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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46화 (146/261)

146화

그의 말에, 아진은 뒤늦게야 자신이 석주의 방에 있음을 깨달았다.

“…….”

광대에 열이 확 올라왔다. 그러게. 저는 왜 이 방에 있나. 석주와 같이 자러 온 거지, 그와 함께 살기 위해 온 게 아닌데. 석주가 출근하던 아침에 제 방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당연하게 석주의 방에 있었다. 마치 제 자리라는 것처럼.

미친 거지…….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러워서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진은 이만 돌아가겠다 말하려 했다. 근데 석주가 덥석 아진의 손을 쥐어 왔다. 그리고 따뜻한 손으로 조물조물 주무르며 샐쭉, 소년처럼 웃었다.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

아진이 들고 있던 연필을 떨어트렸다. 석주가 그것을 집어 책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텁 책을 덮었다. 슬쩍 노려보는 게, 꼭 책을 미워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다 다시 아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공부하고 있었어?”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석주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의 손을 매만졌다. 그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아진은 뭘 처웃냐며 비난할 수도, 손을 빼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석주에게 손이 주물러지고 있는데.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에 석주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아진이 손을 얼른 다리 사이에 집어넣었다. 석주의 체온이 묻은 손이 뜨거웠다. 붉어진 손바닥이 쿵쿵 뛰었다. 심장이 손바닥으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아진이 바지춤에 손바닥을 벅벅 문지르며 열기를 지워 내는데. 눈앞에 상 하나가 내려왔다. 밥상은 아니었고, 흔히 다과를 먹을 때 쓰는 작은 상이었다.

상 위에는 각양각색의 떡들이 가득했다. 색색의 송편, 깍두기처럼 잘린 인절미, 살짝 그을리게 구운 가래떡과 꿀, 팥이 들어간 절편 등 하나같이 윤이 자르르 흘렀다.

지금 먹어야 맛있는 것이다. 떡은 모름지기 말랑할 때 먹어야 했다.

아진이 홀린 듯 젓가락을 들며 물었다.

“사 오신 거예요?”

“응. 요즘 종로에 이 떡집이 유명하대.”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송편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건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한과 집도 그렇고…….”

“애들한테 물어보지. 걔들이 험상궂게 생겨서 그렇지 이런 거, 달고 작은 거 엄청 좋아해. 어디에 떡집이 생겼다, 빵집이 생겼다, 서양 과자점이 생겼다, 다 꿰고 있어.”

아진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송편을 입에 쏙 넣었다. 보들보들하고 말랑한 떡을 이로 꾹 씹자 달큼한 꿀이 툭 터져 나왔다. 맛이 좋았다. 유명해질 만했다.

아진은 함께 나온 수정과와 함께 떡을 열심히 먹었다. 쫀득쫀득하고 말랑말랑한 식감에 도무지 젓가락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떡이 들어갈 때마다 볼록 부푸는 볼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저는 떡이 아니라 저 볼을 좀 씹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아진이 알면 기함할 상상도 했다.

상 위에 수북이 쌓인 떡이 반쯤 줄었을 때였다. 아진의 젓가락질이 현저히 느려졌다.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싶어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젓가락 끝을 살짝 문 아진이 석주를 쳐다봤다. 석주가 눈을 맞추며 씩 웃어 왔다. 환하게 펴지는 미간과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가가 보기 좋았다.

석주는 좋아졌다. 몸도, 얼굴도, 낯빛도. 아픈 곳 하나 없이 건장한 남성으로 돌아왔다. 사흘 내리 잤다고 아주 번들번들 윤이 났다. 핼쑥한 얼굴로 코피를 흘리던 게 아득히 멀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코피 안 나요?”

“응?”

“코피요.”

“아……. 어, 안 나.”

석주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진의 앞에서 코피를 흘렸던 게 부끄러워서 그랬다. 좋은 모습만,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데. 하필 거기서 코피를 흘려서는……. 입천장이 떫었다.

“원래 코피가…… 자주 나고 그랬어요?”

아진이 다시 물었다. 석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한창 싸우고 다닐 때야 그랬지. 맞아서. 근데 안 맞고 코피를 흘린 건 처음이었어.”

석주가 뜨겁게 솟구치던 코피를 떠올리며 코끝을 슥 문댔다. 그에 아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도 제가 사장님 코피를 터트리긴 했네요. 때려서 터트리진 못했지만.”

때려라, 벌을 줘라, 총으로 쏴라, 석주가 별별 말을 하긴 했으나 그에게 제대로 복수한 적이 없었다. 근데 이런 방법으로 석주를 고생시키다니. 얼떨떨한데, 조금. 아주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단한 석주도 제가 없으면 하찮아지는구나, 싶어서.

근데 이상한 곳에 꽂힌 석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해 보고 싶어?”

“네?”

“때려서 터트려 보고 싶냐고.”

“뭘요?”

“내 코피.”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덩달아 바쁘게 팔랑거렸다. 석주가 그것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아진의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는 보고 봐도 또 보고 싶었다.

“……그럼 하게 해 주시려고요?”

아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응. 잘 때리면-”

석주가 주먹을 쥐며 때리는 흉내를 냈다. 아진이 그런 석주의 앞으로 자신의 손을 쭉 들이밀었다.

“이 손으로? 그게 될까요?”

하얀 손바닥이 천장을 보며 펴졌다. 석주의 손에 비해 한참 모자란 손이었다. 가늘고 마르고 유약한 게 꼭 덜 자란 모양새였다. 오죽하면 꽃님이 애 같은 손으로 걸레질을 하는 게 보기 영 껄끄럽다며 혀를 찼었다.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손으로 얻어맞으면 아프긴커녕 간지럽기나 할 터였다. 어쩌면 발기할지도 몰랐다. 역시, 각목이나 장도리 같은 걸 들려 줘야, 까지 생각하는데. 아진이 미지근해진 수정과를 홀짝였다.

“됐어요. 꽃님이 아줌마가 사람 피는 다 업보로 남는 거라 그랬어요. 나중에 벌 받는다고.”

“…….”

석주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석주는 늘 남의 피를 달고 사는 사람인데. 지금 아진이 한 말은 넌 나중에 뒤지면 지옥 갈 거야, 라고 한 것과 비슷했다.

아진이 미안한 마음에 괜히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석주가 빙긋 웃었다.

“괜찮아. 벌 받아도.”

“…….”

“나는 벌 받아도 되는 놈인걸.”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석주는 희한하게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죽하면 벌 받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

아진은 대답 없이 작은 송편을 입에 넣었다. 뭐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겉이 조금 단단해진 떡이 처음처럼 맛있지 않았다.

* * *

석주는 그날 이후에도 해가 훤히 떠 있을 때 집에 왔다. 이것저것 사 들고 오기도 하고, 빈손으로 와선 너무 보고 싶어서 시장 들를 겨를이 없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보며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신난 아이처럼 이것저것 하고 싶어 하면서도 제 눈치를 보는 그를 가만히 방관했다. 석주 역시 더 바라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아슬아슬한 관계가 이어졌다.

석주의 이른 퇴근이 나흘째 이어지던 날. 아진은 집안일을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찾아 했다. 빗자루가 어디 있고, 걸레가 어디 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지라, 그런 것에서는 은근히 전문가인지라 뚝딱뚝딱 알아서 할 수 있었다.

석주가 일찍 퇴근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전은 아진이 오롯이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멍하니 넋 놓고 있으면 자꾸 슬픔이 찾아온다. 꽃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제 처지에 대한 슬픔과, 석주로부터 말미암은 슬픔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손가락을 깨물고 눈 위로 바람을 불며 못살게 굴었다.

근데 몸을 움직이면 조금 나았다.

그래서 아진은 석주가 출근하면 마당을 쓸고, 그 후에는 마루에 걸레질을 했다. 석주의 방을 청소하기도 했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발악이었다.

석주는 그걸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뭘 하든 위험한 일이 아니고서야 내버려 두려는 것 같았다. 종들 역시 석주의 언질을 받은 건지 아진을 멀리서 흘끔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걸레로 마지막 마루까지 훔친 아진이 찌뿌듯한 허리를 쭉 당겨 폈다. 걸레를 힘주어 쥐고 있었더니 손가락도 지끈거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파란 봄 하늘을 잠깐 올려 보던 그가 수돗가로 향했다. 부엌을 넘어가면 금방인데, 일부러 집을 빙 둘렀다. 부엌 쪽으로는 부러 안 갔다. 꽃님이 생각나서.

아궁이 앞에 앉아 있던 꽃님, 국자나 뒤집개를 들고 있는 꽃님, 벽 아래 쪼그려 앉아 커피를 마시는 꽃님, 부엌 열기에 얼굴이 불그스름해져서 가쁜 숨을 내쉬는 꽃님, 이른 새벽부터 채소를 다듬는 꽃님. 무엇 하나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게 없었다.

“용궁에는 잘 갔나……. 갔으면 갔다고 연락을 해야지…….”

아진이 하릴없는 불평을 읊조리며 수돗가 앞에 앉았다. 쪼그려 앉아 보려다 등신 같은 무릎이 힘들어해서 다리가 짧은 나무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붙였다.

“꿈에도 한 번 안 나오고 말이야…….”

아진이 수도꼭지를 한껏 돌렸다.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그 아래로 걸레를 내려놓고 두 팔을 동동 걷었다. 빨랫비누를 물에 적셔 걸레에 문댔다. 그리고 빨래판에다 걸레를 벅벅 치댔다. 거품이 솟는다 싶더니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게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이런 거 좋아하지 말라고 꽃님이 아줌마가 그랬는데…….”

좋아하면 하게 된다고. 결국엔 또 하고 있네. 아진이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걸레를 빨았다.

회색빛 거품을 헹구고, 다시 빨랫비누를 문대는데.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아진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석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반듯한 정장은 주름 하나 없었고, 흑록색 두루마기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석주는 멀리서부터 아진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으면서, 코앞에 다다라서야 인사를 건네왔다.

“아진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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