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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47화 (147/261)

147화

“오셨어요.”

아진이 앉은 채로 꾸벅 묵례했다. 아진과 같은 나무 의자를 끌어온 석주가 기다란 다리를 접어 앉았다. 흙바닥 위로 두루마기가 끌렸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질반질한 구두가 거품이 인 수돗가를 디뎠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아진이 걸레를 슬쩍 석주의 반대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혹 땟국물이 그의 값비싼 옷에 튀기라도 할까 봐 염려가 됐다. 배려라기보다는 당연한 거였다. 아진은 원래 종이었으니까.

“응, 오늘도.”

“…….”

“내일도 일찍 올 거야.”

석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을 이야기하면서 ‘아마’와 같은 가정은 없었다. 아진은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내릴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릎 위로 팔을 괸 석주가 흘깃 그의 눈치를 봤다.

“네가 싫다고…… 하면 늦게 퇴근할게.”

아진이 픽 실소했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싫다고 하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봄바람이 그 웃음을 따라왔다. 부드럽게 앞머리를 스치는 바람이 따사롭고 포근했다. 드문드문 정체 모를 꽃 냄새와 나무 냄새도 났다. 거기에 은근히 섞이는 빨랫비누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그 바람을 타고 온 연지색 꽃잎 하나가 아진의 손등에 붙었다. 아진이 팔을 휘저으며 그것을 털어 냈다. 허나 물기 때문인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석주가 대신 꽃잎을 떼 주었다. 떨어진 꽃잎이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아진의 눈동자가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졸졸 흘러가던 꽃잎이 수챗구멍으로 쑥 사라졌다.

“꽃님이 아줌마가요.”

아진이 혼잣말처럼 입을 뗐다.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석주가 상체를 슬쩍 아진 쪽으로 기울였다.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사랑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팔자라고 그랬거든요.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어야 하는 팔자라고. 되게 자주 그랬어요, 자주…….”

“…….”

“그게 엄청 기분이 좋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저는 아줌마한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더라고요.”

“…….”

“저는 팔자고 운명이고 그런 거 잘 모르는데. 그래도 꽃님이 아줌마가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어요.”

아진이 손을 뻗어 콸콸 쏟아지는 물을 잠갔다. 세상이 갑자기 적막해졌다. 그가 수돗가 근처에 핀 진달래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꽃님이잖아요. 꽃님.”

아진이 물에 젖어 무거워진 걸레를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손에 묻은 물을 털어 냈다.

“아줌마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아줌마를 꽃처럼 예쁘게 여겨서 꽃님이라고 지은 걸 거예요.”

“…….”

“아줌마도 그걸 알고 있을까. 모르면 내가 이야기해 줘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못 했어요.”

“…….”

“아줌마도 사랑받을 팔자라고, 그 이름을 지어 준 사람한테 분명 사랑받았을 거라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

“앞으로도 꽃을 볼 때마다 계속 아쉬울 것 같아요.”

아진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가 재차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걸레를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혹 때가 안 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아진을 지켜보던 석주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짜 어른 다 됐네.”

“그래요?”

“응. 어른 같아.”

“다행이네요. 꽃님이 아줌마가 남자가 나이 들어서도 철없으면 그렇게 꼴불견일 수가 없다고 그랬거든요.”

아진이 건조하게 웃었다. 아진은 여타 아이들과 달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크게 없었다. 아무래도 도박장을 드나드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못됐고, 심술 맞았고, 찌들어 있었으며 욕심이 많았으니까.

근데 언제부터더라. 그래, 석주를 본 이후로. 그의 집에 들어와 그를 훔쳐보면서 저런 어른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내답고, 힘 좋고, 돈도 많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를 동경했었지.

그런 석주가 저를 어른으로 인정해 주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다. 전에도 말했듯, 제가 어른이 된 근저는 슬픔과 눈물이어서.

마지막으로 걸레를 헹군 아진이 그것을 비틀어 짰다. 크게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손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었던 손목은 다 나았다. 붕대도 푼 지 꽤 됐다. 연고도 바를 필요가 없는데, 석주가 매일 밤 손수 발라 주긴 한다.

그런데도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힘을 주면 뭐가 자꾸 툭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가만히 있다가 손가락이 움츠러들기도 하고, 이따금 손목이 지나치게 차갑기도 했다.

아진은 저릿한 손목을 무시하며 걸레를 더욱 세게 비틀어 짰다. 물이 촤르륵 쏟아졌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석주가 넌지시 물어 왔다.

“내가 해 줄까?”

“아니요. 제 일이에요.”

아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어코 혼자 걸레를 짠 그가 그것을 탈탈 털었다. 물기가 조금 남긴 했지만, 봄날 볕이 좋으니 금세 마를 것이다. 그럼 됐지, 뭐.

수돗가 옆의 간이 빨랫줄에 걸레를 넌 아진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빨랫비누로 손을 박박 씻었다. 그러다 찬물이 고통스러워 꾹꾹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아진에게 찬물은 사계절 내내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발갛게 언 손을 바지에 닦으려는데. 석주가 슥 손을 채 갔다. 서늘하게 식은 손에 자신의 온기를 묻히듯 매만지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에 아진의 손이 저릿저릿해졌다.

아진이 석주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떻게 사람의 체온이 이다지도 뜨거울 수 있는 건지. 매번 느끼면서도 신기했다.

그때. 석주가 아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후 고개를 숙이고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놀란 아진이 손을 빼내려 했다.

“걸레…… 빨던 손인데…….”

“비누로 씻었잖아.”

“그래도…….”

아진이 싫다는 듯 손목을 뒤틀었다. 허나 석주가 놓아주지 않았다. 고집스레 쥐고는 연신 입김을 불었다. 피부에 닿는 후끈한 온기에 아진의 어깨가 둥글게 말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자꾸 안으로 모였다.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손은 금세 따뜻해졌다. 얼어서 붉던 손이 다른 이유로 붉어졌다. 뜨겁게 두근거리는 손에 아진이 다시금 손을 빼내려 했다.

“인제 그만해도-”

아진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석주가 아진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기 때문이다. 석주는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아진을 올려다봤다. 그러면서 천천히, 조금씩 입술을 움직였다. 손끝에도 입술을 눌렀다가 떼고, 손을 뒤집어 손바닥에도 도장을 찍었다.

그럴 때마다 아진의 어깨가 흠칫흠칫 경련했다.

하지 마세요. 그만하세요. 그렇게 말하면 석주는 망설임 없이 물러날 것이다. 아쉬운 표정은 지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감히 아진에게 애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걸 아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쩌면 알아서 말이 안 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석주의 입술은 손바닥을 가로질러 보기 싫게 흉 진 손목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꼭 아진의 손목과 진득한 행위라도 하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가 시시각각 검어지고 짙어졌다. 세상도 고요해졌다. 바람 소리, 물소리, 사부작거리는 나뭇잎 소리 같은 게 아득히 멀어졌다. 아진은 석주의 눈동자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석주의 입술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부드럽고 말랑하기도 했다. 그가 코로 내쉬는 숨결이 피부를 할퀴는 것 같았다. 다른 곳보다 예민한 손은 그 감각들을 매우 선연히 느꼈다. 그러다 한순간, 사타구니가 저릿해졌다.

“그만…….”

참다못한 아진이 힘주어 손을 빼냈다. 석주는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아진이 얼른 팔을 모았다.

아진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창조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환각을, 쾌락을 석주에게서 배웠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닿아 있으면 저의 의사와 하등 상관없이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들어, 들어갈래요.”

볼이 발그레해진 아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 후 다급하게 뒤를 도는데. 석주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아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러나 석주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에 석주가 나직이 아진의 이름을 불렀다.

“아진아.”

“…….”

절절한 음성에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석주를 쳐다봤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그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팔자고 운명이고 그런 거 잘 모르는데. 아진이 네가 사랑받을 팔자라는 건 맞는 것 같아.”

“…….”

“너는 몹시…… 사랑스럽거든.”

석주의 미소가 깊어졌다. 아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것을 허락으로 해석한 석주가 작은 손을 조심히 매만졌다.

만지고 또 만져도 애가 타는 손이다. 말라서 단단한데, 피부는 보드랍고, 특유의 청량한 체취가 나는 손. 이 손에 질식해 죽는다면 황홀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떠한 죽음보다 감격스러운 죽음이 되리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래서 너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충만해. 행복하고, 기뻐.”

석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정말 충만해서 넘쳐흐르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그러다 돌연,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눈썹이 내려앉고, 위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거꾸로 뒤집혔다.

치미는 죄의 무게가 그를 짓이겼기 때문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차마 아진을 포기할 수 없는 저의 이기심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니…… 이렇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계속.”

“사장님…….”

“너만 사랑하면서 살게. 너만.”

“…….”

“네 팔자에 있는 사랑, 그거 다 내가 줄게.”

아진의 손등에 얼굴을 파묻은 석주가 애절하게 말했다. 그것은 고해였고, 속죄였고, 애원이었고, 부탁이었다.

“아진아, 보고 싶었어.”

“…….”

“그리고 보고 싶어…….”

계속 보고 싶어. 너를.

석주는 한참 동안 아진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래로 수그러진 뒤통수가 참 볼품없었다. 그답지 않았다. 근데 그답기도 했다. 이제 석주에게 스며 버린 아진이라서, 그러다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아진이라서, 그의 감정을 아진이 독점하고 있어서 이 모든 행동이 당연했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입에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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