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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49화 (149/261)
  • 149화

    아진이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가 폈다. 고작 단어 하나에 구질구질해지는 석주가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제가 그를 동정할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는데. 더 가멸차게 대해도 되는데. 못된 말만 뒤집어씌워도 되는데.

    아진이 며칠 새 덥수룩해진 앞머리를 훌떡 쓸어 넘겼다. 그리고 한숨처럼 말했다.

    “오늘 발바닥에 가시가 박혔는데요.”

    그 말에 석주가 대번에 요란을 떨었다.

    “뭐? 발에? 얼마나 깊게? 뺐어? 약은? 발랐어? 내가 좀 볼까?”

    그가 아진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 슬픔 가득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낯빛을 바꾸었다. 아진이 옅게 웃으며 그의 손을 밀어 냈다.

    “푸흐……. 괜찮아요. 잘 빼냈어요.”

    “그래도-”

    “근데, 분명 빼냈는데. 빼낸 가시를 쓰레기통에다 버리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발바닥이 따끔따끔하더라고요. 가시가 계속 박혀 있는 기분이었어요.”

    “…….”

    “왜 그럴까, 고민하면서 무심코 이 방을 둘러보는데. 그러다 깨달았어요.”

    아진이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댔다.

    “여기에도 가시가 박혀 있어서 아픈 거구나.”

    “……아진아.”

    “그걸 깨달으니까 여기 박힌 가시도 너무 빼고 싶더라고요. 근데 제가 이곳에 있는 한은, 이 가시를 절대로 빼낼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아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잔잔한 밤하늘 같은 눈동자로 석주를 응시했다.

    “저는 여전히 사장님이 아파요.”

    “…….”

    “슬프고, 밉고, 가끔은 무섭고, 불편해요.”

    “…….”

    “근데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요.”

    “…….”

    “그 많은 감정 중에 좋은 건 하나도 없어요.”

    석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고 있었는지, 아랫입술에 잇자국이 박혔다.

    “아진아 나는……. 나는……. 내가 미안해.”

    무어라 말을 하려던 석주의 문장은 또 사과로 끝났다. 억척스레 말린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진이 그런 석주의 손등을 가볍게 짚었다. 그리고 조곤조곤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전에는 사장님이 마냥 좋았는데. 사장님이랑 같이 있는 것도 좋았는데. 사장님이랑 함께하는 밤을 기다렸는데. 계속 함께하자는 사장님의 말이 설레고 기뻤는데.”

    “…….”

    “이제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사장님이 무슨 짓을 해도 그때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여기 가시가 박혀 있어서.”

    아진이 석주의 손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재차 두드렸다.

    거센 파도에 휩쓸린 우리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흘러왔다. 과거의 그 행복했던 순간이 까마득하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야 하는 저는 깨졌고, 그 행복했던 순간은 태풍에 침몰하고 없다. 그러니 어떤 배를 타든, 어떤 파도와 해풍을 만나든,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새로운 순간을 찾는 거였다.

    “제가 그 가시를 빼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진이 부탁했다.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파도의 끝자락처럼 매가리 없이 넘실거리던 그것은 곧 바깥으로 툭 떨어져 나왔다.

    “울지 마세요.”

    아진은 너그럽게도, 손수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단정한 손길에 석주는 깨달았다.

    아진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 *

    이틀 후, 아진은 집에서 나왔다.

    아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때였다. 석주가 보내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저를 잡아 둘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 열심히, 성의껏 아진의 독립을 도와주었다.

    바쁘게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두툼한 보따리를 든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창밖에 펼쳐진 낯선 거리를 쳐다보는데. 옆좌석에 앉아 있던 석주가 내렸다. 그리고 차를 빙 둘러 아진 쪽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진이 엉거주춤하게 내렸다. 차는 아직도 적응을 못 했다.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들었다. 그래도 전처럼 깜빡이는 헤드라이트만 보고 까무러칠 만큼 두렵진 않았다.

    석주가 아진이 들고 있는 보따리를 대신 들어 주었다. 그러자 주위를 맴돌던 명진이 그것을 채 가 다른 조직원에게 넘겼다. 또 다른 조직원들은 차에서 짐가방을 내렸다. 모두 아진의 짐이었다. 정확히는 석주가 산 아진의 짐.

    실제로 아진이 직접 챙긴 물건은 보따리 하나가 다였다.

    아진이 정면에 있는 대문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반질반질한 대문이 영 낯설었다.

    “여기…… 예요?”

    “응.”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에게 무언갈 건넸다. 열쇠 꾸러미였다.

    “제일 큰 게 대문 열쇠야. 직접 열어 봐.”

    “아…….”

    아진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동색의 묵직한 열쇠를 골라냈다. 그것을 대문 열쇠 구멍에 넣자 부드럽게 스르륵 들어갔다. 옆으로 돌리는 것도 쉬웠다. 철커덕, 하고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이 손바닥으로 대문을 밀었다. 대문은 크고 무거워 보이던 것과 달리 부드럽게 밀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적당한 크기의 마당이었다. 집 현관까지 좁은 길이 나 있었고, 바닥은 단단한 흙바닥이었으며, 서넛이 앉을 수 있는 단상도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텃밭도 있었다. 새집이라 흙만 깔려 있고 식물이 자라 있진 않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예쁘장한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진이 넋 놓고 집을 쳐다보는데.

    “들어가자.”

    석주가 아진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진이 쭈뼛쭈뼛 그를 뒤따랐다.

    집은 완전한 양옥이 아니었다. 기와지붕을 가지고 있는 게 오히려 한옥과 가까웠다. 집 내부만 서양식으로 새로이 꾸민 집이었다. 석주의 말로는 요즘 유행하는 형태의 집이란다.

    복도를 걸어가면 ‘거실’이라는 공간이 나왔고, 부엌과 다실이 합쳐진 ‘주방’이라는 공간이 거실 옆에 붙어 있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욕실이 나왔고, ‘침실’이라 불리는 안방이 있었다.

    아진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공간은 주방이었다. 도박장이고 석주의 집이고, 부엌을 오갈 때마다 턱이 높은 계단을 몇 개씩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는데. 완전히 한 공간에 있어 다리가 불편해도 쉽게 쓸 수 있을 듯했다.

    주방에는 식탁이 놓여 있었으며 의자가 두 개 있었다. 아궁이 대신 기름을 넣어 쓰는 화로가 있었고, 살강 대신 아진의 키에 맞춘 낮은 찬장에 그릇들이 곱게 수납되어 있었다.

    거실엔 소파, 책상, 책장, 그리고 전화기까지 있었다. 침실은 빛이 잘 들어오는 큰 창문이 있었고, 침대와 커다란 붙박이장도 있었다.

    아진은 입 안 가득 미소를 띤 채 집을 살펴보았다. 혼자 살기에 딱 알맞은 크기에, 부담스럽지 않게 들어간 가구, 남향이라 빛이 잘 드는 것까지 다 좋았다.

    무엇 하나 낯설지 않은 공간이 없었는데, 어쩐지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그런 아진의 뒤를 흐뭇한 얼굴로 따라다니던 석주가 물었다. 아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다행이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석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렇지도 않아.”

    “…….”

    “…….”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때를 알리는 정적이었다. 헤어질 때.

    석주가 느린 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 후 구두를 신고, 아진을 뒤돌아봤다.

    “쌀은 매달 초마다 쌀장수가 배달 올 거야. 값은 내가 치러 놨으니까 따로 주지 않아도 돼.”

    “네.”

    “채소나 반찬 같은 것도 때마다 배달이 된대. 그러니 번거롭게 바깥까지 나올 필요 없어.”

    “네.”

    “세탁도 직접 하지 말고. 맡겨. 요즘은 돈만 주면 다 해 줘.”

    “그런 것도 안 하면 뭐로 시간 보내고 살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래. 아, 그리고 여기가 부촌이라 차 있는 집이 많아. 시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길 다닐 때 조심하고.”

    “네.”

    “그리고 또…… 어…….”

    석주가 말을 질질 끌었다. 뭐라도 더 말하고 싶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등 뒤에 있는 문을 나서면 그대로 끝이라서. 아진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빌어 볼걸. 못된 수를 써서라도 잡아 둘걸. 서두르지 말걸. 이게 어렵다, 저게 안 된다, 하며 둘둘 돌아갈걸.

    후회해도 늦은 시점이었다. 이미 이별 준비를 마친 아진은 저와 달리 부드러운 표정으로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 단정하고 단단해서 석주는 파고들 틈을 찾지 못했다.

    석주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냈다.

    “이거는…… 꽃님이 아줌마가 처음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한테 부탁했던 거야.”

    “……아줌마가요?”

    “응. 호텔에서 일할 때부터 모아 둔 돈이래. 행여 자기한테 일이 생기면 너 주라고 그러더라. 거기에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더 보탰어.”

    “…….”

    아진이 석주가 내민 종이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허공을 두드렸다. 받아도 되나, 이제 혼자 살아야 하니 돈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두툼한 걸 보니 분명 큰돈인데. 이게 있으면 불편한 다리를 끌고 바깥을 돌며 일자리를 구걸하지 않아도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꽃님이 준 돈이라 하지 않나.

    아진이 공손히 봉투를 받아 쥐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고.”

    “부족하지 않아요.”

    봉투를 열어 보지 않아도 알았다. 봉투 속이 꽃님의 마음과 석주의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어쩌면 아진은 이 돈을 죽을 때까지 다 못 쓸지도 몰랐다.

    “그래, 그럼.”

    석주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아진을 보다, 뒤를 돌았다. 아진이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그를 뒤따랐다. 석주가 사 준 새 운동화는 당분간은 아껴 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까지 나왔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명진이 두 사람의 인기척에 조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차에 올라탔다. 곧 거친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석주가 대문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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