감치 앉아 있던 누군가를 불렀다.

    “순철아.”

    “예, 형님!”

    “여 와 봐라.”

    그의 부름에 자신의 술잔을 든 순철이 후다닥 뛰어왔다. 덕재가 빈 의자를 하나 끌어와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순철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석주가 흔들리는 손으로 순철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아진이 오늘은 뭐 하드노?”

    순철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술을 꿀떡 삼켰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줄줄이 나열했다.

    “아진이 오늘 시장에 장 보러 갔습니다. 책방 들러가 텃밭 키우는 책 샀고요, 양파랑 겨란도 샀고요, 정육점에서 고기도 조금 샀습니다. 다니는 내내 이상한 놈은 못 봤고요, 아진이도 딱 장만 보고 곧장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예. 아, 그리고 아진이가 저한테 꽈배기 사 줬습니다, 형님. 제가 있는 걸 진즉부터 알았다 카더라고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오지 말라는 말은 안 하던데. 내일 다시 가 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순철이 앉은 채로 꾸벅 묵례했다. 석주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순철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몇 박자 늦게 반응했다.

    “와……. 진짜? 부럽다.”

    “……예?”

    “부러워…….”

    “…….”

    “넌 아진이도 보고, 아진이랑 꽈배기도 먹고……. 씨팔 존나게 부럽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붕 뜬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석주에 순철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형님도 참 꼴값하시네예.”

    그 말에 식탁 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명진이 파안대소했다. 그가 식탁을 탕탕 두드리며 크하하, 웃었다. 덕재도 푸흡, 하고 웃음을 흘렸다가 얼른 입술을 겹쳐 물었다.

    한참 웃던 명진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야, 꼴값이 딱이다, 딱. 형님 진짜 꼴값하십니다.”

    “…….”

    “형님 얼굴에 훗날 사랑 같은 걸 하시면 억수로 대단하게 하시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그게 막 멋지고 반짝반짝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궁상맞을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명진이 석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꼴사납게 술에 취해 놓고 잘생긴 얼굴은 여전하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생기는 얼굴이었다. 워낙 대단한 낯짝이어서. 근데 저 얼굴로 저렇게 유난스러운 사랑을 하다니.

    명진이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석주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을 냈다.

    “그래, 씨발, 웃어라, 웃어…….”

    그가 막걸리 사발에 술을 콸콸 따라 마셨다. 명진이 안주도 좀 먹으라며 뚝배기를 그의 앞으로 들이미는데. 별안간 석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 빼러 가시게요?”

    그럼 저도 같이- 명진이 의자를 뒤로 미는데. 석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꼴값하러 간다.”

    괴상한 말에 명진은 물론, 같이 앉아 있던 덕재와 순철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꼴값하러 간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서 그랬다.

    “아니, 꼴값을 어디서 하실라고요?”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명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주가 풀어 헤쳤던 넥타이를 반듯하게 조이며 대답했다.

    “아진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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