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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45화 (145/261)
  • 145화

    아진은 느지막이 일어났다. 창호지 문으로 밀려오는 햇빛의 색이 노르스름한 것으로 말미암아, 정오가 지난 지 한참이나 된 것 같았다.

    제가 어제 석주의 방에 들어온 게 자정쯤이고, 많이 늦게 잤다 하더라도 한 시 전에는 잠들었는데. 대충 가늠해도 열두 시간을 훨씬 넘게 잔 듯했다.

    아진은 무심코 기지개를 켜려다, 허리에 감긴 팔을 알아채고는 몸을 움츠렸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석주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 숨결은 따뜻하고, 규칙적이고, 나른했다.

    아직 자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혹여 석주가 깰까 조심하면서. 그렇게 뒤를 돌자 자는 석주가 보였다. 가파르거나, 완만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항상 오르막을 그리고 있는 눈썹이 지금은 유순하게 펴져 있었다. 눈은 가지런히 감겨 있었고, 입술은 후- 하고 바람을 불면 뻐끔 벌어질 정도로 가볍게 닫힌 상태였다.

    “자네…….”

    그것도 잘. 아진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혹시나 제가 곁에 있어도 못 자면 어쩌나. 그럼 괜히 겸연쩍고 눈치도 보일 것 같은데, 하는 걱정을 잠시 했었다.

    근데 석주가 잔다. 열두 시간을 넘게 자 놓고 아직도 깊게 잠들어 있다. 제가 있어서, 있어야 잔다는 듯 허리를 고집스레 감싸 쥐고 참 열심히도 잔다.

    아진은 석주가 저로 인해서 잘 자는 게 꽤나…… 만족스러웠다. 으쓱거리는 마음도 있었다. 의사도, 약도 못 고친 석주를 제가 고친 것 같아서.

    “…….”

    아진은 숨을 고르게 내쉬며 석주의 자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오랜만이라 새삼 새로웠다. 그가 깊게 잠들어 있어 이 시간을 제가 독점한다는 묘한 우월감도 있었다.

    그 고요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진은 어깨가 조금 배겼다. 한 자세로 오래 있으려니 도 닦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아진이 몸을 바로 뉘었다. 석주 쪽으로 포개져 있는 다리도 바로 하는데, 묵직한 이불을 헤치다 석주의 정강이를 치고야 말았다.

    “…….”

    아진이 흡 숨을 멈추었다. 눈은 부릅뜨였다. 잠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가 데구루루 눈알만 굴려 석주를 쳐다봤다. 깨지 마라, 깨지 마라, 속으로 읊조리면서.

    허나 안타깝게도 석주의 눈가가 구겨졌다. 아진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자신의 존재감을 죽여 보았으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나고야 말았다.

    “…….”

    석주는 잠에 취해 탁한 눈동자로 아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왜 아진이 눈앞에 있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 혼란은 짧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우물쭈물하던 그가 현실 쪽으로 한 발 넘어왔다.

    “……일어났어?”

    석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진이 짧게 대답했다.

    “……일어나고 싶어?”

    석주가 다시 물었다. 영 이상한 질문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아진이 되물었다.

    “사장님은요?”

    “일어나기 싫어.”

    무지 싫어. 석주가 얼른 대답했다.

    “…….”

    “그래도 네가 일어나고 싶다면, 일어날게.”

    석주는 그리 말하면서도 아진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윽한 눈동자에는 일어나지 마. 더 자고 싶어. 곁에 있어 줘. 그런 갈망이 가득했다.

    밥 못 먹은 개 같은 얼굴에 아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더듬더듬 말끝을 흐렸다.

    “일어나고 싶은 건 아닌데……. 목이…… 말라서…….”

    그 말에 석주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 튕기듯이.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 그가 일어나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석주는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물이 든 크리스털 병과 물잔을 가져왔다. 아진이 그가 내미는 물잔을 받았다. 잔 위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석주는 물이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막 따랐다.

    아진은 석주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물을 마셨다. 미적지근한 물이 달게 느껴졌다.

    아진은 물을 반 정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석주가 남은 것을 채 가 꿀꺽꿀꺽 단번에 삼켰다. 그리고 잔과 물병을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배는 안 고파?”

    “어…… 방금 일어나서 괜찮아요.”

    “그래. 그럼 나 조금만 더 잘게. 조금만…….”

    석주가 어젯밤부터 입고 있던 와이셔츠 단추를 끌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두 개쯤 끌고는 윗도리를 벗듯 훌러덩 벗어 버렸다. 두툼한 상박이 드러났다. 완만하게 솟은 가슴과 얼굴만 한 팔뚝이 전과 다름이 없었다.

    코피까지 흘리고,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도 했던 사람이. 무슨 몸이 그리 대단한지. 자고로 장군감은 타고나는 거라더니. 석주가 딱 그 짝이었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데. 와이셔츠를 멀리 내던진 석주가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아진의 옆구리로 그 커다란 몸을 꿈지럭거리며 파고들었다. 놀란 아진이 그를 밀어 내려는데.

    “사장님-”

    “아진아.”

    이미 눈을 감은 석주가 단조로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고마워…….”

    “…….”

    아진의 입이 꾹 다물렸다. 허공을 지그시 쳐다보던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몸을 뉘었다. 그러자 석주가 기다렸다는 듯 아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왔다. 전에는 그가 아진을 안고 있었다면, 이번엔 그가 아진에게 안긴 듯한 자세였다.

    그 느낌이 묘했다.

    좋은 묘함이었다.

    쭈뼛거리던 아진이 팔을 석주의 등에 얹었다. 석주는 그새 잠든 건지, 색색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다만큼 드넓은 그의 등이 잔잔하게 들썩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석주와 아진은 사흘 내내 방에 붙어 있었다. 딱히 뭘 한 건 아니고. 잠만 잤다. 아진은 아니고, 석주만.

    석주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잠을 잤다. 잠을 안 자서 병원까지 갔던 사람인데. 이번엔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병원에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시답잖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쯤 되면 명진이나 조직원들이 석주를 찾을 만도 한데. 아무도 그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집도 조용했다. 다 같이 어디로 소풍이라도 갔나, 싶을 정도였다. 집 안의 모든 이가 그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석주의 방문이 열릴 땐 밥상이 들어올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종이 직접 들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석주가 들고 들어왔다. 아마 명진이 언질을 해 둔 게 아닌가 싶었다. 자는 중일 테니 깨우지 말라고. 때마다 문 앞에 밥상을 갖다 두기만 하라고.

    석주는 아진을 안고 내리 자다가 슬쩍 눈을 뜨면, 아진에게 배가 고프냐 물었다. 엎드려서 책을 보던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가 문 앞에 놓여 있던, 밥그릇이 두 개인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보가 덮인 밥상은 미적지근했다. 밥때에 먹지 않으니 밥도 국도 식어 있었는데, 석주는 물론 아진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게 느긋한 식사는 맛은 좀 떨어질지언정 좋았다. 평화롭고.

    석주는 아진의 밥을 정성스레 챙겨 먹이고, 정작 본인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밥보다 원하는 게 있어서 그랬다.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이던 아진이 식사를 끝내면, 석주는 몸을 느리게 좌우로 흔들며 자고 싶다는 티를 냈다. 뭐 마려운 개처럼 아진을 보면서 바라고 또 바랐다.

    아진이 못 이긴다는 듯 이불 위에 누우면 꾸물꾸물 옆구리를 파고들어서 또 잠을 잤다. 그렇게 의식을 놓으면서 중얼중얼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말을 연신 읊조렸다.

    “아진아, 미안해.”

    “아진아, 좋아해.”

    “아진아, 고마워.”

    “아진아…….”

    아진은 타령처럼 이어지는 제 이름을 듣고 있다 어이가 없어 웃었다.

    석주의 모자랐던 잠은 나흘을 내리 자고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닷새째 아침. 석주는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출근길에 나섰다.

    아진은 마당으로 이어진 창호지 문을 슬쩍 열어 두고 그 앞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 중학교 국어책과 공책을 펼쳐 연필을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공부에 뜻이 생긴 건 아니었다. 할 게 없어서 그런 거지.

    심심해서 글공부를 한다니. 아진은 제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길지 못했다.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 갈수록 미간에 주름이 졌다.

    중학교 국어책은 초등학교 국어책과 비할 바가 안 될 만큼 확연히 어려워졌다.

    “화자……. 서정적인……. 은유…….”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말보다는 활자로 더 많이 쓰이는 것들이라 아진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도 있었다. 끙, 소리를 내며 앓던 아진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주의 책장 한편에 꽂힌 국어사전을 꺼내 들었다. 두툼하고 묵직한 게 한 번 꺼낼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아진이 [서정]이라는 단어를 찾아 바쁘게 종이를 넘기는데.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렸다.

    석주가 퇴근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아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잠깐 굳어 있던 그가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바늘이 이제 막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석주가 이 시간에 왔다고? 왜?

    그가 일찍 퇴근하는 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이긴 했다. 가늠되는 이유라곤 일이 터졌거나, 누가 다쳤거나, 뭐 그런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아진이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그쯤, 쿵쿵쿵 하고 누군가가 다급하게 마루를 밟으며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진이 연필을 움켜쥐며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문을 쳐다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정장에 두루마기를 걸친 석주가 나타났다.

    아진이 재빨리 그를 훑어보았다. 혹 어디가 다쳤나, 싶어서. 또 피를 주렁주렁 달고 왔나 염려가 되어서.

    근데 석주는 멀쩡했다. 멀쩡하다 못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진아.”

    “왜 이렇게 일찍…….”

    “어, 일찍 퇴근했어. 네가 내 방에 있는 걸 아니까 일에 집중이 안 되더라고.”

    석주가 아진의 앞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두루마기가 펄럭거리며 바깥바람 냄새를 담뿍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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