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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44화 (144/261)
  • 144화

    석주는 잘생겼다. 상박도 두툼하고, 어깨도 넓은 게 여전히 사내답다. 근데 아파 보였다.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살이 내려 뺨도 홀쭉했고, 피부도 푸석푸석했다.

    사실 얼굴을 마주하면, 그때 나 다섯 숟가락 먹었는데. 이따 온다고 해 놓고. 왜 안 왔어요. 역시 사장님은 거짓말쟁이야. 양아치. 개새끼. 그런 말을 해 주려 했는데. 도무지 미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진이 석주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장을 활짝 열었다.

    “여기서 자려고요.”

    “…….”

    “사장님도 같이 자요.”

    아진은 익숙하게 이불을 꺼냈다. 매번 침대에서 자서 이불을 까는 건 오랜만인데, 그래서 그런가. 묘하게 설렜다.

    그렇게 이불을 깔고, 덮을 것을 펴고, 마지막으로 베개를 꺼내는데. 석주가 그것을 채 갔다. 자못 거센 손길이었다. 아진의 팔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명진이가 너 찾아갔던?”

    석주는 단번에 이유를 알아맞혔다.

    “…….”

    아진이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맞구나.”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베개를 터트릴 듯 꽉 움켜쥐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는지, 연신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가 아진에게 한 발 다가왔다.

    “아진아. 이러지 않아도 돼. 나 괜찮아. 그러니까 돌아가.”

    “…….”

    아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만 보면 명진을 불러다 기합이라도 줄 기세였다. 좋다고 냅다 제 곁에 누울 줄 알았는데.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꼴을 보자고 온 게 아니었는데.

    아진이 석주가 든 베개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제가 억지로 온 사람처럼 보여요?”

    “…….”

    “잘 거예요. 여기서.”

    “하아……. 아진아.”

    석주가 피곤한 낯으로 자신의 눈두덩을 문질렀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지나쳤다. 그리고 묵직한 베개를 툭 이불 위에 떨어트렸다.

    “저 되게 졸려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거든요. 그래서 오늘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래도 못 잤어요. 저도 사장님처럼 잠 병신이 되어 가나 봐요.”

    아진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극렬한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한껏 인상을 쓴 석주가 보였다. 아진이 그를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

    “병신끼리 돕고 살까요.”

    그 말에 석주의 숨이 뚝 끊겼다. 아주 먼 옛날, 제가 아진에게 했던 말이었다.

    ‘네가 다리 병신인 것처럼. 나는 잠 병신이야.’

    ‘…….’

    ‘우리 병신끼리 돕고 살까?’

    그와 함께 자고 싶어서. 그를 안고 자고 싶어서. 이 지독한 밤에서 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뭣 모르는 아이를 꾀는 못된 어른처럼 그에게 다가갔었다.

    “…….”

    석주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괴상한 감정이 전신을 감쌌다.

    네가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삶에 유일하게 반짝거렸던 그 과거, 그 순간을 까뒤집는 네 저의가 무엇인가.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용서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용서받을 자격도,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데.

    왜 또 나를 행복하게 해 주려 해. 왜 나를 살려 주려 해. 왜 그렇게 너그러워. 왜 그렇게, 왜 그렇게…….

    석주는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두려웠고, 동시에 기대도 됐다.

    아진이 그런 석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고꾸라진 석주의 시선과 친히 눈을 맞추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으면서.”

    “그건…….”

    “일 다 했으면 누우세요. 아니, 다 안 했어도 그냥 누워요. 제 마음 바뀌기 전에.”

    “…….”

    석주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제가 여기서 무얼 어떻게 해야 아진이, 신이 노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됐다.

    정승처럼 선 그에 아진이 옅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알아서 여기저기 불을 끄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달리 딱딱한 바닥이 은근히 편안했다. 두어 번 몸을 뒤척여 자리를 잡은 그가 탁탁 옆자리를 두드렸다.

    석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같은, 같은 이불에서 자려고?”

    “다른 이불에서 자면 같이 자는 게 아니라면서요.”

    “…….”

    “같이 자요, 우리.”

    석주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적 같고, 꿈 같았다.

    아. 진짜 꿈인가. 꿈인 걸까. 제가 쓰러진 이후로 여태 눈을 못 뜨고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깨 버리면 다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전까지 아진을 느끼고 싶었다. 그를 안고, 그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석주가 느릿하게 아진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차마 그에게 닿지 못하고 한 뼘쯤 떨어져서. 관에 들어간 송장 같은 자세로 뻣뻣이 누운 그가 천장을 아득히 올려다보는데. 아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춥다. 제 방은 되게 따뜻한데. 여긴 되게 춥네요.”

    그 말에 석주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 내가 아궁이에 불을 넣지 말라고 했거든. 지금 가서-”

    “사장님이 오시면 되잖아요.”

    “……어?”

    “사장님이…… 안아 주시면 되잖아요. 우리 원래 그렇게 잤었잖아요.”

    사장님이, 안아 주시면, 우리, 원래, 단어 하나하나가 감격스러웠다. 석주가 다시 몸을 뉘었다. 그래 놓고도 쉽게 아진에게 닿지 못했다. 정신이 멍했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도 엄청난 힘을 소모해야 했다.

    석주가 눈만 끔뻑이며 등신같이 시간을 낭비하는데. 아진이 짜증스레 말을 쐈다.

    “춥다고요.”

    “……응.”

    움찔 놀란 석주가 얼른 아진의 옆에 붙었다. 그 후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 조심히 아진을 안았다. 그의 청량한 체온이 품에 들어오자마자 긴 한숨이 흘러나갔다.

    “하아…….”

    죽어 있던 오감이 깨어나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다. 몸 여기저기에 질기게 엉겨 붙어 있던 불면증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생동감 넘치게 뛰었다.

    석주는 언제 망설였냐는 등을 보이고 있는 아진을 두 손으로 한가득 껴안았다. 그의 가슴에 뜨거운 손을 감고, 그의 늘씬한 허리 위로 두툼한 팔을 얽었다.

    “후우…….”

    석주가 재차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살 것 같았다. 비로소 진정한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제가 지금까지 죽어 있었구나. 걸어 다니는 시체였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번 물꼬가 터지고 나니 더는 아진에 대한 그리움을, 욕망을,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진을 더욱 깊이 껴안은 석주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에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목이…… 너무…… 뜨거워요…….”

    석주의 숨결이 델 듯 뜨거웠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처럼 살갗이 익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석주는 아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안았다. 안아서 터트리겠다는 듯, 제 품에 박아 넣겠다는 듯 굴었다.

    잠깐 뒤척거리던 아진이 한숨과 함께 사지에 힘을 쭉 뺐다. 그리고 홧홧한 석주의 체온을 실감했다. 등 뒤로 뜨겁게 발광하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어쩐지 뿌듯해졌다. 저 대단한 사람의 심장이 제 손아귀에 있구나, 제가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구나, 싶어서.

    “…….”

    “…….”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말 없이 서로를 체감하고 있었다. 잠을 자고자, 잠을 자게 하고자 온 것인데. 둘 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숨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진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던 석주가 낮게 말했다.

    “네가 변한 것 같아. 낯설어.”

    “……네?”

    “어른이 된 것 같다는 뜻이야.”

    “……저 사장님 처음 만났을 때도 스무 살이었는데요.”

    “그러니까. 그 스무 살엔 멋모르는 아기 같았는데.”

    석주가 중얼거리며 아진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를 안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의 냄새를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었어요. 사장님이 사 주신 책이요.”

    “똑똑해진 거랑은 조금 다른데.”

    석주는 아까, 아진이 ‘병신끼리 돕고 살까요.’라고 했을 때. 자신이 아진에게 그 말을 건넸던 그날을 상기하며 깨달았다. 그때의 아진과 지금의 아진이 다르다는 것을.

    아진은 차분해졌다. 그전에도 시끄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발랄하고 통통 튀는 듯한 아이 특유의 활기참이 묻어났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어른 같았다. 목소리도 조금 낮아진 듯하고, 표정도 무뎌졌다. 은근히 젖살이 묻어나던 몸과 얼굴도 선이 달라졌다. 성숙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아진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박장에 있을 땐 철없이 살 수 있었다. 비록 술과 도박, 그리고 남녀의 추잡한 관계들까지. 모두 어른들을 위한 유흥이었으나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른이 아니라서 버틸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석주의 집에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창 그와 붙어먹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아진이 변하기 시작한 시발점은 꽃님의 병환이었고, 그 후에는 석주의 오해였고, 마침표는 꽃님의 죽음이 찍었다.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석주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아진의 동그란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진아.”

    “네.”

    “고마워.”

    “…….”

    “내가 잠을 못 자서 아프든, 그렇게 아프다 죽어 버리든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너에게 그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고 싶은데.”

    “…….”

    “지금이 너무 좋아서 그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네. 미안해.”

    아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미련하게도 코끝이 시큰거렸다. 석주의 사과를 받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손목을 긋고 병원에서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수십 번도 더 받아 온 사과인데. 지금의 사과는 유달리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어 왔다.

    아무래도 저를 감싼 석주의 품 때문인 것 같았다.

    네가 너무 그리웠어.

    네가 너무 고팠어.

    네가 너무 간절했어.

    그 말을 온몸으로 하고 있어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러게 그러지 말지.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지 말지. 나를 조금만 덜 미워하지. 그랬다면 우리가…… 우리는……, 까지 생각하던 아진이 다급하게 눈을 감았다. 부질없는 상상으로 이 밤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잘래요.”

    “응.”

    “사장님도 자요.”

    “……그래.”

    아진은 의식해서 고른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열 번쯤 반복했더니 잠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러다 소리 없이 잠이 들었다.

    못 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소란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며 잠을 설치기엔 석주의 품이 너무 따뜻했다.

    너무나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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