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50화 (150/261)

150화

그러다 별안간 아진을 돌아봤다. 그의 낯에 아쉬움과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가 손을 길게 뻗어 아진의 소매를 쥐었다. 강하게는 말고, 아주 살짝. 아진이 가볍게 손목만 털어도 떨어질 정도로 약하게.

“아진아. 혹시…….”

“네.”

“혹시 내가 가끔…… 아주 가끔, 와도 괜찮을까.”

그 말에 아진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썩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심장이 철렁한 석주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오래 안 있을게.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

이것만은 거절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놓고 싶었다. 아진이 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길 바랐다.

석주는 살고 싶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아진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진을 봐야 했다. 누군 보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던데. 석주는 아니었다. 아진을 봐야 사랑할 수 있었고, 그를 보지 못할 바엔 죽는 게 나았다. 아진과 관련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적당할 수가 없었다. 차고 넘쳐야 숨통이 트였다.

아진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아니, 사실 길지 않았다. 고작 해 봐야 5초 정도. 근데 석주는 그 5초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목젖을 송곳으로 들쑤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다 아진의 입이 슬쩍 떨어졌을 때는 온 세상의 공기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실 때…….”

“응.”

“약과 사 오세요.”

“…….”

그 말에 석주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진의 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다. 등신 같은 머리통이 빠르게 굴러가지 못하고 끼긱거리며 뒤틀렸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아진이 허락해 주었다는 걸.

“응. 그럴게.”

석주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만개했다.

석주와 조직원들이 떠나고, 아진은 비로소 집에 혼자 남았다. 집은 고요했다. 생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적막이었다. 아진이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이 적막은 내일도 모레도 깨지지 않을 터였다.

그건 아진이 내일도 모레도 혼자일 거라는 걸 뜻했다.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됐다. 묘한 설렘도 느꼈다.

아진은 재차 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걸레와 빗자루를 찾아냈다.

이미 석주가 사람을 시켜 깨끗이 청소해 둔 덕에 쓸고 닦고 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부지런히 헤집으며 자신의 손때를 묻혔다.

집과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잘 부탁한다고.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짐을 풀었다. 석주의 집에서 쓰던 공책도 책장에 꽂아 두고, 연필도 새로이 깎았다. 그리고 침실 농에 몇 안 되는 옷가지들도 채워 놓고, 잘 싸매 온 꽃님의 영정 사진도 협탁에 올려 두었다. 석주의 집에서 찍었던 단체 사진도 옆에 두었다. 꽃님과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 그것뿐이라서 챙겨 온 거였다.

그 후 잘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석주가 사다 준 수많은 물건 중 하나인 로숀도 찹찹 챙겨 발랐다. 그리고 두툼한 양말을 꺼내 신었다.

이제 석주 없이 자야 하니까. 혼자 보내는 밤이 추울 테니까. 단단히 대비해야 했다.

“하아…….”

아진이 낯선 침대에 몸을 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딱히 제가 한 일이 없는 이사인데도 정신이 없었다.

아진이 몸을 옆으로 돌려 꽃님의 사진과 시선을 맞췄다. 은은히 켜 둔 전등에 꽃님의 얼굴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아줌마.”

아진이 적막을 헤치며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대답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나 집에서 나왔다. 잘했지? 아줌마 없이, 사장님 없이 혼자 사는 거, 절대 못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나오니까 왠지 모르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진이 샐쭉 웃었다.

“나 진짜 어른이 되긴 했나 봐.”

어른. 혼자 사는 어른. 뿌듯했다. 꽃님이 지금 제 모습을 봐야 했는데. 아니,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여전히 철부지겠구나. 춥다며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다가 발에 차였겠지. 입술을 삐죽 뒤틀었다가 푼 아진이 이불을 목까지 당겼다.

“그래도…… 너무 조용한 게 어색하긴 하네.”

이 집은 다 좋은데, 고요가 불편했다. 예전에 있던 도박장도, 석주의 집도 항상 사람이 넘쳤으니까. 혼자여도 외로울 틈이 없었다. 적막할 새도 없었고.

근데 이곳은 너무 조용하다. 제가 입을 떼지 않으면 인기척을 내는 이가 하나도 없다. 혼자 사니 당연한 일인데, 먹고살 걱정만 했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자야겠다. 아줌마도 잘 자.”

마지막 인사를 건넨 아진이 몸을 바로 뉘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허나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낯선 잠자리라 그런가. 아니면 속이 시끄러워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석주 때문인가.

뒤척거리던 아진이 꽃님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 후 어스름히 달빛이 스미는 벽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당신은 자고 있을까. 나 없이도 잘 자려나. 아마 못 자겠지. 같은 집에 있을 때도 한숨도 못 잤던 당신인데 지금은 오죽할까.

잘 자야 할 텐데, 하고 안위를 빌어 주는 척이라도 하고 싶지만, 좀생이 같은 마음은 당신이 잘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오래는 말고. 몇 주만, 아니, 몇 달만 내가 없어서 허전하고 불편했으면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조금씩 조금씩 내 부재에 적응했으면 한다.

그쯤이면 나도 당신 없는 삶에 적응할 테니까. 우리가 함께했던 그 기쁜 시간을, 그 아픈 시간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면 언젠가 가슴에 박힌 가시도 문드러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한다.

아진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석주 없이 잠드는 것.

가시를 빼내는 첫걸음이었다.

* * *

아진의 집 마당은 높다란 벽돌 담장이 두르고 있었다. 높다랗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높은 건 아니었다. 아진이 까치발을 들면 바깥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그 정도 높이를 담이라고 지어 놨냐, 비판할 수도 있지만 다 그런 시절이었다. 담벼락을 지어도 실제로 도둑을 막겠다거나, 훔쳐보지 못하게 하겠다거나, 하는 의도로 짓진 않았다. 그냥 집과 거리를 나누는 경계선 정도였지.

아무튼, 그래서 아진은 종종 의도치 않게 거리를 지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소리도 들렸다.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땅따먹기를 하며 노는 소리, 또는 바깥 단상에 나와 과일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목소리 그런 거.

가끔 마당을 쓸다 담장 너머로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럼 그쪽에서 먼저 “이사 오셨나 봐요? 나는 저기 뒤에 파란 지붕 집에 살아요.”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진은 마당에 있는 게 좋았다. 집 안은 적막한데, 마당은 아니라서.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떠한 존재를 알아차리게 됐다. 담장 위로 머리가 한참 솟아 있을 만큼 커다란 키. 몸 쓰는 일을 하겠구나, 싶어지는 덩치. 검은 정장에 커튼처럼 축 내려온 두루마기.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나이대.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집 안을 살피는 눈길.

태회파의 조직원이었다.

본인 딴에는 담장과 나무 사이에 숨어 훔쳐본다고 하는 것 같지만, 그게 그런다고 숨겨지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아진은 마당을 쓸거나, 빨래를 널거나, 텃밭을 살피면서도 그의 존재감을 뚜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석주가 보낸 이겠지.

딱히 화를 내거나, 그를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예상했던 바이기도 하고.

석주가 저를 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둘 리가 없지 않나. 그는 깡패니까. 적이 많으니까. 항시 그를 노리는 칼들 사이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조심과 경계는 그에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사내의 존재감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석주가 아직도 저를 생각하는구나, 저에게 관심을 갖고 있구나, 저를 잊지 않았구나 싶어서 오히려 안도가 됐다.

그래서 아진은 그 조직원의 존재를 모르는 체해 주었다. 그리고 더 열심히, 활기차게 살았다. 조직원이 석주에게 제가 잘 산다고, 잘 지낸다고 전해 주길 바라면서.

이른 오후. 젓갈과 김, 달걀부침을 반찬으로 점심을 먹은 아진은 집을 나섰다.

이사 온 지 일주일. 아진이 집을 나오는 건 네 번째였다.

저도 이제 어른인데, 차가 무섭다고, 사람이 무섭다고 집 안에서만 살 수 없진 않나.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가시를 빼내는 두 번째 걸음이기도 했다.

아진은 자신을 잘 알았다. 겁이 많고, 나약하고, 사람들의 못된 시선을 받기 딱 좋은 다리까지 갖고 있다는 걸.

그래서 처음부터 목표를 높게 잡지 않았다. 나흘 전에는 담장 근처만 산책했고, 엊그제는 집 근처 골목길을 둘러보았으며, 어제는 큰길까지도 나가 봤다.

세상은 아진이 열 살, 차에 치여 다리를 다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당연했다. 온통 흙길이던 바닥에 시멘트가 깔리고, 도로가 생기고, 인도라고 차를 피해 사람들만 다닐 수 있는 길도 생겼다.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멋졌다. 양복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이 신기했다.

그렇게 바뀐 세상을 보고 나니 이제 바깥에 나가는 게 자못 기대가 됐다. 아진은 그렇게 더디지만 꾸준히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무려 장을 보는 날이었다.

하얀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학생들이 메는 책가방을 메고, 돈을 조금 챙긴 아진은 석주가 사 준 새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집 근처를 배회하던 조직원이 얼른 골목길로 숨어드는 게 보였다.

아진은 그를 모른 체하며 절뚝절뚝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길로 향하는 발걸음이 제법 활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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